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7)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진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는 짐을 하나 덜어낸 기분으로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생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런 우리 앞에 날아온 청천벽력같은 이야기.
진수 녀석은 날 닮아서 고등학생을 임신시켜버리고 말았다.
나와 수진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고 있는 진수와 그 옆에서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성.
...인한이의 딸이다.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새끼가!"
나는 버럭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찔 몸을 떠는 진수와 인한이의 딸 윤서.
그래. 어쩌면 내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랑 인한이가 친하다 보니 자주 어울렸고 그 덕에 서로 자주 놀다 보니 친해지고 그렇게 눈이 맞아버렸겠지.
하지만... 하.
처음엔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임신을 했다고 하는데 화를 내서 뭐하나.
그렇다고 애를 지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결혼하고 책임지면 끝나는 문젠데.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역시 고등학생을 꼬신 사람답게 화는 못 내겠어요?"
"시끄러워, 인마."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수진이가 내 옆에서 히죽 이며 장난을 쳐왔다.
그래. 나도 여고생을 꾀어서 결혼한 입장인데 여기서 진수에게 화를 내는 건 좀 그렇지.
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분위기가 좀 나아졌다고 판단한 진수와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책임지고 잘 키워. 윤서는 그, 몇 주차야?"
"그... 3주차래요, 아버님."
"어찌어찌 수능은 보겠네."
지금이 9월이니 수능까진 어떻게 보겠지.
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게 이런 건가.
머리가 딱딱 아프다.
"인한이는 알고 있고?"
"아, 아버지는 아직 모르세요."
"야, 김진수."
"네..."
"넌 이 자식아. 아휴."
나는 한숨을 팍팍 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설마 인한이 녀석이랑 사돈이 될 줄은 몰랐는데.
"와! 윤서 언니가 새언니야? 개꿀이네~"
잠자코 우리의 곁에 앉아있던 희진이는 내가 화를 내지 않을 거란 걸 눈치챈 순간부터 윤서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제야 몸에 긴장을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윤서.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인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인한이냐. 잠깐 우리 집에 좀 와볼래?"
`무슨 일인데?`
"아니다. 내가 너희 집으로 가야겠다. 집에 제수씨도 계시고?"
`어. 근데 진짜 뭔데?`
"나중에 말해줄게. 금방 갈 테니 기다려."
전화를 끊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인한이의 집은 이곳에서 가까우니 금방이지.
희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너도 따라올 생각이냐?
그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은 나에게 장난을 치던 수진이와 매우 닮았다.
이 녀석도 수진이 닮아서 아저씨 하나 물어오는 건 아니겠지.
심히 걱정된다.
***
"오랜만이네."
"그러게."
인한이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3개월 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찾아온 이래다.
장례식을 치르고 마음을 추스르고 하다 보니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장례식에 찾아와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는데 이런 이야기로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야, 인한아."
"왜? 아니, 근데 윤서는 왜 같이 온 거야? 진수랑 희진이랑 형수님까지 뭐야?"
"그, 뭐냐..."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고 있으려니 인한이가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무시무시한 눈이 되어 진수와 윤서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니들... 했냐?"
"..."
"하...하하... 윤서 엄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인한이.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던 인한이의 아내가 걸어 나왔다.
"왜?"
"윤서, 임신!"
"뭐?!"
그다음엔 뭐... 딱 속도위반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나와 수진이 그리고 희진이가 있어서 너무 과격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는 거겠지.
윤서가 등에 여래신장을 두어 발 정도 맞은 것으로 끝이 났다.
찬물을 마시고 진정한 인한이와 제수씨의 말을 들어보니 윤서가 제법 오래전부터 진수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고 한다.
사귄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속도위반까지 할 줄 몰랐겠지.
그나저나 윤서는 정말로 진수를 짝사랑하고 있었구나.
죄도 많은 녀석이네. 이 자식은 중학교 때부터 여친이 없던 기간이 3개월을 안 넘는 녀석인데.
어쩌면 코가 꿰인 것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진수와 윤서는... 결혼하게 되었다.
***
"수진아."
"왜요."
"소원 하나 이뤘네."
"아, 그러네요."
