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계곡에서 생긴 일(2)
백화점의 수영복 코너에는 마네킹에 여러 수영복이 입혀져 있고 모델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원래 다 이런가?"
남자가 혼자서 가기 민망한 곳 중 원탑은 당연히 속옷 매장이다.
점심에 빠르게 혼자 밥을 먹고 오는 사람은 있어도 혼자 속옷 매장에 들러서 여성 선물용 속옷을 사라고 하면 굉장히 어려워한다.
물론 처남같이 여친한테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속옷을 선물하는 상급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지.
아무튼, 그런 곳은 연인과 같이 가게 되는데 그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 남사스러우면서도 또 미묘하게 어색한 미소를 짓게 해서 풋풋한 느낌이 든다.
수진이가 야한 속옷을 입은 상태에서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본인의 외모에 자신이 있는 여성만 가능한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포즈를 취해주던 모습이 정말 멋졌지.
나는 백화점에 찾아오면 속옷 매장 같은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맞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흠."
비키니가 전혀 없지는 않다.
아주 가끔 마네킹이 비키니를 입고 있긴 한데 절대다수가 래시가드라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모델들도 원피스와 래시가드를 입고 찍은 사진이 전체에서 9할 정도 되는 것 같다.
"..."
대협. 세상이 어지럽다 하여 어찌 민생의 뜻을 대변하는 이곳의 도리가 어찌 땅에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이오.
10년 전까진 비키니와 원피스가 반반 정도 섞인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어쩜 이 나라는 갈수록 이슬람교를 닮아가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자위 금지법이 나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수진이는 수영복을 몇 벌 골라서 손에 들고 있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3벌의 수영복.
래시가드, 원피스, 비키니.
수진이는 3종류의 수영복을 들고왔다.
눈이 래시가드와 원피스를 향했다가 비키니로 향했다.
"하하, 역시..."
수진이는 내 시선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느낀 것인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머지 비키니만 다시 원래 있던 위치로 돌려놓았다.
"아니, 왜?"
"이건 선생님용."
그렇게 말하면서 비키니 타입의 수영복이 걸린 옷걸이를 살짝 흔드는 수진이.
"그리고 이건 남들이 있을 때 입는 용."
래시가드는 남이 있을 경우를 위해서 산다는 걸까.
아무래도 남들에게 피부를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모양이다.
"선생님은 독점욕이 강하니까 남들에게 피부 보이는 것도 싫어할 거 같아서요. 아니에요?"
"그렇지."
절반은 그렇기도 하고 절반은 또 아니기도 하다.
남들에게 내 아내가 이리 예쁘고 섹시하다고 자랑하고 싶은 아저씨의 음습한 한남자아가 있기도 하니까.
어쨌든 날 위해서 비키니를 입어준다니까 좋다고 생각해야지.
내가 어떤 타입의 수영복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 수진이는 래시가드는 평범한 디자인의 것을 하나 고른 다음 비키니는 한참을 고민하며 고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을 빤히 볼 시간 따윈 없는 삶이었다.
그러니 수영복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비키니는 그냥 브래지어랑 팬티처럼 가리기만 하는 거고 색상만 좀 다르겠지 싶었는데 저리도 디자인이 많단 말인가.
브래지어처럼 그냥 끈으로 된 물건부터 한쪽만 끈으로 되어있는 것.
스포츠 브래지어처럼 되어있는 물건과 프릴이 잔뜩 달린 것까지 하나같이 개성적인 물건들이 많았다.
거기에 색상까지 다르니 고민은 한없이 깊어져 갔다.
"정말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한다는 게 부인의 수영복 선택이었다고 한다."
"수영복은 중대 문제니까 어쩔 수 없지."
"아하하!"
부인의 수영복을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뭔데?
수진이가 살펴보는 수영복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색상은 역시 빨간색과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은 옷으로 입으면 한없이 무난한 색이지만 수영복으로 입으면 그만큼 섹시한 디자인이 많이 나와서 마음에 든다.
빨간색은 옷도 속옷도 입는 사람을 많이 가린다.
그리고 그건 수영복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피부가 하얗다 못해 뽀얀 수진이에겐 이 강렬한 빨간색도 잘 어울린단 말이지.
검은색이냐 빨간색이냐.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무난한 검은색을 선택해버리는 것이 내가 아재라는 반증이겠지.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디자인이었다.
수진이는 본인이 마음에 들었던 디자인과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디자인을 보며 최소 3쌍씩 들고 들어가서 갈아입고 보여줬다.
"어때요?"
첫 번째로 입은 비키니는 비키니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속옷이랑 구분되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예뻐. 섹시해서 좋네."
"음..."
수진이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커튼을 치고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무난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가 수영복을 갈아입는 동안 다른 디자인의 수영복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왠지 기저귀같이 아랫배를 많이 가리는 디자인의 비키니였다.
하반신은 일반 비키니처럼 다 드러내면서 굳이 뱃살을 감추려고 이런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는 것일까.
그럴 거면 래시가드를 입으면 될 텐데.
여자들이 수영복을 고르는 기준은 남자와는 많이 다른지도 모르지.
남자들은 그냥 삼각, 사각, 5부 정도로 고르니까.
내가 여성수영복을 진지한 시선으로 보고 있으려니 몇몇 여성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치는 것이 느껴진다.
솔직히 좀 껄끄러운 기분이다.
수진이가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머지않아 수진이가 문을 열며 나타났다.
"이건 어때요?"
수진이가 이번에 보여준 수영복은 끈이 목에 거는 디자인의 수영복이었다.
