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후일담 : 나와 수진이의 커튼콜(3)
수진이와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좀 둘러본 후에 배경을 공용 서버와 비슷하게 재배열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집은 부천에 있는 집이 아니고 서초구에 있던 그 집이니까 말이다.
수진이와 함께 정든 집으로 돌아오니 정말로 이 세계가 꿈이 아니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재건축도 하고 리모델링도 했는데 이상하게 정감이 가죠?"
수진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수진이를 따라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 건물이 노후화해서 재건축도 했고 리모델링도 하긴 했다.
그런데도 이 집은 정감이 간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수진이가 깍지를 껴오더니 검지로 내 손등을 살살 긁으면서 눈웃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 정도야 쉬운 질문이지.
"예전에 그랬잖아. 나한테 선물 많이 해주겠다고."
이 집은 넓다. 넓지만 은근히 좁다는 느낌이 든다.
수진이가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나에게 선물이라고 줬던 물건을 웬만해선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기에 내 물건들이 제법 많아서 그리 넓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더는 쓰지 않거나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은 곧장 내다 버려서 좀 단출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수진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생활감이 없어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며 싫어했었지.
그 결과물이 이 정든 집이다.
진수와 희진이는 돈도 많이 버는 우리가 왜 이렇게 낡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나중에 내가 쓴 소설을 읽고 나서야 더는 이 문제로 말을 해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이즈가 작은 물건들로 선물해줘서 다행이야. 너무 큰 거로 받았으면 집이 창고가 됐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 없이 선물하고 그러지는 않거든요?"
그래. 수진이는 내가 부담스럽지 않을 선에서 선물을 고르곤 했지.
수진이가 주는 선물은 몸에 뿌리는 향수나 얼굴에 바르는 스킨로션, 넥타이나 벨트 같은 조금 실용적인 물건 위주였다.
향수나 스킨로션 같은 소모품은 다 쓰고나서 버렸기에 조금 짐이 많구나 싶은 느낌이지 매번 큰 선물을 해왔으면 진짜 창고가 됐으리라.
"선생님은 선물하는 보람이 있었어요. 어떤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중하게 써 주니까."
"그럼. 누가 준 선물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물건도 잘 버리지는 않았지만, 수진이에게 받은 물건만은 특별했다.
수진이는 내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우리 쭌수가 참 기특해요~ 칭찬 스티커 붙여주고 싶네~"
"그립네. 칭찬 스티커."
진수가 모으던 칭찬 스티커는 컴퓨터가 되었다.
친구 녀석들이 학교에서 게임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걸 듣다 보니 본인도 하고 싶었나 보다.
진수에게 컴퓨터를 사주고 방에 설치를 해주니 신이 나서 게임을 하는데 그 모습이 뭔가 흐뭇해서 진수 옆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 훈수를 뒀다.
수진이도 내 옆에 앉아서 훈수를 뒀는데 진수가 짜증을 내며 우리를 쫓아낸 다음부턴 그냥 얌전히 구경만 했지.
진수는 그 이야기를 학교에서 했는지 나와 수진이한테 친구들의 부모님은 게임을 하면 화를 내고 말리는데 왜 말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부모도 게임을 하는데 아이가 하지 말란 법이 어딨느냐며 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지.
그립다. 늙으면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진다는데 몸은 젊어졌어도 머리는 그대로인 모양이다.
"의외에요."
"뭐가?"
"처음 만났을 때 `나 쥬지가 아파.` 같은 헛소리를 하시길래 집에 오면 바로 덮치실 줄 알았거든요."
"내가 뭐 짐승이야?"
"아니었어요?"
왜 그렇게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네.
나 정도면 한국 남자 평균 아닌가?
남자라면 누구나 수유대딸 정도는 해보고 싶고 스팽킹도 해보고 싶고 소프트 SM도 해보고 싶고 그런 거지.
"일단 먼저 씻어."
"네~."
수진이를 먼저 샤워실로 들여보내고 희진이가 보내온 자료를 컴퓨터로 전송해서 찾기 시작했다.
솔직히 파일이 너무 많아서 다 찾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수진이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메모장에 써넣곤 했는데 실생활은 깔끔하게 하는 녀석이 컴퓨터는 지저분하게 써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메모장을 하나하나 다 뒤져보면 온종일 찾아봐도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를 양이다.
수진이가 샤워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30~40분.
부족하다. 이 정도 시간으론 60살이 될 때까지 글을 써온 작가의 메모장을 다 뒤져볼 수 없다.
생각해보자. 수진이라면 어떻게 정리를 해뒀을까.
일단은 내가 뒤져볼지도 모르는 곳에 숨기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정리가 귀찮다고 바탕화면에 폴더를 대충 만든 다음 저장을 하는 녀석이 굳이 깊숙한 곳에 숨겨두지도 않겠지.
수진이가 로맨스, 로맨스라...
아! 생각해보니 수진이의 친구가 로판을 쓰는 작가였지.
이런저런 조언을 좀 들었으리라.
...대학교 과제에 관한 폴더가 아닐까?
수진이가 `대학교` 라고 적어놓은 폴더에 들어갔다.
폴더는 학년별로 정리되어있었고 그 폴더에 들어가면 1학기, 2학기라는 폴더로 또 세부로 분할되어 있었다.
수진이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 모양이다.
수진이가 어떤 폴더에 글을 썼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폴더가 구분되어 있으니 다 뒤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나는 1학년 폴더부터 차근차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굉장히 쉽게 발견해버렸다.
1학년 2학기 폴더에 잡다한 것이라는 이름의 폴더.
