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후일담 : 나와 수진이의 커튼콜(5)
이건 안 되겠는데.
휴대폰에 적힌 시간을 확인해본다.
자료를 찾는데 5분, 지금 소설을 읽는데 10분이라는 시간을 소모했다.
앞으로 15분에서 2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처음부터 읽다간 끝이 없겠다.
수진이는 눈치가 빨라서 언제 눈치챌지 모른다.
아니, 희진이 고년이 제 엄마를 닮아서 눈치를 살살 보다가 수진이에게 이실직고하고 그다음에 기다리는건... 상상하기도 싫다.
수진이는 내가 가장 극혐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겠지. 이번에는 진짜 똥꼬에 딜도가 꽂힐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귀여운 고양이처럼 보이는데 꼬리를 밟았다 하면 날 고추부터 씹어먹는 호랑이가 된다.
조심해야지.
조금 중요하다 싶은 부분을 먼저 읽어보자.
그래,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내가 아내와 마트에 쇼핑하러 갔을 때 마주쳤던 그 순간이 궁금하다.
수진이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눈앞에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에 순간 이성을 잃고 본성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바람을 피우는 거냐고 소리 지를 뻔했다.
간신히 참았다.
착각하고 있었어. 내가... 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거였지.
이상하다. 왜, 내가 불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런 목적으로 만나고 있던 게 아닌데.
도망쳤다. 마지막에 내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언제부터? 이게 뭐지.
나 언제부터 선생님을...?
복잡했다. 언제부터지?
내가 언제부터 갑자기...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그저, 그저 선생님이 무슨 심정으로 날 만나려는지 알아보려고 했을 뿐인데.
잘 모르겠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아닐 거야.
갑자기 집을 떠난 그 개자식이 떠올라서 그런 걸 거야.
우릴 버리고 떠난 그 개자식과 너무나 똑같은 상황이잖아.
날 사랑한다고 해놓고서 뒤에서는 마누라랑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거잖아.
날 가지고 논거잖아. 쓰레기 새끼.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날 가지고 놀았어. 날 버리고 떠났어.
으득.
이가 갈렸다.
머릿속이 온통 선생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참을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어.
쓰레기 새끼.
***
키스했다.
키스해 버렸어.
당황해서 도망쳤다.
키스, 키스했다니까. 키스, 키스!
혹시라도 선생님이 쫓아올까 봐 뛰어서 도망쳤다.
마스크 때문에 평소보다 숨이 가쁘다.
머리도 어지러운 것 같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엄마는 나한테 밖에 다녀왔으면 손발부터 씻으라고 잔소리를 해왔지만, 지금은 그런 잔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스크를 벗었다.
선생님과 맞닿았던 입술을 더듬어봤다.
조금 거칠었지만 따뜻하고 촉촉한 느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서 잘 몰랐는데 뭔가 따뜻한 기분이 들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첫 키스는 레몬맛이라는데... 카푸치노 맛이었다.
"야, 이수진! 요즘 전염병으로 위험한데 왜 손도 안 씻고 손가락을 빨고 있어! 가서 손 씻어!"
"아씨! 알았다고!"
"이년이 왜 돌아오자마자 승질이야?"
누가 먼저 성질 부렸는데!
그 멍청이 오라비가 없으니까 엄마가 자꾸 나한테 신경을 쓴다.
예전엔 그렇게 신경 써달라고 난리를 쳐도 신경도 안 쓰더니 짜증 나.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한동안 입술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입술에 손이 갔다.
첫 키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갑자기 변심해서 날 덮쳐오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반에 선생님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반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선생님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다.
선생님이 무슨 요리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카레를 하기로 했다.
카레는 요리를 처음 해보는 사람도 실패하기 어려운 간단한 요리니까.
그리고 카레라고 하니 뭔가 가정적인 느낌이라서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조금 긴장된 느낌의 식사가 시작됐다.
