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나와 수진이의 육아일기(29)
5월 29일.
오늘은 수진이와 나의 결혼기념일이다.
월요일이라 수진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금 특별한 시간을 보냈겠지.
수진이도 오늘 하루만큼은 학교를 빼먹고 나와 함께 있으려고 했을 정도다.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강의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결혼기념일이면 그거지.
나는 수진이와 결혼기념일에 쓰기 위해 사놨던 미니스커트 타입의 웨딩드레스를 떠올렸다.
저걸 입고 섹스를 했던 신혼 첫날밤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자지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우리가 결혼한 날이 21년 5월이고 지금이 23년 5월이니 벌써 3년 차임에도 나는 수진이와 냥냥거리는 생각만 하면 이상하게 자지가 빳빳해진단 말이지.
친구놈들은 이미 발기도 잘 되지 않아서 와이프가 의무방어전을 요구하면 식은땀이 난다는데 나는 아직도 쌩쌩하다.
그러고 보니 인한 강사도 의무방어전으로 고생 좀 했다고 했는데 이젠 좀 편해졌으려나.
아내분이 둘째를 낳길 원해서 의무방어전으로 고생 좀 한다고 했는데 인한 강사의 아내분이 올해 2월에 애를 낳는 바람에 좀 편해졌을 것 같다.
학원에 다니면서 강의도 하고 집에서는 글도 쓰고 임신한 아내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야 하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데 한동안 의무방어전은 안 해서 조금은 낫다고 했던가.
인한 강사는 학원에서 버는 수입 외에도 소설을 따로 써서 버는 수익만 최소 월 400은 되는 듯해서 생활에 제법 여유가 생겼다.
대출을 끼고 이사가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인한 강사와 아내분은 아이들의 교육을 생각하는 평범한 부모처럼 고민에 고민을 한 다음 우리가 사는 이쪽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 같다.
10년 사이에 세상이 휙휙 바뀌고 있긴 해도 아이에 대한 교육문제는 그리 달라지지 않을 테고 집값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을 테니 어떻게든 되겠지.
인한 강사는 돈을 모아서 차도 샀으니 출퇴근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학생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 동안 학원이 휴가를 하면 그 날짜에 이사한다고 했는데 이 근처에 살면 조금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우! 아바바!"
"그래그래. 아빠 친구가 여기 근처에서 살거래."
"아우?"
진수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손에 닿는 물건을 입으로 집어넣고 있을 뿐이다.
진수는 9월생이고 이제 4개월만 지나면 돌이 된다.
그 순간부턴 순식간에 자란다고 하던가.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도 하고 엄마와 아빠가 아닌 다른 사물이나 사람에게도 이름을 붙이고 부를 수 있게 되는 시기라고 한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커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겠지.
그 순간이 너무나 기대된다.
***
"그래서 지금 그렇게 공부 중인 거에요?"
"그래."
"선생님도 참..."
"왜?"
수진이는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축구와 야구, 농구에 관해서 책을 읽으며 배우고 있으니 좀 이상하게 느껴지나 보다.
난 가끔 축구를 볼 때마다 오프사이드가 나오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경우에 반칙이 되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다고?
야구도 농구도 책을 읽다 보니 왜 이런 룰인지도 알 것 같고.
"어차피 패스랑 슛이랑 캐치볼 정도밖에 안 할 거면서 책까지 빌려와서 이렇게 읽고 있으니까 그렇죠."
수진이는 아무래도 내가 하는 행동이 너무 요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혹시를 대비하는 거지."
"혹시요?"
"진수가 이건 뭐고 저건 뭐고 하고 물어보면 대답해줘야지."
나는 그리 말하며 진수를 품에 안고 들어 올렸다.
진수는 내가 들어 올려주자 기분이 좋은지 양손을 흔들면서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돈 드는 취미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이유가 뭡니까, 부인?"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취미를 즐겨보기도 전에 값비싼 장비부터 충동구매했다가 나중에 당근마켓에 올려둔다니까요."
그것참 편견이 가득하네.
"크흠. 아무튼 부인."
"왜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지는 않았지?"
"당연하죠."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작게 웃었다.
"그럼 일단 진수부터 재워야지?"
"선생님한테 결혼기념일은 그런 날이구나?"
"평소보다 정성 들인 식사를 하고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술을 분위기를 위해 마시고... 그럼 그런 것도 해야지."
"우리 서방님은 40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은근히 괜찮은 분위기를 내는 수진이.
평소에는 마시지 않는 와인을 마셨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요염해 보였다.
"요즘 내 친구들이 잘 안 선다고 그러더라고. 난 정말 다행이지."
"..."
수진이는 내 말을 듣고는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본인은 아직도 20대인데 내 성기능에 장애가 오면 어찌 되나 걱정하는 걸까.
"아직 10년은 더 힘내볼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진이.
나는 내 품에 안긴 채 어느새 하품을 시작한 진수를 바라봤다.
앞으로 10분 안에 잠이 들것 같다.
진수가 새근거리며 잠이 들자 나는 진수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아기용 침대에 눕혀주었다.
진수가 정말 빨리 크긴 빨리 크는구나.
이 아기용 침대를 처음 사고 진수를 눕혔을 땐 공간이 많이 남았었는데 이젠 진수로 꽉 찬 느낌이다.
