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8화 〉계곡에서 생긴 일(1) (188/301)



〈 188화 〉계곡에서 생긴 일(1)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날. 수진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주룩주룩 제법  소음을 내는 여름의 장마에 나와 수진이가 두드리는 키보드의 소음이 섞여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오랜만이다.

 경쾌하고 끊임이 없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역시 수진이는 소설을 쓸 때가 가장 아름답고 빛난다고 생각한다.

수진이가 쓰는 소설은 아쉽지만, 스팀 펑크 조선은 아니었다.


역시 기성작가는 돈이 되지 않는 소설은 쓰지 못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번 소설도 꽤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니 재밌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기분 좋게 울려 퍼지던 선율이 끊어졌다.

잠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아무래도 오늘 쓸 분량을  쓴 모양인지 어깨를 주무르며 본인의 소설에 문제가 없는지 퇴고 작업을 하는 수진이가 보인다.


퇴고를 할 때는 소설을 쓸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미간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활자를 생각나는 데로 적고 보면 문맥이 이상하거나 오·탈자가 생기는 부분들이 눈에 보이니 조금 인상이 써지긴 하지.

나 같은 하꼬조차 그런데 수진이 같은 기성작가라고 다르겠나.

우리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거의 2시간가량을 서로의 글을 쓰는 데 사용했다.

노래도 틀지 않고 TV도 켜지 않고 오직 장마가 자아내는 소음에 몸을 맡기고 소비한 2시간.


하지만 이 2시간이 집에서 함께했던  어느 시간보다 더 충실하게 느껴졌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길 바란다.

소설의 업로드가 끝난 수진이가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방금까지 소설의 퇴고를 하며 미간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듯이 노트북을 바라보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

하지만 이 휙휙 바뀌는 모습도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뭐 어쩌겠나.


수진이가 그랬듯이 뭔가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게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말이다.


"그립네요."


"그러게."

조금 아득한 눈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이미 다 마셔서  컵이 되어버린 머그컵을 바라본다.

그 망해버린 카페.


그곳은 망해버렸지만, 우리의 마음엔 아직 그 카페가 남아있다.

나와 수진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

그 카페에 관한 이야기도 남겨두고 싶었다.

"아."


"왜요?"


내가 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바라보는 수진이.

수진이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현재 쓰고 있는 소설과 최근에 무협지를 연습한다고 잠깐 끄적인 심심풀이용 소설을 떠올려본다.


쓰고 있는 소설은 구매수가 그리 큰 변동이 없었고 혈마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재밌다고는 해주지만 유료연재를 해서 돈을 받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먹힐 만큼 재미난 이야기를 자아내는 작가는 될 수 없는 모양이지.

수진이가 가끔 걸어오는 도발에 울컥해서 소설로 성공해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1달 또 1달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감정은 희미해졌다.


꼭 돈이 되는 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생계에 문제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살아가면 된다.

내 소설을 수천만 국민에게 읽게 할 필요는 없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소설을 쓰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은 동화도 좋다고 생각해서."


"동화?"

수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나는 살짝 뜸을 들이며 수진이가 빨리 뭔가 말해보라는 듯이 눈치를  때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써보는 거야.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뿐인 동화이자 소설."

"아..."

수진이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잠깐 멍한 표정을 보이는  보니 생각해본 적이 없나 보다.

"그건 생각도  했네요. 뭔가 좋다..."

"그렇지?"

"저도 쓸까요?"


수진이는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뭔가 두근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직 작가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수진이에게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다가왔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요?"

"너는 그거 말고도 적어야 할게 있으니까."

"네?"

"산모에겐 육아 일기가 있잖아."


여성에겐 육아 일기가 있으니까.


수진이는 작가다. 그것도 굉장히 인기가 있는 기성작가다.


그런 수진이가 쓰는 육아 일기는 굉장히 따뜻하고  재치가 가득 찬 재미난 이야기라 생각된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도 육아 일기를 보며 피식거릴 정도의 이야기를 써내겠지.

"육아 일기라..."

수진이는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아이는 좋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을 받고 자라니까."

"그럴까?"


"제가 아이라면 학교에서 자랑할  같은 데요?"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 그럼 작가라고 하면 필명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럴 거 같고 전업투자자라고 하면 백수라고  것 같은데."


"아하하!"


웃으면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는 수진이지만 나는 그런 미래가 왠지 현실로 일어날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수진이와 곧 다가올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마가 끝나면 할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일은 함께 바다나 계곡으로 수영하러 가는 일이지.

이제 수진이가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수 있는 거구나.

"왜 이리 즐거워 보여요? 오늘따라 입꼬리가 승천할 거 같은데?"


"그냥."

"또  야한 생각하지?"

"수영복이 왜 야해?"

"어차피 수영복 입은 상태로 하자거나 그렇게 말할 거면서."