수진이의 조금 큰 가슴을 꼭 물방울처럼 매달고 있는 모습이 절로 흐뭇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속옷과 조금 구분되는 디자인이 더 좋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말을 건네자 "이건 킵." 이라는 말을 하며 다시 문을 닫았다.
...첫 번째와 그리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수진이가 고민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면 이게 방금 입었던 수영복보다 더 나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지.
그게 밖으로 티가 났던 걸까?
수진이는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나의 반응을 살피곤 내가 이 디자인의 수영복을 꽤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인중이라도 늘어났던 걸까.
매장에 설치된 거울을 노려보며 인중을 만지고 있자 수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뭐해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번에 입고 있는 옷은 래시가드였다.
역시 입어는 보고 사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입어는 봤겠지.
솔직히 음, 그냥 몸에 달라붙은 조금 타이트한 옷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괜찮네."
"이건 별로구나?"
수진이가 나를 보며 싱긋 웃은 다음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진이가 수영복을 정리한 다음부턴 한동안 수영복 시착이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블랙만은 기준으로 선택했었는데 생각보다 본인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아니었는지 이것저것 바꿔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바탕은 흰색인데 꽃 같은 무늬가 프린트된 디자인의 비키니였다.
다소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컵 사이를 잇고 있는 부분이 꼭 자지를 끼워 넣으세요 하는 것처럼 끈 두 개로 연결되어 가슴을 받친다는 느낌보단 가슴을 누르는 형태로 되어있는 수영복이었다.
테두리 부분에 파란색 선으로 강조 선이 들어가 있어서 여름의 푸름과 입은 사람의 청순함을 상징하는 하양이 어울려져 건강하면서도 한편으론 여름다운 싱그러움을 자아내는 훌륭한 디자인이었다.
팬티 부분 역시 골반 부분이 두 줄의 끈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라 옷감을 걸쳤다는 느낌이 들어 건강함과 섹시함을 다 챙긴듯한 느낌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저 푸른색과 녹색의 사이에 있는 듯한 바다와 닮은 색을 한 파레오가 마음에 든다.
저렇게 입고 있다면 주위에 사람이 있더라도 래시가드를 입지 않고 이 수영복을 입어주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아빠는 끈이 목으로 가는 수영복을 좋아했단다. 속옷이랑 분명하게 차이가 나야 속옷과 다른 수영복이라는 생각에 생각이 미치는 모양이야. 어차피 머릿속엔 수영복을 입은 엄마와 냥냥하는 것이 목적이면서."
수진이는 꼭 일기를 쓰는 사람 같은 독백을 하며 본인이 갈아입었던 수영복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입었던 수영복과 파레오를 결제했다.
래시가드는 사지 않았다.
"아빠가 싫다고 하는 수영복을 `굳이` 사서 돈을 낭비하는 취미는 없어. 엄마는 예전부터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남들을 의식해서 샀다가 한두 번 입고 방에 처박아두는 것보단 조금 부끄러워도 아빠가 좋아하는 것만 사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단다."
"뭐하는 거야?"
"육아 일기요."
"애도 안 낳았는데 무슨 육아 일기야."
"지금은 예행연습이에요."
성급한 녀석.
수진이의 수영복을 다 고른 다음에는 나의 수영복을 고를 차례였다.
나는 평범하게 사각팬티나 5부 수영복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수진이는 내 몸에 딱 달라붙은 사각팬티를 고르게 하였다.
스판이 있고 사타구니 쪽에 공간이 조금 있어서 툭 튀어나오지는 않겠지만 조금 서면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느낌의 팬티였다.
"응, 역시 운동을 해서 엉덩이가 탱탱하네요. 이걸로 하죠?"
성희롱당하는 기분이다.
여름은 여성을 개방적으로 만든다고 하는데 수진이도 그런 여름에 열기에 당한 모양이다.
내 엉덩이를 찰싹거리며 두드려 온 수진이를 조금 꺼림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아빠는 120살까지 산다는 약속을 진심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었단다. 주말 2일을 제외하면 매일같이 앓는 소리를 내며 운동을 하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의 모습도 멋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가장 멋있었단다."
"아직도 해?"
"여름이 좋은 점은 아빠가 반팔을 입는다는 것이란다. 팔뚝에 선명히 도드라진 힘줄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날 지켜줄 것 같아서 안심되고 설렌단다. 지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밤만 되면 어찌 그리 야수가 되는지..."
수진이는 독백하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한동안 집에 돌아갈 때도 계속 중얼거렸다.
처음엔 그냥 또 다른 놀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드문드문 본인의 진심을 독백이라는 행위로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령 땀을 잔뜩 흘린 상태에서 옷을 벗고 샤워하러 들어가면 내가 흘린 땀냄새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든가 반팔을 입고 있거나 셔츠를 입었을 때 팔을 걷어 올리면 드러나는 힘줄이 멋지게 보인다든가.
관계를 맺은 다음 본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머리를 토닥일 때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좋다고 칭찬해주며 머리를 어루만져준 때처럼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등등.
평소엔 감각적으로 수진이는 이러겠지... 같은 느낌의 것들을 독백이라는 수단을 써서 나에게 `수진이 사용법`을 알려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육아 일기가 아니고 수진이 사용법으로 바꾸자."
"여자를 사용하다니 여혐이에욧!"
"...농담이라도 그건 그만하자."
"아하하!"
아무튼, 수진이는 생각보다 마초남을 좋아하나 봐.
운동량을 늘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