언제 이리 컸는지... 나는 진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다음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거실로 나왔다.
"진수는 잘 자요?"
"어."
수진이는 내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자 웃으면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역시 결혼기념일엔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는 섹스가 최고지.
***
"후우, 후우... 우리 서방님은 10년이 아니라 20년도 멀쩡하겠네."
"좋지?"
"묻지 마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몸을 끌어 안아왔다.
땀에 젖은 그 머리가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수진이는 기분이 좋은지 이마를 내 가슴에 문질러왔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선생님."
"응?"
"선생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그냥요."
그냥이라고는 하는데 맥락 없이 이런 화제가 툭 튀어나오지는 않겠지.
아마 최근에 했던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한 PPT때문에 튀어나온 소재가 아닐까 싶다.
사랑,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니... 사랑이 뭘까.
제법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생각한다.
그 책들에서 항상 공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이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이야기가 공통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똑같지는 않았다.
재벌과 평범한 일반인의 만남을 그린 이야기에서는 물질적인 사랑이 나오고 바람둥이인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사랑을 유희처럼 여긴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야기는 많지만,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단정 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단어로 나타내면 단순하지만 풀어서 쓰면 가장 난해한 단어겠지.
수진이가 바라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도 굳이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맞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되겠지.
"어렵네."
"어려워요?"
"어렵지. 너무 어려워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뭔가 이거다. 하는 건 없어요?"
사랑에 형태가 있다면 사랑은 뭐다 뭐다 라고 수식어라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가능했으면 이리 어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뭐라고 딱 잘라서 정의를 하진 못하겠다.
그러니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든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네가 옆에서 잠자고 있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널 보면 편안함과 설렘을 느껴."
"그게 선생님이 생각하는 사랑이에요?"
"좀만 더 들어봐. 네가 학교에 가면 진수를 돌보면서도 지금 네가 뭘 할까를 떠올려. 공부하고 있을까, 밥을 먹고 있을까, 친구랑 놀고 있을까, 어디서 양아치가 나타나서 시비는 걸지 않을까."
"후훗. 요즘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 피곤한 일은 없었는지 즐거운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져."
"응응."
"너와 잠자리에 들면 네가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모습을 눈에 담고서 잠이 들지."
"...가끔 밤새도록 잠도 안 재워주고 괴롭히면서?"
오늘따라 초치는 발언을 많이 하는구나.
나는 수진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준 다음 그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별일이 없어도 매일 붙어있지. 드라마를 볼 때도 게임을 할 때도 항상 붙어서 같이 해."
"그렇죠?"
"네가 등교만 하지 않으면 거의 온종일 붙어있어. 친구놈들은 가끔 와이프가 친정에 가야 숨을 쉬고 살겠다고 하는 데도 나는 네가 옆에 없으면 오히려 네 생각 밖에 안나.
그런데도 매일같이 네 생각이 나. 네가 옆에 있으면 즐겁고 네가 없으면 허전해. 네가 기침이라도 하면 걱정되고 네가 웃기라도 하면 나도 행복해. 그냥...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매일같이 네 생각이 나는 거. 이게 사랑이 아닐까?"
"그건 집착 아니에요?"
"그래서 싫어?"
"아뇨."
"그래서 너는 어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저요? 흐음... 히힛."
"왜?"
"아뇨. 제 생각에 사랑은요... 서로 닮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고는 나의 뺨을 쓰다듬어 온다.
"아침에 일어나도 밤에 잠이 들어도 옆에 항상 있고 매일같이 붙어있는데도 정신을 차리면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거 완전 날먹이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그리 말하곤 수진이의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지럽혔다.
그래. 사랑은 어쩌면 서로 닮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너무 어렵잖아요. 그냥 좋은데 사랑은 뭐니 뭐니 하는 거."
"어렵긴 하지."
"그러니까 선생님은 평생 내 곁에서 사랑이 뭔지 알려줘야 하는 거에요. 그게 내 소원권이에요."
"응?"
"첫 번째 소원은 우리 진수가 결혼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주기. 두 번째 소원은 우리 둘째가 결혼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주기. 세 번째 소원은 우리 엄마보다 오래 살기. 그리고 네 번째 소원은... 내가 눈을 감을 때 옆에 있어 주기."
수진이는 소원권을 쓰지 않고 모으고 또 모으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래. 그 정도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의사가 나 엄청 건강하다더라. 근력도 체력도 30대들보다 좋다고."
"네."
"이렇게 계속 운동을 하면 70살이 되고 80살이 되도 40살, 50살 같은 체력일 거야."
"네."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도 사랑이 뭔지 시원하게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네."
"그러니까 너도 100살이 될 때까지 치매 걸리지 말고 귀머거리가 되지도 말고 내 옆에 딱 붙어있어."
"네. 후훗."
제법 지쳤는지 천천히 잠이 든 수진이를 품에 안았다.
내 친구놈들이 발기가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데 내 나이와 수명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미안했다.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수진아, 복잡하게 생각하진 말자.
내가 학생일 때는 스마트폰 같은 게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이를 먹을 때쯤이면 수명을 늘릴 방법은 충분히 있지 않을까.
네가 갑자기 물어본 사랑의 의미.
오늘은 당황해서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해주진 못했다.
하지만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80년. 이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 네가 물어본 사랑에 대한 나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