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4)
"후훗, 내 이럴 줄 알았지. 바보래요~ 바보~"
"시끄러워 인마."
진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 완전히 실패했다.
진수는 이제 6살이 되어 어느 정도 한글을 읽을 수는 있었으나 소설을 진득이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독자의 취향만을 고려하고 독자의 연령대를 계산하지 않다니 완전히 초짜 분충의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수진이는 처음부터 내 소설이 실패할 줄 알고 있었는지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옆에서 히죽였지.
나는 바보같이 그 웃음이 내가 소설 쓰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짓는 미소인 줄 알았는데.
진수가 내 소설이 재미없다며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수진이가 배를 붙잡고 한참 동안 깔깔거리며 웃을 땐 정말 꿀밤이 마려웠다.
쥐엔장...
수진이 녀석. 알고 있었다면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수진이는 진수를 품에 안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래. 수진이 녀석은 진수를 위해 동화책을 만들었다.
어디서 그림을 배워온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동화책에 들어가는 단순한 그림은 그릴 수 있었는지 직접 동화책을 만들어 제본까지 떠서는 내 눈앞에서 보란 듯이 진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얄미웠다.
진수랑 희진이만 없었다면 1주일 밤낮으로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나도 나이를 먹어 그런 체력은 없지만, 기분이 그랬다.
수진이가 동화책을 다 읽어주자 진수는 자신의 손으로 동화책을 잡고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걸 싫어하진 않는 모양인데... 역시 아직은 너무 일렀나 보다.
그래도 나중엔 진수도 내가 쓴 소설을 재밌다고 봐주겠지.
그러니까 그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지 마!
"우리 서방님은 참 이상하다니까? 아이가 책을 좋아하겠어요?"
"난 진수 나잇대에도 책 읽었어."
"뉘예뉘예~"
이 자식이.
나는 개고 있던 빨래는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어?"
수진이는 내가 벌떡 일어나서 본인에게 다가오니 몸을 움츠리며 도망치려고 했다.
"넌 오늘 죽었다."
"꺄! 진수야! 엄마 살려줘~"
진수는 우리를 힐끔 쳐다본 다음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이란 참 신기하지.
이렇게 작고 연약해 보이는데 가끔은 듬직해 보이기도 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 눈치도 어른 못지않다.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게 사실은 서로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는 걸 귀신같이 알아서 수진이가 살려달라니 엄마 죽는다느니 같은 말을 해도 신경도 안 쓴다.
나는 수진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침대로 향했다.
애들이 있어서 엄한 짓은 못하겠지만 다른 짓이라면 가능하지.
"오늘은 살려달라고 빌어도 용서 안 해줄 거야."
"으아아아앙!"
우리 섹시한 신부 겨드랑이나 신나게 괴롭혀줘야지.
***
"그래서 강사 그만두려고?"
"어. 솔직히 형도 전업으로 하잖아. 나도 그러려고. 글 쓰랴 학원 강의 준비하랴 강의하랴 진짜 죽겠다니까."
2월의 어느 날.
근처의 아파트에 이사를 온 인한이와 오랜만에 만났더니 대뜸 꺼낸다는 이야기가 학원 강사를 때려치운다는 이야기였다.
"너 그러다가 글 안 팔리면 어쩌려고?"
"그럼 백수 되는 거지."
태평한 새끼.
나는 인한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니가 직업이 있어서 마음에 안정이 오는 거지 직업 없으면 힘들어. 만약에 신작을 하나 쓰기 시작했는데 지표가 박살 나서 연재가 힘들다? 그럼 너 몇 달 동안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건데?"
"에휴. 이 형은 내가 꿈을 꾸게 두지를 않네."
"꿈은 지랄. 딸린 식구만 3명이니 정신 차려, 인마."
"형도 전업이잖아?"
"나야 전업이 아니라도 수입이 있으니까 그렇지."
"키아~ 전업투자자 개 멋있네. 나도 좀 알려주고 그래. 왜 혼자 먹고 그러는 거야?"
나는 제법 진지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인한이를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 준범이 녀석이 왜 주식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질색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야, 인한아."
"왜?"
"나도 산 종목이 다 가지는 않아."
"사는 족족 오르면 신이지. 누가 뭐래?"
"들어봐, 인마."
나는 인한이에게 내가 주식을 하며 겪었던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장기투자를 했다가 잘 가지 않는 종목들에 조바심도 느껴보고 참으면서 스윙투자로 넘어간 이야기.
처음에 대박을 쳐서 친구 몰래 레버리지로 몰빵을 쳤다가 순식간에 2천만을 날려버린 이야기.
욕을 바가지로 처먹고 정신을 차리고선 차분히 원칙매매를 시작했던 일.
그렇게 하는 데도 가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바닥도 모르고 꼬라박아서 물리는 경우가 생긴다는 일.
그렇게 빠지면 멘탈이 흔들려서 정신을 붙잡는데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 등등.
내가 겪었던 안 좋았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줬다.
그러자 인한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형, 솔직하게 말해보슈. 가르쳐주기 싫지?"
"들킴?"
"아, 진짜 이 사람 정이 없네, 정이."
한쯤은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반쯤은 정말로 위험해서 알려주지 않은 거지.
준범이한테 배울 때도 준범이가 이건 간다 했던 놈을 왕창 샀다가 쭈욱 미끄러졌는데 그때 나도 준범이도 서로 좀 거시기한 상황이었다.