"..."


날 너무 잘 아는  아닌가?

수영복 입은 수진이와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 옹달샘 내가 와서 먹는다.

아니, 아무튼 역시 바다보단 계곡이 좋아 보인다.

바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까.

"그래도 계곡이면 다시 캠핑도 할 수 있으니까 계곡이 더 낫나?"


"계곡 콜?"


"콜!"


계곡으로 여행이 정해졌으면 다음에 할 일은 어디로 갈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인터넷을 뒤져보니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계곡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아니, 이렇게 사람이 오지 않는 계곡이라고 설명해두면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에 오지 않아요?"

그러게.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의존할 만한 것들은 이런 인터넷밖에 없다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나도 수진이도 계곡 같은 곳을 찾아서 다니던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계곡을 찾아보고 언제 다녀올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엔 수영복에 관한 이야기다.

서로 수영장이나 바다를 간 일이 너무 오래되어 마땅한 수영복이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쇼핑이나 하러 가요."

"굳이 지금? 비 오는데?"


"지하주차장도 있고 차도 있는데 무슨 상관이람?"

머리에 떠올랐다 하면 바로 실행해버리는 추진력을 갖춘 부인은 나의 등을 살살 두드리면서 얼른 백화점에 가자며  꼬드기기 시작했다.


그래. 토요일이고 집 안에 있기만 하기도 지루하니 나가자.

수진이와 팔짱을 낀 상태로 집안을 나섰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를 퍼붓고 있었지만, 팔짱을 낀 나와 수진이는 이미 하늘이 개어 화창한 날씨에 산책을 나온 부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평소에 알고 지내는 이웃 몇몇과 마주쳐서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계속 타지 않으면 감이 떨어진다며 나에게서 차 키를 빼앗아간 수진이.

이제 슬슬 수진이의 차를 뽑을 때도  것 같은데.


"그래도 이웃분들이랑 많이 친해졌어요."

"그러게."

처음 이사를 왔다고 이사 떡을 돌렸을  우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었지.


어떤 관계인지 의심스러운 남녀가 찾아와서 떡을 돌렸으니까.

부부라고 하기엔 여자가 너무 젊어 보이고 부녀라고 하기엔 아버지가 젊어 보이는 묘한 조합이었으니까.


우리가 신혼부부라고  부탁한다고 인사를 한순간 경악한 표정을 지었던 이웃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지금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뭐라 뭐라 말하는 이웃은 없다.

수진이는 친구가 없지 사교성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이웃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신혼 새댁이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이웃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등 신부니 똑순이니 하며 그런 식으로 대접받고 있더라.

또래 친구는 없으면서 아줌마 친구는 많다니  묘한 녀석이다.


나도 가끔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며 인사는 하는데 대부분 요즘 수진이는 어떠냐는 이야기뿐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애교의 절반만 보여주더라도 어른들은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외모도 예쁜데 어른들한텐 항상 공손하고 친근감 있게 훅훅 발을 들이밀어도 거부감이 없는 녀석이라니.

어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다.

그러니 이웃분들이 나와 수진이를  때면 1등 신붓감인데 벌써 침이 발렸네~ 하면서 농담을 쳐오는 것이지.


우리 아들이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웃도 있다.

아침마다 어디로 나가는  출근하는 남자로 생각하고 집에서 나오지 않는 수진이를 전업주부나 뭐 그런 거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다.

수진이가 연봉이 얼만지 알게 되면 우리 아들 운운은  나오겠지.

수진이는 정말로 좋은 아이지만 이런 아이와 결혼하는 남편은 조금 불행할 수도 있지.


나라서 잘 어울려서 지내는 거로 생각한다.

적어도 수진이와 함께 있으면서 자격지심을 품지는 않을 정도로 성숙한 인간이 되었기에 함께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이 선생님이 완전 도둑놈에 돈이 엄청나게 많은 재벌이니 중소기업 사장이니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알아요?"


"남자는 돈, 여자는 외모긴 하지."

"그럼 전 남자여자에요?"

"오우 쉣!"

Shemale은 좀...

수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백화점에 도착했다.


주차를 끝내고 천천히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백화점은 언제 오더라도 사람이 많구나.


비가 오는 날은 좀 적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수진이와 팔짱을 낀 상태로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그래도 오늘은 수영복만 사고 돌아갈 예정이니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가 선택한 수영복을 시착하고 보여주는 데이트라니 이런 데이트면 백화점도 땡큐 베리 머치합니다.


"이제 주차도 제법 잘하네."


"그럼요. 그동안 그렇게 운전을 했는데 이 정돈 껌이죠."

5년이 넘게 운전을 해도 사고를 내는 여성들을 많이 봤으니 칭찬하는 건데 말이다.

뭐, 아무튼 오랜만의 백화점 데이트다.


수진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영복을 골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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