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完-
불현듯 눈이 뜨였다.
어째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이곳은 부천에 있는 내 방이었다.
"뭐야..."
나는 내 목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깜짝 놀라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목에 있던 주름이 사라졌다.
손을 내려다봤다.
주름 하나 없는 튼실한 손이 보였다.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로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10대에서 20대 사이로 보이는 얼굴.
꿈인가.
나는 수진이가 내 옆구리를 꼬집던 그때처럼 내 옆구리를 있는 힘을 다해 꼬집었다.
아팠다. 이건 현실인 거 같다.
그럼 수진이와 있었던 모든 일이 다 꿈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리얼한 꿈이 있을 리가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회귀라는 걸까.
그 순간 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엔 수진이가 없다.
아무리 봐도 10대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얼굴.
이 세상이 만약... 정말로 회귀한 다음의 세상이라면... 수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수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작은 실수 하나로 다시는 수진이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해야 할까.
나는 혼란에 빠진 채 그저 눈물을 흘렸다.
수진이를 먼저 떠나보낸 아픔에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
마음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정말로 회귀를 한 느낌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젊었을 적의 모습 그대로셨다.
그래.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친구에게 보증을 서시고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나겠지.
아버지랑 어머니는 빚을 갚고자 고생하시고 건강을 해치실 테고.
그런 미래가 찾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함부로 부모님에게 그 사실에 대해 알려드릴 수 없었다.
혹시 내 행동으로 미래가 바뀌어버려 수진이와 내가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최대한 고등학생 때의 김준수를 연기하려 했다.
학교로 걷는 길.
뭔가 주변의 풍경이 이상해 보였다.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뭔가 낯선 그 묘한 이질감.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주 오래된 기억이어서 그렇겠지.
나는 다시 한 번 내 옆구리를 꼬집어봤다.
아프다.
이 아픔이 거짓일 리는 없지.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건 회귀다. 그렇다는 말은 수진이도 이 세상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또다시 수진이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18살이다.
앞으로 20년의 세월만 참고 기다리면 수진이를 만날 수 있다.
아득하다.
아득하지만... 수진이를 만날 수 있다면 참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 생각하며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향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자리가 어딘가 하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이 어디에 앉았는지 기억하는 녀석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다른 애들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빈자리가 다 메워지고 한 자리가 남았을 때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면 공부부터 하던 녀석이 왜 그리 서있냐? 치질?"
"아니야, 인마."
근 100년 만의 학교는 낯설었고 친구들이 전부 타인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눈앞에서 히죽거리며 농담을 던져오는 준범이 녀석만큼은 100년 후든 지금이든 변한 게 없었다.
"야."
"왜?"
"관리 잘해라. 너 나중에 탈모 오니까."
"뭐래, 미친놈이."
"탈모 맞네! 등신아. 너 머리 지금 M잔데?"
우리가 잡담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준호가 그리 말을 걸어왔다.
"뭐래 시발!"
우리는 담임선생님이 올 때까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순간,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준범이랑 준호가... 내 근처에 앉았던 적이 있었나?
***
이야기가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 시간을 때우고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아, 그래 이때부터 학교에서 급식을 주기 시작했었지.
그래. 이건 기억이 난다.
나는 점심을 먹은 다음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운동장으로 나갔다.
뭔가 세상에서 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라 기분이 착잡했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으려니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나 내일부터 교생실습으로 올 사람인데 여기 교장실이 어디니?"
나는 그런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눈치채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꽈악 끌어안았다.
"꺅!"
깜짝 놀란 듯 짧은 비명을 지르는 그녀.
속을 줄 아나 보네.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어, 어떻게 아셨지?"
나를 슬쩍 밀어내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아니 수진이.
안경을 쓰고 염색을 했어도 그 짓궂은 미소를 보면 한순간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나의 일생을 함께한 여자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등신은 아니다.
이상하다 했지.
준범이 녀석이랑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근처에 앉았던 기억이 없다.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어색하게 느껴지던 건 학창시절의 기억과 최근의 기억이 어딘가 안 맞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널 사랑하니까 알지."
내가 그리말하자 수진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안경을 벗었다.
그러자 갈색으로 염색됐던 머리가 원래의 검고 윤기 나는 머리로 변했다.
"이게 그... VR인가 하는 그건가?"
내가 멍하니 현상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내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느새 휴대폰이 생겨나 있었다.
`아버지...`
영상통화가 이어지고 얼굴이 팅팅 부은 진수가 나타났다.
