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5)
"진수야."
"어?"
"칭찬 스티커 많이 모았네. 이걸로 뭐 할 거야?"
"웅..."
진수는 수진이가 준 칭찬 스티커가 붙어있는 종이를 들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생각지도 못했지. 칭찬 스티커.
이게 상당히 효과가 좋았다.
이 나잇대의 남자애들이 어떤가?
쿵쾅거리며 뛰어다녀서 아랫집에서 층간 소음 좀 신경 쓰라고 화를 내게 하고 마트에 가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고 주말만 되면 나가서 놀자고 떼를 쓰는 것.
그게 이 나잇대의 꼬맹이들이다.
하지만 수진이는 칭찬 스티커라는 굉장히 단순한 방법으로 진수를 완벽히 길들여버렸다.
가령 칭찬 스티커 몇 장은 진수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더 모으면 놀러 가고 싶은데 같이 놀러 가주고 또 더 모으면 진수가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는 식이다.
칭찬 스티커를 모으는 방법은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정리하거나 희진이와 놀아주거나 수진이가 공부하라고 했던 분량을 공부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이게 정말 상상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다.
진수가 마트에서 뭘 사고 싶다고 떼를 쓰려 해도 수진이가 `우리 진수 스티커 몇 장 모았어?` 이렇게 한마디를 하면 미련이 가득 남은 눈빛으로 장난감을 쳐다보다가도 결국 포기한다.
수진이는 그런 쪽으로는 가차 없는 엄마였다.
마트에서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니 그냥 버리고 휙 가버릴 때는 정말 기가 막혔지.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는데 수진이는 버릇이 나빠지면 고생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수진이가 장난감을 사주지 말라고 못을 박아버려서 더는 장난감을 사주시지도 않는다.
진수는 수진이에게 떼를 써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했다.
결국, 착실히 칭찬 스티커를 모으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엔 몇 장을 모아서 먹고 싶은 반찬을 해달라고 조르던 진수지만 반찬은 결국 로테이션으로 돌아와서 언젠간 먹고 싶은 반찬을 해준다는 걸 학습했는지 나중엔 반찬은 패스하고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놀이공원에 놀러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 놀이공원을 다녀온 진수는 그다음부턴 놀이공원에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달에 1번 정도는 진수가 가고 싶어하는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 데려다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결국, 진수는 스티커를 계속 모으기만 했다.
그렇게 비싼 장난감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스티커를 모았으나 진수는 끝내 스티커를 쓰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도 한참을 고민할 뿐이다.
내가 진수가 아니라서 확신을 하진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스티커를 모으다 보니 쓰는 게 아까워진 게 아닐까 싶다.
장난감도 결국엔 생일이나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받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나잇대의 남자애에게 절제나 자제를 학습시키다니 수진이는 유치원 선생님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
진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저 분량이면 1주일 내내 먹고 싶은 반찬만을 해달라고 조를 수 있고 놀이공원에 2번 연속으로 다녀올 수 있으며 20만원이 넘어가는 장난감을 조를 수 있는 데도 진수는 끝내 스티커를 아낀다는 선택을 해버렸다.
취지는 좋았는데 나중에 선택장애로 번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진수야, 엄마 좀 도와줄래?"
"응!"
진수는 수진이의 옆에 앉아서 빨래를 같이 개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집안일을 돕는 남자애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내가 어렸을 땐 어땠더라.
집안일은 전부 어머니가 하셨었지. 난 그동안 방안에서 책이나 읽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걱정이야."
"뭐가요?"
"우리 부인처럼 선택 장애가 올까 봐."
"선택장애요?"
"내가 뭐 먹자고 할 때마다 아무거나 찾잖아."
"그건 선택장애가 아닌데."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접은 빨래를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서방님 고른 것도 선택 장앤가?"
수진이는 히죽 이며 빨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저 눈만 끔뻑이며 수진이가 떠나간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말로는 못 이기겠다.
***
진수가 7살이 되었다.
이제 1년만 지나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는 진수.
요즘 진수는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다.
처음엔 어렸을 때부터 학원을 보내는 가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요즘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고 있다.
진수가 알아서 가고 싶다고 하더라.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학원에 가니 본인도 따라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진수가 하고 싶다면 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다니게 했다.
요즘 진수가 다니는 학원은 태권도 학원과 영어 학원, 그리고 축구 교실이다.
영어 학원은 주 중에 다니고 축구 교실은 주말만 다니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유치원생치고는 너무 많이 다니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진수가 즐겁다고 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진수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니 수진이와 알콩달콩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서 좋다는 건 아니고...
"후우. 희진이도 이제 떼를 안 쓰니 좀 살겠어요."