수진이가 빌었던 소원.
진수의 결혼, 희진이의 결혼, 장모님보다 오래 살기, 수진이의 곁에 평생 같이하기.
그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졌다.
사회를 맡은 친구 덕에 신부를 등에 태우고 푸쉬업을 하는 진수를 힐끗 바라봤다.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데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그래. 행복하면 됐다. 행복하면 됐지.
"장모님이 많이 당황하셨지. 아들이 아빠 닮아서 또 사고 쳤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땐 참..."
"아하하."
틀린 말은 아니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지.
나는 인한이가 앉아있는 곳을 힐끔 바라봤다.
인한이와 제수씨 그리고 인한이의 장녀 예은이가 앉아 있었다.
복잡한 심경이겠지.
장녀보다 차녀가 먼저 시집을 가고 그것도 고등학생인 상태로 속도위반이니까.
"아빠."
"왜?"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나도 오빠처럼 고딩 때 사고 치면 어떻게 할 거야?"
희진이는 히죽 이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짓궂은 미소가 수진이와 많이 닮았다.
희진이가 결혼이라고...?
"아빠, 운다."
"아하하!"
"얘는 왜 자꾸 아빠를 놀리고 그래?"
"엄마 닮아서 그렇거든?"
커서 아빠랑 결혼하겠다던 딸내미는 이제 없나 보다.
하긴 5살 때 오빠랑도 결혼하겠다며 당당하게 중혼 선언을 한 녀석이니 별로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되도록 희진이는 정상적인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많이도 바라지 않는다.
제발 대학교는 졸업하고 플러스 마이너스 3살 정도의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
"김 서방."
"네."
"이제 내 마음을 알겠어?"
"...네."
"후우,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다행이야."
희진이는 장모님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할머니는 잘도 우리 아빠를 용서해줬단 말이야. 정말 신기해."
그땐 고생 좀 했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어느새 사회자의 시련을 끝낸 진수가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수를 바라보는 모습이 수진이와 결혼식을 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 서방님도 저거 했는데."
"그러게."
"아! 그건 말해준 적이 없는데, 알려줘!"
"장모님이 잘 아셔."
희진이는 장모님에게 우리의 결혼식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다음 수진이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수진이도 나이를 먹었는지 그 손은 예전만큼 부드럽진 않았다.
그래. 어느새 이리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도 수진이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여보."
"응."
"나 이제 40살이야."
"난 59살이네."
"내년이면 60살이네."
"그래. 나 이제 할아버지다 이 녀석아."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리 말하자 수진이가 내 볼을 손으로 쿡쿡 찔러왔다.
"예전에 당신이 썼던 소설 기억나? 거기에 이렇게 썼잖아. 지금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1년 또 1년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 질거라고."
"그랬었지."
"내년이면 이제 2/3네."
나는 수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앞으로 60년만 더 살면 5/6가 되고."
"후훗, 그래요. 약속 꼭 지켜야 해."
"그래."
수진이는 내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얹었다.
나와 수진이가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뒤에서 아직도 신혼이라며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엄마랑 아빠가 싸웠으면 좋겠어?"
"아니. 근데 시도 때도 없이 뽀뽀하는 건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잘생겼는데 어떻게 참니?"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볼에 뽀뽀를 해왔다.
"으엑!"
"자, 여보도 해주세요."
"그래요."
"아, 할머니! 진짜 아직도 집에서 저런다니까요? 진짜 이러다가 동생 한명 더 생기겠어!"
***
"당신도 아버님이랑 똑같네."
"내가 뭘."
"혜은이한테 난리 치는 게 예전에 아버님이 진수랑 희진이한테 난리 치는 모습이랑 똑같다구요."
진수의 아이가 태어났다.
진수는 아이가 있어 현역병으로 가진 않았고 상근으로 군대에 간 상태고 그 덕에 우린 진수를 대신해서 윤서와 아이를 돌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수진이 기준으론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랑 똑같아?"
"네. 아버님도 진수한테 그러셨는데."
"하하."
아, 아버지.
아버지도 진수가 태어나셨을 때 이런 기분이셨나요.
이젠 당신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