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신혼여행(13)
"이렇게 느긋한 것도 좋네요. 바람도 기분 좋고."
수진이는 창문에 팔을 올리고 한 손으로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천천히 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량으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수진이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바람이 굉장히 화보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인상을 쓴다.
"어허, 김돌쇠야. 운전 똑바로 하거라. 전방주시 태만이지 않느냐?"
"마님, 조선 시대에도 자동차가 있었습니까요? 전방주시라는 말도 썼었습니까?"
"어허. 언젠 운전 중엔 곁눈질 안 한다고 했으면서 사람이 이렇게 바뀐단 말이더냐?"
제주도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 조금은 힐끔거려도 되지 않을까.
그리 오래 보는 것도 아니다.
차선을 변경할 때 백미러를 보는 것처럼 정말 아주 잠깐 보는 것뿐이니까.
"어허, 또 곁눈질하는 것이냐? 그리도 내가 미인이더냐?"
"마님은 얼굴도 보지도 경국지색입니다요."
"...돌쇠가 경국지색이란 단어는 어떻게 알아요?"
"운전도 전방주시라는 단어도 존재하는 조선 시대니 경국지색을 아는 돌쇠가 있을 수도 있지."
"완전 제멋대로네요."
"근데 그런 것도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우리나라가 조선 시대였을 땐 초가집을 지어놓고 살았으면서 기와집에 사는 양반들이 뭣도 없는 학문을 공부하며 몇 살에 뭐를 뗐고 뭐를 익혔으며 하며 천재라고 거들먹거렸는데 서양에선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철도가 깔리고 그랬지."
"그래서요?"
"같은 세계에 살았는데도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옆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며 배워봤자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말장난에 평생을 쏟던 인간들이 철도를 발견한다면 어땠을까?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된 충격에 졸도하는 양반들도 생길지 모르겠네."
"그렇겠...죠?"
수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그리 답해왔다.
"그런 상황이라면 돌쇠 같은 일자무식인 녀석들도 경국지색 같은 단어를 알아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런 말들은 더는 독점할 의미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릴 테니. 서민이나 농노들이 그런 걸 배우고 있을 때 양반들은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 있을 테니까. 어느새 조선에도 자동차가 돌아다니며 전방주시니 운전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거고."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없었더라면 양반들은 자동차나 증기 기관차를 타고 다니고 서민들은 걸어 다니는 뭐 조선식 스팀펑크다 뭐 그런 거에요?"
"그래. 그런 세계관이면 돌쇠도 경국지색을 알겠고 마님도 전방주시니 운전이니 같은 단어를 알겠지."
"조선 시대 스팀펑크라니 왠지 조선 시대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어떤 소설이 생각나는 데요."
소드맛스타가 되었다가 재밌긴하지.
작가 나름대로 역사를 재해석한 것도 마음에 들고 말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스팀펑크라니 소드맛스타보다 더 마니악해서 아무도 안 할 것 같긴 하다.
조선 시대엔 과거시험이 굉장한 난이도였다고 하니 의외로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정말로 스팀펑크 같은 조선이 됐을지도 모른다.
좋은 것은 독점하려고 하던 양반들이 민중에게 서양문물을 전파하지도 않았겠지.
어떤 양반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데 고지식한 양반은 가마를 타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는 둥 세계관이 흥미로울 것 같기는 하다.
아쉽다. 내가 정말로 대단한 필력을 가진 작가였다면 저런 어처구니없는 세계관에서 홍길동을 등장시키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Hey YO! 파더. 파더를 파더라고 부르지 못하고 브로를 브로라고 부르지 못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데샤아아앗!
"왜 혼자 키득거려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오히려 홍길동만 해외에서 유학하고 와서 천재적인 머리로 모든 증기기관과 학문을 익히고 그 천재적인 능력을 통해 조선을 스팀펑크 시켜버린다는 파격적인 이야기가 나와도 되겠다.
사실 홍길동의 도술은 서학을 익힌 서자의 능력이었다고 재해석을 해버리면 되니까.
엔딩엔 초가집과 기와집이 가득한 조선에 철로가 놓이고 증기 기관차가 다니는 아스트랄 한 세계관으로 끝이 나도 그건 그것대로 재밌을 것 같다.
뭔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에 마구 떠올라 오는구나.
수진이를 힐끔 바라보니 수진이가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뭐해?"
"혹시 어딘가에 쓸 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메모해두려고요."
"스팀펑크 조선?"
"네. 스팀펑크 조선."
"스팀펑크는 굉장히 매니악한 장른데 대역까지 들어가니 아무도 안 볼 것 같다."
"그렇긴 하죠?"
이건 쓰는 사람은 싱글벙글하면서 쓸 것 같은데 막상 팔리느냐 물어보면 글쎄올시다가 될 것 같다.
수진이가 아무리 잘 팔리는 기성 작가라도 안 팔리는 건 안 팔린다.
한때 아카데미물의 정점이라 불렸던 작가가 160kg나 나가는 뚱보를 주인공으로 했다가 독자들에게 난도질당하고 연중을 해버리는 사태도 있지 않았나.
필력이 좋든 기성작가라서 인지도가 있든 어느 정도는 독자들이 즐겨보는 장르여야 성적이 나오는 법이지.
"선생님은 안 팔리는 글 쓰면서 그런 부분은 깐깐하시네요?"
이 자식이?
내가 조금 발끈한 표정으로 바라보려니 수진이가 안전운전을 외치며 전방을 주시하라는 말을 해온다.
난... 작가가 아니다.
전업투자자다.
지금은...
"왜 그리 시무룩해요? 장난이에요. 전 선생님 소설이 요즘 보는 것 중에서 가장 재밌어요."