수진이는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는 희진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수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다.
희진이도 나이를 먹으며 이제 두 돌이 지났다.
예민해서 밤에 잠도 잘 깨고 음식도 가려먹고 졸린 데 잠이 안 오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방에 창문이 깨져나갈 듯이 울었었는데 이젠 좀 얌전해졌다.
"진수가 정말 장군감이긴 했어."
"그러게요."
수진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수진이는 진수의 육아 일기를 다 쓴 다음엔 희진이의 육아 일기도 썼다.
진수와 희진이가 얼마나 다른 아이였는가는 그 육아 일기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희진이의 육아 일기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초조함과 괴로움, 짜증이 묻어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깨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아무리 수진이라도 짜증을 다 숨길 수는 없었겠지.
지금은 희진이가 얌전해져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 희진이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까다로운지 모르겠다니까요."
신기하긴 하다.
수진이도 나도 그렇게 깐깐한 성격이 아니니까.
"원래 아기는 다 이런 거고 크면서는 바뀌겠지."
"그럴까요?"
"진수는... 아니. 진수는 원래 저랬나."
"진수는 원래 손이 안 가는 아이였구요."
"이상하긴 해. 내가 듣기로는 남자애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활동적이라 태동도 심하고 자라면서 개구쟁이가 된다는데 태동만 제외하면 진수는 정말 조용히 잘 컸는데."
내가 그리 말하자 갑자기 수진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양손을 골반에 올리고 가슴을 폈다.
"다 제가 잘 키워서 그런 거에요."
본인이 말하고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하는 수진이.
"그래. 니가 잘 키운 거야. 다른 집 애들이랑 비교하는 건 좀 실례 긴한데 솔직히 진수가 손이 안 가기는 해."
아이를 키우며 번거로웠던 점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역시 외식을 할 때를 들 수 있다.
솔직히 수진이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키즈존이라고 하면 굉장히 반가웠지.
아이들은 굉장히 시끄럽고 통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막상 내가 부모가 되고 아이를 낳고 보니까 노키즈존이 상당히 번거로웠다.
노키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하지만 수진이가 준비한 칭찬 스티커는 이럴 때도 효과를 발휘했다.
그저 떠들지 않고 조용히 밥만 먹으면 칭찬 스티커를 준다고 하니 진수는 이게 유치원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도대체 진수에게 칭찬 스티커란 무엇일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칭찬 스티커. 그거 이제 슬슬 안 통할 때도 된 거 같은데."
"그러게요. 진수도 이제 1년만 있으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슬슬 안 통하겠죠?"
"아,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니 이제 용돈도 슬슬 주고 그럴 때네."
"그러네요. 용돈이라..."
수진이와 나는 한동안 진수의 용돈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돈은 있다.
진수가 먹고 싶다는 음식도 가고 싶다는 곳도 사고 싶다는 장난감도 얼마든지 사줄 수 있지.
용돈도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교육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우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얼마 정도 생각하십니까, 부인?"
"으음... 글쎄요?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1달에 5만원?"
"애매하네."
서울의 물가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보다 비싸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한 끼 식사에 거의 1만원을 써야 하는데 1달에 용돈이 5만원이면 좀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론 내가 초등학교 때 받았던 용돈을 생각하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그냥 순수하게 용돈 5만원으로 하고 진수가 꼭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그건 우리가 추가로 돈을 더 주는 거로 할까?"
"그럼 그렇게 해요. 솔직히 초등학교 1학년이면 5만원이면 많은 거 아닌가?"
아무래도 수진이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진수의 용돈을 정한 느낌이다.
그래. 그 정도면 많지.
내가 고등학생일 땐 한 달에 용돈이 1만원이었으니까.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학교여서 차비도 없었고 그땐 휴대폰도 없어서 통신비도 없었다.
"참고로 물어보는데 너는 초등학교 때 용돈이 얼마였어?"
"만원이요."
...많이 받았네.
갑자기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느낌이다.
"당신은?"
"난 중학교 때 오천원 고등학교 때 만원."
"으~ 세대차이! 아재 냄새!"
수진이는 코를 막으며 내게서 멀어지는 동작을 취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수진이에게 덤벼들었다.
"꺄악!"
어차피 진수는 학원을 가느라 좀 늦게 돌아온다.
오늘은 오랜만에 수진이를 좀 괴롭혀줘야겠어.
이제 말빨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쪽으로는 이겨야지.
아직은... 아직은 그래도 내가 이긴다.
"아재... 서요?"
"야 이!"
"꺅!"
희진이가 우리가 내는 소음에 잠에서 깨어 큰소리로 울부짖을 때까지 나는 수진이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래. 아직은 내가 이긴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