선생님은 엄청 서둘러서 밥을 드셨다. 뭔가 쫓기는 사람 같다.
원래 빨리 먹는다나? 몰랐다. 만난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모르는 것투성이다.
카레도 좋아하는 음식이었구나. 잘됐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오늘 하루같이 식사를 하며 안 사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갑자기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이 집을 나가기 전.
"아내가 집을 나갔어."
선생님의 말이었다.
뭔가 당황해서 배웅하긴 했는데...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소란스러웠다.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터벅터벅 걸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방에 있는 거울에 눈이 향했다.
웃고 있다.
입꼬리가 씰룩이며 웃고 있다.
왜? 왜 웃어? 미쳤어? 웃을 일이야?
지금 나 때문에 선생님의 가정이 파탄 나고 있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내가... 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음을.
어렴풋이 눈치는 챘다.
아마... 나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선생님과 만날 때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기대되고 선생님이 날 보며 작게 웃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든 걸 포기한듯한 동태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사람이 확 바뀌어버린 선생님.
예전에는 조금 괜찮게 생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멋있게 느껴진다.
이상해. 아저씬데. 38살인데.
여름이라 반팔 셔츠 차림으로 강의를 하는 선생님이 떠올랐다.
팔에 떠오르기 시작한 힘줄이나 핏줄이 뭔가... 멋있게 느껴진다.
운동하면서부터 자신감도 생기셨는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끈적하고 울적한 분위기에서 밝고 산뜻한 느낌의 강의가 되는 요즘.
강의실에서 같은 강의를 듣는 다른 여학생들도 선생님이 바뀌어서 조금 놀랍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 그 소리를 들었다.
멋있어졌다느니 원래도 괜찮았는데 그 꼰대 같은 태도가 역겨웠는데 뭔가 바뀌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웃기시네. 선생님은 원래 괜찮았는데.
선생님이 꼰대 같다면서 놀리던 년들이 별꼴이다.
아니... 나도 선생님을 꼰대에 담배 냄새나는 아저씨라고 생각했었지.
으으...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날 위해서 금연하고 하지도 않던 운동을 하고 10년이 넘게 해왔던 강의 스타일도 바꾸고. 몬가 몬가야...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제 상관없잖아.
나 선생님 좋아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솔직히 그 아낸지 뭔지 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랑 떡 쳤다고 했잖아?
걸레잖아. 내가 더 나은 거 아닌가?
방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가슴도 나올 만큼 나왔고 골반도 있는데? 마트에서 봤던 그 여자? 껌딱지였잖아?
내가 더 나은 거 같은데? 그래. 내가 더 낫지.
응응. 여고생이 훨씬 나은 거 아니야?
그래. 내가 이겼지.
선생님도 내가 예쁘다고 자주 그러셨잖아.
신사여서 그런진 모르겠는데 선생님은 내 가슴이나 엉덩이엔 별로 시선을 주지 않으시니까.
이거 말고 그런 점도 멋져.
고단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지금까지 별탈없이 버텨왔다는 거 말이야.
일단 내 또래의 등신들보단 훨씬 낫지.
돈도 못 버는 것들이 어른들 흉내 낸다고 꼴값 떠는 거 진짜 병신같은데 지들은 몰라서 더 웃겨.
연예인 누가 멋지다니 뭐니 하는 것들도 웃기고 한국 남자는 어쩐다니 하는 것들도 등신 같아.
어차피 니들이 좋다고 데려가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
돈도 없으면서 화장품은 비싼 거 찍어 바르려고 하고 엄빠 등꼴 부숴 먹어서 비싼 패딩 입고 다니는 거 진짜 개꼴보기 싫어.
미쳤나 봐. 왜 그런 게 좋다고 입고 다니는지 전혀 모르겠어.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괜찮지.
항상 깔끔하게 유지하고 다니고 모나미 같은 옷만 입고 다니지만, 겨울에 코트 입고 있던 것도 좀 괜찮았던 것 같아.
