〈 247화 〉후일담 : 나와 수진이의 커튼콜(8)
새해가 되고 선생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
엄마랑 오라비랑 계속 같이 살다가 떨어져 살면 외롭겠지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은 건 내가 야속한 인간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아마 다 이 사람 때문이다.
따뜻한 햇볕이 기분 좋았는지 꾸벅꾸벅 졸다가 내 어깨에 기댄 선생님을 힐끔 바라봤다.
뭔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선생님이 가장 먼저 보이고 식사할 때도 선생님이 보이고 TV를 볼 때도 같이 게임을 할 때도 항상 선생님이 보인다.
내 눈이 닿는 곳에 선생님이 있으니 뭔가 편안한 기분이다.
이상하지. 엄마도 오라비도 가족이지만 옆에 계속 있으라고 하면 불편할 뿐인데 선생님은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이게... 어쩌면 사랑이란 건지도 모르지.
...곧 봄이 다가온다고 나도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 보다.
선생님의 머리를 슬쩍 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결혼식은 5월 29일로 잡았다.
일단 생일이 지나고 결혼식을 올려야 여러모로 편리하고 가장 중요한 건 그년 때문이다.
선생님이 그년이랑 결혼한 달이 5월이니 내 결혼식은 반드시 5월에 해야만 한다.
선생님은 잊었다고 했지만 내가 찝찝하다.
선생님에게 있어 5월은 나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달이며 나와 부부가 된 달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바보 멍청이."
내 맘도 모르고 편히 자는 모습이 샘이 나서 얼굴을 쿡쿡 찔렀다.
몇 번 그렇게 찌르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입을 벌리고 내 손가락을 물었다.
"...언제 깼어요?"
"바보 멍청이부터."
처음부터 그냥 꾸벅 꾸벅만 했을 뿐 잠든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깼으면 말해요."
"니가 뭐할지 궁금했어."
"선생님은 나이를 자꾸 거꾸로 먹는 것 같은데요."
"젊어져서 좋네."
그리 말하곤 내 허벅지에 드러누워선 나를 올려다보는 선생님.
변했다. 참 많이 변했어.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몸에서 맡아지던 그 지독한 담배 냄새만큼이나 생활에 찌든 지독한 인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변하셨는지.
아니, 어쩌면 선생님의 지금, 이 약간 유치한 태도가 본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이 누군가에 따라 태도가 바뀌니까.
부모 앞에서의 모습과 친한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지.
선생님이 나에게 보이는 모습은 친한 친구분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흡사하다.
나이만 먹은 어른. 어른이. 하지만 내가 연하라고 필요 이상으로 어깨에 힘을 주는 모습보다 이런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니 뭔가 신뢰받는 기분이니까.
서로를 믿고 자신의 약점도 드러내 보이는 관계.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아껴주는 관계.
그게 부부가 된다는 것이겠지?
***
선생님은 또라이가 확실하다.
무사히 결혼을 마치고 로맨틱한 분위기로 끝이 나리라 생각한 첫날 밤에 신부에게 `천마수룡포`를 외치며 오줌을 싸는 또라이다.
신혼여행에서 신부한테 오줌싸는 또라이가 있다? 삐슝빠슝이야.
완전 미친놈인 줄 알았다.
왜 평소엔 스윗한 사람이 섹스만 하면 저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오냐오냐하고 받아줘서 그렇겠지.
역시 쌤쌤은 틀린 방향이 아니다. 고삐를 좀 쥐고 있어야 선생님이 미쳐 날뛰지 않겠지.
신혼여행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첫날부터 불안했다.
다행히 신혼여행에서 큰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여행을 오니 즐겁기만 했다.
선생님의 신혼여행 처가 제주도라는 걸 알았을 땐 그년이 떠올라서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이었으나 나와의 신혼여행으로 덮어씌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이게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선생님과 산책로를 걷고 바닷속을 구경해보기도 하고 같이 말도 탔다.
신혼여행이라 하기엔 굉장히 평범한 일정.
하지만 그 평범함도 누구와 함께하는가에 따라 특별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내가 다리가 아프고 힘들다고 칭얼대면 무릎을 꿇고 업어주려고 하는 이 어리숙하고 상냥한 아저씨가 옆에 있다면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 어깨를 기대어 앉아있기만 하더라도 특별한 일이 되겠지.
난 겨우 이 정도에도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바라왔는데 이제서야 찾은 기분이다.
나를 필요로 해주고 내가 필요로 한 사람.
서로 어딘가 모난 부분이 있어서 끌리게 된 거겠지.
운명이란 건 믿지 않지만... 어쩌면 이런 것도 넓게 보면 운명인지도 모른다.
으... 예전엔 이런 생각 하면 오글거린다고 싫어했는데 선생님이랑 붙어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이런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서 곤란해.
***
요즘따라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든다.
선생님과 결혼한 다음부턴 피임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밤마다 짐승이 되어 날 괴롭힌다.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데도 이상하게 임신이 되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 정도면 임신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임신 테스트기를 몇 개 사와서 한 달에 한 번쯤은 테스트했는데 계속 두 줄이 나오지 않으니 뭔가 심란했다.