딱 봐도 이게 수상해 보였다.
폴더를 켜보니 뭔가 메모장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그 폴더에 있는 메모장을 정리해서 다시 휴대폰으로 옮겼다.
시계를 살폈다.
수진이가 로맨스 소설에 관해 썼을 것으로 예상하는 메모장을 찾는데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건 수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승리다.
나는 소파에 앉아 수진이의 메모장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메모장은 그냥 1이라고 적힌 메모장이었다.
처음 메모장을 켰을 땐 이건 꽝이라고 생각했다.
윗부분에 대학교 과제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내리기 시작하니 3페이지 정도의 스크롤이 내려가자 내용이 바뀌었다.
로맨스에 대하여.
이 녀석... 숨기는 솜씨가 제법이다.
내가 혹시라도 컴퓨터를 뒤져볼까 봐 연막을 친 모양이다.
아무래도 친구가 해준 조언을 정리한 거겠지.
나는 서둘러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상당히 무난했다.
작품 소개를 쓰는 법부터 소설을 연재하는 시간대, 팬덤을 유지하는 법과 어떤 서사를 보여줘야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내용이 다 그럴 듯하기는 했는데 작품 소개에 관한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작품의 작품 소개와 비슷하게 써야 독자들이 읽어본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리일지 모르겠다.
다 똑같으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안보지 않나? 적어도 웹소설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그런 느낌인데.
아무튼, 이게 아니지.
1이라고 적힌 메모장은 전부 로맨스에 대한 친구의 조언과 그걸 수진이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이었다.
나는 곧장 1을 끄고 2를 켰다.
2는 일기였다. 이건 그냥 넘겨야겠다.
그렇게 뒤져보던 중에 `ㅁㅇㄼㄷㄱ`라거나 `ㅁㄴㅇㄼㄷㅎㅂ`같은 아무렇게나 적은 메모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열어봤더니 진짜 잡담에 가까운 글이 있어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껐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메모장이 있었다.
`ㄴㅇㅇㅈㅆ`
이 메모장만 눈에 띈 이유는 아마 이 메모장만 제목에 쌍자음이 들어갔기 때문이겠지.
다른 메모장에 적힌 자음과 모음의 나열은 쌍자음이 들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렇게나 눌러서 저장했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데 아무렇게나 눌러서 저장한 메모장의 이름에 쌍자음이 들어갈 리는 없지. Shift 키를 눌러야 하니 말이다.
김준수. 너는 하꼬 분충보다 탐정이 더 어울려.
이거 그거 아닌가?
옛날에 유행했던 드라마로 `나의 아저씨.`
딱 맞는 것 같다.
이걸 봐도 되는 걸까... 당연히 되지. 이건 못 참지!
수진이에게 걸리면 등에 여래신장을 맞을 것이 확실했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월억킥의 로맨스 소설. 이건 못 참는다.
***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아니, 조용해졌나?
전염병이 돌고 나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됐다.
인터넷엔 갑갑하고 짜증 난다는 글이 올라오지만 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개년들이랑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까.
머리도 나쁘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육수가 나올 것 같은 애들이 날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지만 학원은 가야 하니 어차피 몇몇 아는 얼굴들을 마주치긴 하지만 수능이 1년도 남지 않았으니 나에게 신경 쓰는 인간은 이제 거의 없다.
다행이야.
솔직히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알겠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난 정말 막돼먹은 년이 맞긴 맞나 보다.
그렇기 때문일까? 학원에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날에 하필이면 비가 왔다.
매일 뉴스는 보고 다니는데 왜 하필 오늘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비가 왔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하필이면 야간 근무를 들어간 날이어서 우산을 가져올 수도 없고 매장에는 우산도 팔지 않았다.
짜증 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치긴 그친다고 하니 여기서 좀 기다리다 보면 되겠지.
오늘 연재는 휴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취!"
!!!
갑자기 들려온 재채기 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액정이 깨질까 봐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재채기 소리를 낸 사람이 갑자기 발을 들어 올려 발등으로 떨어지는 휴대폰을 받으려고 했다.
툭 탁.
받지는 못했으나 곧장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아 휴대폰 액정이 깨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짜증 난다. 왜 갑자기 재채기하고 난리야?
몸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향수와 담배 냄새.
향수로 몸에서 나는 냄새를 지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싸구려 같은 향수와 담배 냄새가 섞여 인상을 찡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표정을 유지하고 있으려니 눈앞에 남자가 뭔가 놀란 표정으로 내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다.
왜 남의 휴대폰을 멋대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액정이 아닌 내 휴대폰을 쳐다보는 거지?
"저..."
내가 얼른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눈치를 주자 그제야 내 쪽을 쳐다보는 남자.
누구였더라? 국어 강사였던 건 기억하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아, 이런... 미안하다. 액정은 무사한듯싶은데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전화하렴."
중저음에 매력적인 목소리.
이상하지. 키는 제법 크고 외모도 제법 잘생겼는데 뭔가 거슬린다.
아무래도 평소에 학생들을 바라볼 때 썩은 동태눈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뭘 물어보면 귀찮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느낌으로 가르치며 뭔가 선민의식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겠지.
하지만 내 휴대폰을 들고 우왕좌왕하며 지갑에서 대뜸 명함을 꺼내는 지금의 이 모습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당황해버렸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과한 동작이 나와버렸다.
남자는 나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우산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 정도면 휴대폰을 떨어뜨려도 용서해줄 만하지.
그런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먼저 걷기 시작한 남자를 따라갔다.
그렇게 나와 `아저씨`의 이야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