아, 진짜 미치겠다.
선생님이 진짜 덮쳐오면 어쩌지?
남자가 집에 부른다는 건 그런 뜻 아닌가?
어쩌지? 진짜로 갑자기 좋아한다면서 덮치면 어떡해...
피임... 콘돔이라도 사야 하나?
아니, 아니야. 선생님은 그렇게 함부로 몸을 놀리실 분이 아니야.
선생님은 신사니까.
...19살이나 차이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데 신사라니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뭔가 멋있어...
어떤 요리가 나올지는 솔직히 기대도 안 한다.
남자의 요리가 그렇지. 적당히 구운 요리를 가지고 허풍을 떠는 게 으레 남자들이니까.
반에서 허풍떠는 남자애들을 보면 다 그랬지.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이 요리를 늘어놓은 걸 보는 순간까진.
선생님이 만든 요리는 외형도 훌륭했는데 맛도 손색이 없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 이전에 양파 같은 남자라고 했는데 진짜 모르겠다.
요리 맛있어... 나보다 더 잘해...
나는 그저 우물우물 준비된 요리를 먹는 수밖에 없었다.
카레는 실패였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은 갑자기 본인의 친가가 부천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눈만 끔뻑였다.
나를 본인에게 있어 가장 추억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 걸까.
왜 그랬을까? 하필이면 왜 부천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우리를 알아보긴 힘들 텐데 굳이 부천까지 간다고 생각했어.
그땐 그냥 상당히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본인이 자란 곳을 내게 보여주며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몬가... 몬가 귀엽다.
나이에 안 맞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싶다.
크기만 큰 강아지 같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다.
뭔가 몽실몽실한 기분이 가득한 차 안에서 선생님의 머리를 쓰다듬어보는 망상을 했다.
뭔가 싫어하면서도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입꼬리가 씰룩이는 선생님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뻔했다.
차가 점점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아쉬울 뿐이었다.
지금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집에 도착하고 선생님이 차를 세워줬다.
나는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이렇게 돌아가긴 뭔가 진듯한 기분이라 생각을 바꿨다.
"선생님은 본인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에요. 그럼 이만!"
문을 닫고 뛰었다.
코너를 돌아 가슴에 손을 얹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고개를 살짝 내밀어서 선생님이 떠나가는지 확인했다.
한참을 있다가 떠나가는 차.
히힛.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선생님은 오늘 온종일 내 생각이 나겠지?
뭔가 좋다. 선생님이 아침부터 저녁 아니, 자기 전까지 온통 내 생각만 한다는 사실이 뭔가 기분이 좋아.
아주 예전 일이다.
오라비가 지금은 저렇게 멍청해도 예전엔 영재 소리도 듣는 인간이었나 보다.
그래서 엄마도 개자식도 다 오라비만 오냐오냐해서 짜증이 났지.
나도 할 수 있다고 봐달라고 발악을 했는데 어느새 오라비는 혼자서 굴러버리고 난 뭐든 잘하는 착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엄마랑 개자식은 오라비만 챙겼지.
알고 보니 그냥 오라비가 성격이 좋아서 이상하게 뭘 더 주고 싶은 그런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걸 안 순간 내가 얼마나 마음이 못난 인간인지도 알게 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오라비의 소설(풋!)을 비웃으려고 한 거였으니까.
내가 무슨 의도로 쓴 건지 알면서도 잘 썼다며 칭찬하고 연재해보라며 아이디도 만들어주고 할 땐 진짜 그냥 졌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오라비는 개자식이 집을 나갔다는 소문이 돌아도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는 거겠지?
나랑은 완전 다른 인간. 나도 친구랑 사랑 이야기 같은 거 해보고 싶은데.
선생님에 대해서 누군가한테 이야기하고 싶다.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젠 괜찮아.
들려줄 사람이 없어도 돼.
옛날부터 누구든지 나만 생각하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찾았어.
선생님은 죽을 때까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줄 거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