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2)
"아빠."
"왜?"
"오늘 꼭 올 거지?"
오늘은 진수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재롱잔치가 있는 날이다.
재롱잔치가 시작하는 시간은 오전 11시.
진수가 유치원에 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시작된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이고 간다는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진수는 우리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는 눈치다.
아무래도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 중에 부모님이 바빠서 못 간다고 했던 애들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빠가 약속하고 안 해준 거 있어? 우리 캐치볼도 하고 축구도 하고 소풍도 다녀왔지?"
"응."
"그러니까 오늘도 꼭 갈게. 근데 진수야. 우리 진수 친구들의 부모님이 많이 오셔서 우리가 안 보일 수도 있거든? 그래도 우리는 진수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보고 있는 거니까 울거나 그러면 안 된다? 자, 아빠랑 약속."
"안 울어! 약속!"
진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내 손에 손가락을 걸곤 낑낑거리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이따가 보자."
"응! 다녀오겠습니다!"
진수는 배꼽 인사를 한 다음 유치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직장인이면 진수의 재롱잔치를 보러 오는 게 힘들지도 모르지.
이럴 땐 내가 직장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굉장히 다행이라 생각된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수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진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줬다.
"어서 와요."
"다녀왔어."
나는 자연스럽게 수진이를 끌어안고 그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이는 정말..."
그리 말하면서도 눈에서 사랑이 쏟아지는 기분이다.
수진이는 언제나 사랑스럽구나.
나는 수진이를 품에 꼬옥 끌어안은 상태로 머리에 코를 묻었다.
같은 샴푸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수진이의 머리에서 맡아지는 향기는 더 향기롭고 달콤하게 느껴진다.
진수를 낳기 전에 자르고 또 한동안 길러서 허리까지 길렀다가 희진이를 낳는다고 자른 머리.
이젠 제법 자라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머리 길이가 되어있다.
그립다. 수진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 기분이다.
"희진이는?"
"분유 먹고는 자고 있어요. 진수는요?"
"진수는 씩씩하게 등원했어."
"그럼 얼른 준비해야겠네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나에게서 살짝 떨어지려고 하다가 싱긋 웃으면서 내 입술에 짧게 뽀뽀를 한 다음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도 넌 매력적인 여자야.
"천천히 준비해. 아직 여유 있으니까."
"네~"
진수의 재롱잔치가 있다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 수진이는 정말 빡세게 준비를 시작했다.
운동이나 피부관리를 하는 걸 보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한편 네일샵에 가서 손톱과 발톱까지 관리는 받는 걸 봤을 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동에는 확실히 젊은 아내분들이 좀 있긴 하다.
나이 차가 8~9살 정도 나는 부부가 꽤 있으니 유치원에 재롱잔치를 보러 가는 학부모 중에도 젊은 아내분이 어느 정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30대 초반 정도다.
수진이처럼 20대 중반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꾸밀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지.
그랬더니 수진이는 나를 보며 늙다리라서 아무것도 모른다며 쯧쯧 혀를 차며 검지를 흔들었다.
뭐라더라. 엄마가 못생기거나 늙었으면 그것만으로 유치원에서 왕따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나.
라떼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런 일로 왕따를 다 한단 말인가.
부모 직업이나 사는 아파트가 어딘가의 문제로도 급을 나누고 친구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벙쪘었지.
시대가 정말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들은 그냥 알아서 놀다가 친해지고 싸우면서 크는 게 아니었나.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요즘 애들에겐 체벌이 금지라거나 체육도 잘 시키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었는데 유치원에서 이런 꼬락서니일 줄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이게 시대의 흐름인지도 모르지.
아이를 낳고 키우기엔 너무 힘든 시대가 와 버렸고 1명만 낳아서 최대한 잘 해주자고 하다 보니 이렇게 기형적인 문화가 형성된 지도 모른다.
진수가 양아치 녀석들과 어울려서 껄렁한 아이로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친구를 가려서 사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에서부터 한다고 하니 이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옷을 갈아입은 수진이가 품에 희진이를 안은 상태로 거실로 나왔다.
아무래도 희진이가 잠에서 깬 모양이다.
나는 희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응애!!!"
"우르르르 까꿍! 아빠에요~ 희진아~ 아빠야."
"응애!!!"
후우~. 진수가 정말... 대견한 아이였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찝찝하면 울던 아이였는데.
희진이는 뭔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우는 울보였다.
"좀 부탁할게요. 서방님~"
"예~ 부인."
수진이는 내 볼에 뽀뽀를 해주곤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렇게 화장에 공을 들이면 희진이가 화장품 냄새나 향수 냄새가 싫다고 빼애액 하고 울 것 같은 느낌인데.
진수가 화장품 냄새를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아이라서 깜빡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동안 희진이는 내가 돌봐야겠다.
***
"그럼 갈게요."
"그래."
내 예상대로 희진이는 수진이의 몸에서 나는 낯선 향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기에 내가 돌보기로 했다.
수진이가 운전을 할 줄 아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피곤할 뻔했다.
"아버님이랑 어머님은 언제 오신대요?"
"벌써 도착하셨데."
"벌써요? 와..."
"장모님은?"