내가 쪼그려서 임신 테스트기를 보며 울상을 짓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다가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왜? 아쉬워?"
"네."
"그렇게 임신을 하고 싶었어?"
"네. 임신시켜주세요."
"큽흡."
선생님은 내가 이런 말을 꺼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적잖이 당황하셔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운동을 열심히 하시더니 이제 나 정도는 정말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그 듬직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뭔가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래. 임신시켜줄게."
"꺅!"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지만, 신혼이란 원래 이런 거겠지?
***
선생님과 신혼여행을 하며 나눴던 이야기를 주제로 과제를 해서 제출했더니 교수님이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동아리에서 고립되어 그만두게 되었으니까.
나름 MT도 가서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렇게 뒤에서 뒷담을 할 줄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저게 맞는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혼자가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잖아?
힘들다고 멋대로 가정사정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느새 고립되어 있었지.
어딘가에서 들은 말이 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
선생님은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시기가 된다고 시니컬한 말을 했는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내가 잘못한 걸까? 난 그저 배려했을 뿐이야.
외로웠다. 대학교는 너무 넓었는데 그 안에 있는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다.
애초에 친구 따윈 없었지만 그런데도 혼자서 대학생활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너무 괴로워서 어떻게든 아는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동아리 가입이었다.
동아리 가입은 정말 큰 맘을 먹고 결정한 일이다.
내가 등교를 할 때면 선생님의 얼굴에 조금 외로워 보이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라는 선생님의 응원에 힘입어 정말 큰 맘을 먹고 결정했단 말이다.
그래서 이곳저곳 찾아봤는데 내가 갈만한 동아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마음 편히 다닐만하다고 생각한 창작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처음 입부할 때 내가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정말?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악의에 가득 찼던 그 표정들을 본 순간 이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들이밀었으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냥 그만뒀다. 이만하면 됐다. 솔직히 학교에 친구 없이 다니고 졸업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내가 굳이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으며 친구를 사귈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런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월억킥! 월억킥!"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그래서 그 스윗한 간지 중년 선생님 이야기 좀 더 들려달라니까?"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얘는 진짜 중증이네? 녹음한 거라도 들려줄까?"
같은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던 로판 작가 이서윤.
서윤이는 내가 작가라는 걸 듣고 호기심이 생겨 따라온 아이였다.
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무슨 볼일이냐고 밀어내도 싫은 얼굴 하나 보이지 않고 달라붙어서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영감이 솟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임신시켜주세요~ 했다고? 꺅!"
"아, 진짜!"
나름 조용히 말했는데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여길 다 쳐다보고 있다.
흥분하면 멋대로 목소리가 커지는 아이.
부끄러웠다. 역시 서윤이랑 카페에 오는 건 실수였다.
"그래서 그래서!"
"일단 나가자."
"아, 왜!"
"따라와!"
곤란한 아이야. 왜 카페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거야?
자주 오는 카펜데 한동안은 못 올 것 같다.
그래도 뭔가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호기심과 창작 욕구를 위해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를 물어오는 섬세함이란 없는 아이지만 그걸 떠벌리지는 않는다.
아니... 방금 카페에서 떠벌렸나? 아, 진짜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뭔가 입이 방정맞으면서도 또 남들에게 함부로 비밀 이야기를 꺼내진 않는 으... 아무튼, 그런 아이다.
"수진아~ 잘못했어~"
"알면 다행이야."
서윤이의 손을 붙잡고 카페에서 빠져나와 길을 걷던 중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아, 이게 선생님이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꺼낼 때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는 이유일까.
나도 이제 그 느낌을 좀 알 것 같다.
***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임신. 임신 말이다.
오래 기다렸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난 솔직히 불안했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 너무 임신이 안 됐으니까.
하지만 임신을 눈치챈 그 날은 뭔가 좀 달랐다.
아침부터 머리에 열이 있는 듯하고 뭔가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혹시나 싶어 병원부터 찾아갔는데 아픈 건 아니고 임신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 드디어 임신했구나. 다행이야.
가슴을 쓸어내리고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옆에 앉아있던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감격의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이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모습을 보니 임신을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생님은 혹시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어 아이가 없어도 둘이서라도 행복하게 잘 살자는 이야기를 종종 꺼내셨지만 역시 본심은 달랐나 보다.
후훗. 귀엽다.
아, 이렇게 좋아하시니 아이한테도 자상하게 대해주시겠지.
집을 나간 그 개자식과는 다르다. 나와 우리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주시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 앉아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솔직히 별로 티가 나지는 않는데 뭔가 배가 살짝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이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말이지? 어떤 아이일까?
첫째는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 오라비 같은 무신경하고 건들거리는 인간을 오빠로 두면 얼마나 피곤한데.
뭐, 남자아이가 태어나도 싫지는 않다.
선생님은 은근 남자아이를 바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상관없지.
선생님과 나의 아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니까.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