"그래?"
"네. 다음엔 좀 더 대중적인 소설도 잘 쓰실 거에요."
"그래. 그래야지."
주식투자로 버는 돈이 더 많다고 해도 이왕이면 소설가로 입에 풀칠하는 정도까진 해보고 싶다.
수진이와 드라이브를 한 다음엔 고깃집에 들렀다.
흑돼지라고 하는데 솔직히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단백질을 그렇게 낭비하셨는데 가끔은 보충도 하셔야죠. 그죠 서방님?"
"그렇지. 우리 수진이는 콜라겐을 엄청 많이 먹으셔서 피부가 탱탱한 게 부족해 보이진 않는데."
"오호호호호!"
"아하하하하!"
수진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양말을 신을 발로 내 허벅지 안쪽을 꼬집어왔다.
발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는다니 굉장히 요령이 좋은 아이다.
그러니까 가끔 발로 대딸을 해주는 거지.
근처에 발소리가 들리자 수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허벅지에서 발을 뗐다.
다시 사람이 사라지자 싱긋 웃는 눈빛에서 째려보는 눈빛으로 바뀐다.
"선생님이 좋아하니까 먹는 거지 맛있어서 먹는 건 아니에요."
"알지. 그래서 고맙고 사랑스럽고 그래."
"말은 잘하지. 흥!"
조금 부루퉁한 표정이지만 작게 쌈을 싸서 입 안에 넣어주었더니 금세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기 시작한다.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것도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아 콩깍지라는 것이 남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수진이는 정말로 매력적인 아이다.
아마 이 생각은 10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바뀌진 않을 것 같다.
"여보, 아~"
"아~"
수진이가 쌈을 싼 상태로 내 입으로 넣어왔다.
쌈을 꼭꼭 씹고 있으려니 마늘에 매콤한 맛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맛있어요. 여봉?"
이 자식이...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에 마늘을 잔뜩 넣은 모양이다.
"마늘이 정력에 그렇게 좋대용."
"내가 정력에 좋은 약을 얼마나 먹는지 아냐?"
"그래서 밤마다 그렇게 힘이 좋으신가?"
"그래, 이 자식아."
"역시 약쟁이를 이길 순 없는 법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멋대로 납득을 하는 수진이.
그래. 약의 도움도 있기는 하겠지.
"아무튼 내일은 뭐 할까요?"
"잠수함은 어때?"
"잠수함이요?"
"그래. 제주도에는 잠수함을 타고 바다에서 구경하는 것도 가능해."
"타보고 싶긴 하네요. 한 번도 타본 적 없으니까."
"그래. 그럼 예약할게."
"네."
이전에 전 아내와 같이 타본 경험이 있는 곳이다.
수진이가 더는 내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왕이면 제주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을 하고 가는 게 낫겠지.
수진이는 잠수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멍하니 있다.
지금이다.
복수의 시간이다.
수진이에게 줄 맛있는 쌈을 만든 다음 수진이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수진이는 쌈을 한번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더니 씨익하고 웃었다.
"우리 여보야가 장난꾸러기인데 내가 속을 것 같아요? 여보야가 먼저 먹고 내껀 내가 보는 앞에서 만들어주세요."
"..."
"왜용?"
"그럴 것 같아서 그냥 평범하게 만들었거든."
쌈을 입안에 집어넣는다.
고추와 마늘의 매콤함이 혀에 스며든다.
저렇게 멍하니 있을 때는 입에 들이밀면 그냥 덥석 받아먹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은 걸 보니 미끼를 던지고 내 반격을 기다린 모양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평하게 쌈을 씹어먹은 다음 평범하게 쌈을 싼 상태로 수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여봉이 만들어준 쌈이 정말 최고에용~"
"그래그래."
오늘 먹은 단백질과 마늘과 굴욕은 밤에 풀도록 해야지.
혀가 얼얼하다.
나는 최대한 태평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삼키지는 않고 혀를 최대한 적시듯 입에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조금은 혀의 얼얼함이 가신 듯한 기분이다.
"후훗, 바보~"
내 연기는 수진이 앞에서는 곧장 들통이 나버리는 어설픈 것이다.
그래도 그 앞에서 괴롭다고 소리치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수진이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괴롭히는 못된 마음과 상냥하게 위로해주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
천사이자 루시퍼 같은 녀석이니까.
"혀가 그리 아프신데 전화는 잘할까 모르겠네~"
시끄러워 이 자식아.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서 잠수함을 탈 수 있는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확인을 해보니 오후 4시에 예약이 비어있는 모양이다.
애매한 시간대라서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괜찮은지 의사를 묻는다.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약을 한 다음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놨다.
그러자 수진이가 다시 쌈을 손에 들고 손을 흔들었다.
"여봉~"
"..."
"아 여봉~ 이번엔 진짜! 진짜예요."
"..."
"안... 먹을 거야? 나는 밤마다 그렇게 씁쓸하고 콧물 같은 거 먹어주는데..."
"아~"
씌팔...
아니, 생각해보면 와이프가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이 정도 장난엔 어울려줘야 하는 건가.
나는 최대한 인상을 쓴 상태로 쌈을 받아먹었다.
이번에도 마늘이 한가득 담긴 쌈이었다.
나를 보며 싱긋 웃은 수진이는 손을 들고 마늘까지 리필 받았다.
본인은 마늘은 향신료 수준으로밖에 입에 대지 않으면서 말이다.
얼마나 더 나에게 마늘을 먹을 생각일까.
그래도... 먹어줘야지.
정액에 비교하면 마늘은 양반이니까.
항상 그런 걸 먹여서 미안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