"진수냐? 이게 뭐 어떻게 된 거야?"
`그게요...`
`아씨! 답답하게 저리 비켜봐! 아빠! 진짜로 아빠랑 엄마 맞아?`
"무슨 소리야, 또."
`오빠 중학교 때 사고 쳤던 거 기억나?`
"니 오빠가 사고를 치긴 무슨 사고를 쳐? 우리 집안에 사고는 너 밖에 친 적이 없는데. 진수만큼 손 안가는 아이도 없었다."
`아이 씨! 오빠 편만 드는 거 보니까 아빠 맞네!`
"이게 그... VR이니?"
`응, 엄마!`
그로부터 한동안 희진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우리는 통속의 뇌 같은 상황인 듯하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때. 내 옆에서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장난을 쳐오는 수진이가 곁에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래서 그때 진수는 똥 씹은 표정이었고 넌 멀쩡했구만."
우리의 목에 칩을 심었을 때는 단순한 건강체크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준비해온 모양이다.
`거기 어때? 냄새도 나고 아픔도 느껴지지?`
"거기랑 똑같아."
`잘됐다. 아빠, 엄마! 우리가 갈 때까지 거기서 단둘이 데이트 좀 하고 그래~ 우리 때문에 고생 많았고!`
"그래. 너희는 최대한 늦게 와라. 나는... 엄마랑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나 해야겠다."
`아버지, 종종 연락할게요.`
"그래, 짜식아. 이제 여든 살인 녀석이 그렇게 질질 짜지 말고."
`네...`
진수와 희진이는 수술을 받았으니 150살까지는 살다가 오겠지.
그것도 건강하고 튼튼하게 즐길 건 다 즐기고 올 것이다.
진수와 희진이의 설명으론 이 세상은 일종의 납골당 같은 곳이라고 한다.
더는 묫자리를 찾거나 납골당에 안치하여 그리워할 필요 없이 이렇게 언제든지 연락을 취할 수 있다나 뭐라나.
풀다이브 형 VR기기를 갖추면 이 세상에 진수와 희진이도 놀러 올 수 있다고 한다.
"진짜... 많이 변했어, 세상."
나는 헛웃음이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 떠 있는 태양과 구름이 전부 가짜란 말이지.
이렇게 눈부시고 따뜻하게 느껴지는데.
"김준수 학생."
"엉?"
나는 내 볼을 꼬집어오는 수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햐?"
"뭐해? 이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반대손으로도 나의 볼을 꼬집어왔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찰흙처럼 만지고 놀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리 엄마한테 내가 몇 살이든 반했을 거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젠 내가 연상이고 선생님이 연하 하세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윙크를 해왔다.
"이 100살 먹은 할망구가 뭐라는 거야?"
"난 22살이야, 준수야!"
어이가 없네.
그래도 뭐... 좋다.
난 18살이고 너는 22살. 그렇게 생각하자.
"수진이 눈나... 나 쥬지가 아파..."
"푸풉! 아하하!"
우리가 그리 노닥거리고 있으려니 우리를 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저놈들은?"
팔짱을 낀 채 혀를 끌끌 차는 준범이와 준호가 보였다.
"뭔 씨발 뒤졌다고 해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러왔는데 잘 사네. 더러워서 못 살겠다 새끼야. 간다!"
그리 말하곤 사라져버리는 준범이.
"개새끼, 잘 먹고 잘살아라."
준호도 그렇게 말하며 사라져 버렸다.
"뭐야. 저 자식들 NPC 아니었어?"
"그런가 보네요."
"뭐야, 너도 몰랐어?"
"저도 방금 왔거든요?"
어쩐지 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했더니 새끼들... 반갑네.
"그래서 준수야. 자꾸 반말할래?"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옆구리를 꼬집어왔다.
아, 이 절묘한 아픔. 정말로 수진이로구나.
"선생님... 나 쥬지가 아프다니까요?"
"못된 학생이네? 후훗."
그리 말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진이.
수진이는 내 뺨을 쓰다듬더니 입술에 살그머니 입을 맞췄다.
"그래서 사랑이 뭘까 준수야? 다시 알려주겠니? 내가 졸려서 듣다가 졸았는데."
수진이는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입을 맞춰오며 내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수진이에게 들려줬던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다가 뭔가 멋쩍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말해줘야지.
사랑은 담아두기만 해선 전해지지 않으니까.
나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의 대답을 재촉하는 수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랑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