"엄마도 시간 맞춰서 도착하신대요."
"진수는 좋겠네. 이렇게 축하해주는 사람도 많고."
내가 그리 말하자 수진이는 백미러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선, 아니, 여보는 어렸을 때 축하 못 받았어요?"
"진수가 옆에 없으면 그냥 편하게 불러."
"아뇨. 이것도 습관이 들어야죠. 그래서 어땠어요?"
"바빠서 못 오셨지."
그때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공장이 밤낮없이 쌩쌩 돌아가던 시기라서 어머니도 좀 바쁜 시기셨다.
막 공장을 차려서 거래처도 만들고 여러 가지 할 게 많았겠지.
하지만 7살짜리 김준수한테는 좀, 아니. 많이 외로운 추억이긴 하다.
어머니가 보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바빠서 오시지 못 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부모님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었지.
씁쓸한 추억이다.
진수는 그런 외로움은 모르고 자랐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재롱잔치가 될지도 모른다던데. 아쉽기도 하고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버님은 엄청 아쉬워하시던데요? 희진이 재롱잔치를 못 본다고."
"참나."
그렇게 재롱잔치가 좋으셨으면 내가 어렸을 때나 좀 챙겨주시지... 약간 서운하려고 하네.
지금이야 바쁘셔서 그랬겠지 싶지만, 그땐 정말 슬펐는데.
진수가 다니는 유치원은 집에서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위치에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유치원.
나는 희진이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
수진이는 트렁크에서 희진이가 탈 유모차를 꺼냈다.
나는 희진이를 유모차에 태워주려고 했으나 희진이가 타기 싫은지 몸부림을 시작해서 그냥 품에 안고 가기로 했다.
"으이구. 우리 공주님. 완전 깍쟁이야."
"으으, 우으."
"미안해! 울지마!!!"
수진이는 희진이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자 내 곁에서 얼른 떨어졌다.
그렇게까지 냄새가 세진 않은데... 이거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우리만 참석하는 행사도 아니고 다른 학부모들도 올 텐데.
희진이가 지독하다고 빼애액 하며 울 미래가 눈에 선하다.
"아! 아버님~"
수진이는 우리 부모님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렸다.
아버지는 걷지도 그렇다고 뛰지도 않는 속도로 성큼성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셨다.
"그래, 건강했고?"
"네~"
"크흠. 오늘도 우리 공주님은 예쁘네요~"
"우으."
"..."
희진이는 낯도 참 많이 가려서 아버지도 어려워했다.
지금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서둘러 희진이를 어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희진이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라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을 살짝 때리시며 인상을 찌푸리셨다.
아버지는 한층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아, 다들 여기 계셨네요."
희진이를 달래고 유치원으로 들어가려 하니 장모님이 오셨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다음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유치원 선생님은 나랑 수진이를 알아보곤 우릴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진수가 좋아하겠어요. 이렇게 다들 찾아와주셔서."
"역시 못 오시는 분들도 많은가 보죠?"
유치원 선생님은 내가 한 말에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은 맞벌이가 많은 시대니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지.
소심한 아이도 있고 활발한 아이도 있다.
활발한 아이야 재롱잔치를 좋아하겠지만 소심한 아이에겐 지옥이겠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부모가 찾아오지 않는데 재롱잔치라니... 비참한 기분만 만드는 행사다.
이젠 사라져야 하는 행사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앉아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곤 자리에 앉았다.
재롱잔치를 보는 도중에 희진이가 울기 시작할지도 모르니 바깥쪽으로 앉고 내 바로 옆에 수진이 그리고 장모님과 부모님이 순서대로 앉았다.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 중에 평소 인사를 나누던 이웃도 있었기에 아는 체를 하고 약 5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진수의 재롱잔치가 시작됐다.
수진이는 휴대폰을 꺼내 진수의 재롱잔치를 찍기 시작했다.
나는 소음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희진이를 달래기 위해 용을 썼고 장모님과 아버지는 진수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나와 희진이를 보고 계시네.
내가 희진이를 달랜다고 정신이 없는 걸 보고 안타까우신 걸까.
괜찮습니다. 얼른 진수나 보세요.
나는 희진이를 달래면서 무대를 보았다.
딱 그 순간 진수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진수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절도있는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한편으론 듬직해 보여서 내가 잘 보고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진수는 더욱 힘차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진수야.
매번 아빠가 기저귀를 갈아줬다 하면 또 실례를 저질러서 인상을 쓰게 만들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순간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진수의 모습과 어렸을 때의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날. 유치원에서 부모님이 오시기로 한 약속을 믿고 보이지 않는 부모님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어른들은 키가 커서 안 보이는 거라고 믿으며 춤을 췄었지.
재롱잔치가 끝나고 부모님들이 다가오며 우리 똥강아지 정말 잘했어요~ 라며 친구들을 칭찬해줄 때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부모님은 언제 오시나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결국, 부모님이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엉엉 울었었지.
그때 유치원 선생님이 나를 품에 안고 달래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진수가 해맑게 웃으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그날의 아픔이 조금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그렇구나.
쉬운 해답이었네.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되는가? 어렵지 않았다.
남자는 아이를 키우며 이렇게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