만약 레버리지를 써서 왕창 잃어본 경험이 없었다면 준범이가 간다던 그 종목도 왕창 샀다가 쭈욱 빠질 때 돈을 왕창 잃었겠지.
하지만 정해진 금액을 분할로 사다 보니 손실도 털어낼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라 털어내고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한이는 팔짱을 끼며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형이 쓰는 소설이 그렇게 현실감이 넘치는 거네."
"그렇지. 다 겪어보고 쓰는 거니까."
"근데 이젠 평범한 주식 관련 소설만 쓸 거야?"
"팔리는 걸 써야지. 나도 가정이 있는데."
혈마 주식이 완결이 나고 그 후에도 주식에 관련된 소설을 2편 더 연재했다.
둘 다 혈마 주식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꽤 괜찮은 연독률을 유지하며 완결이 났지.
노가다나 상하차를 하며 고생한 주인공이 주식으로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갑질도 하는 그런 소설.
예전엔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게 괴로웠으나 이젠 웃으면서 쓸 수 있다.
성공한 작가가 되며 글을 쓸 때마다 돈이 복사되니 그런 소설조차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이야~ 이게 사람이 참... 간사해, 그지?"
인한이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설로 아파트 산 녀석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
"야설 무시하는 겨?"
"근데 솔직히 좀 재밌긴 했어. `정자도 생명이잖아요` 라든가 `처녀는... 돈이 된다.` 라든가."
"그지?"
인한이의 소설이 재밌기는 했지.
그 이후로도 정신이 나간 소설을 쓰긴 했는데 역시 처음에 썼던 그 소설이 가장 재밌긴 했다.
"아빠!"
"어, 그래."
나는 인한이의 딸이랑 놀던 진수가 목이 마르다며 식탁으로 다가와서 주스를 꺼내 주었다.
"많이 마시지 말고."
"네~"
진수는 인한이의 둘째 딸 윤서와 제법 취향이 비슷한지 싸우지 않고 잘 놀고 있다.
인한이는 그 모습을 보며 뭔가 아빠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
"어."
"남자애 키우면 어떤 기분이야?"
"글쎄? 일단 활발해서 이리저리 잘 뛰어다니고 유치원 쉬는 날에는 나가서 캐치볼이나 축구하면서 놀자고 보채고 그러지 뭐."
"캐치볼 좋네. 나도 내 아들이랑 해보고 싶었는데."
인한이는 그리 말하며 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 딸도 좋지만, 아들도 좋다.
아들이랑 하는 캐치볼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따뜻함이 있다.
"나, 힘써볼까?"
"이제 40대인 녀석이 무슨 헛소리야?"
"그지?"
뭐야 이 녀석은 아내랑 안 하나?
나는 40대라도 아직 수진이랑 하는데 말이지.
아니, 오히려 요즘은 수진이가 더 적극적이게 돼서 무서울 지경이다.
예전에는 뭔가 사정을 한 다음에도 조금만 지나면 바로 2차전, 3차전을 갈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힘들다.
그래서 조금 쉬려고 하는데 쉬는 동안 수진이가 내 물건을 애무하면서 얼른 힘 좀 써보라고 할 땐 정말 아찔할 정도다.
그 아무것도 모르던 수진이가 어느새 날 잡아먹을 지경이 됐으니.
내가 수진이를 떠올리며 히죽 이고 있자 인한이는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쯧. 형은 아직도 신혼인가 보네."
"눈치 좀 늘었네?"
"캬~ 역시 여고생 꼬신 정력은 어디 안 가지."
"운동해, 인마."
나와 인한이는 별것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달달한 다방 커피가 두 잔 놓여있는 식탁.
별것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광경이 학원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땐 흡연실에서 만나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고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었지.
이전의 나였다면 학원을 그만둔 순간부터 인한이와도 연락이 끊겼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같은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이렇게 같이 앉아 잡담을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관계가 됐다.
지금의 이 별것도 없는 광경이 내가 변했다는 증거겠지.
그리고 이 변화는 전부 수진이 덕에 생긴 변화고.
"왜 또 그리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개는 거야?"
"우리 와이프 생각한다."
"캬. 결혼한 지 5년도 넘은 사람이 정말 순애보구만."
5년이 넘어도 50년이 넘어도 수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변화는 없을 것 같은데.
"넌 아내분이랑 어떤데?"
"나? 나야 뭐, 대한민국 평균이지."
"의무방어전. 그만뒀냐?"
"주에 1번은 하는데?"
"평균 이상이네."
인한이는 내 말에 씨익 웃더니 남아있던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그럼 나 갈게."
"그래. 잘 가고."
"윤서야~ 집에 가자."
인한이는 거실에서 진수랑 놀고 있던 윤서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윤서를 부르는 인한이.
그러자 윤서는 진수의 옷을 꼬옥 붙잡고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
인한이는 그 광경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녹슨 기계처럼 삐걱이며 나를 쳐다봤다.
"사돈?"
아직 애들이니까 더 놀고 싶어서 그렇겠지.
인한이는 윤서에게 다가가서 다음에도 또 놀러 온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윤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수에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진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윤서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인한이가 윤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진수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벌써 여자한테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난... 30이 되도록 모쏠이었는데.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