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14)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렴."
5월 8일 어버이날.
나는 오랜만에 친가에 찾아왔다.
이젠 친가에 찾아오는 것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와라."
아버지는 신문을 2번 반으로 접으시곤 옆자리에 놓았다.
우리는 사 들고 온 것들을 식탁에 올려놓고 냉장고에 집어넣은 다음 내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점심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와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오는데 피곤하진 않았어?"
"제가 운전했어요!"
"새아기가? 괜찮았어?"
"잘하던데요. 이제 차 한 대 뽑고 알아서 다녀도 되겠어요."
"그래? 대단하네. 엄마는 운전은 도저히 못 하겠던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밥솥을 열고 밥그릇에 밥을 담기 시작하셨다.
"조심하거라."
"네!"
아버지는 수진이가 운전한다는 게 조금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처음엔 좀 걱정됐으니까.
그래도 뭐든 빨리 익히는 아이라서 내가 뭐라고 할 게 없었다.
요령이 좋은 아이다.
"준수야. 결혼식 준비는 다 됐냐."
"예. 이제 청첩장만 돌리면 끝나요. 다음 주 중으로는 끝나고 예식장도 한 번 더 살펴보고 오려고요."
"그래."
우리는 어머니가 준비가 다 됐으니 식탁을 앉으라고 할 때까지 멍하니 TV를 보고 앉아있었다.
수진이의 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굉장히 과묵한 집이지.
하지만 이제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더는 악감정을 품지 않으니까.
이것도 한 가정의 형태겠지.
"오늘 수진이는 반짝반짝하네."
식사하는 도중에 어머니는 수진이의 손이나 귀, 목을 보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전에는 액세서리를 하지 않았었으니까.
수진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는 작게 웃었다.
"전부 선생님이 선물해준 거에요."
"그래?"
어머니는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신다.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닫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부모에게 자신의 연애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건 굉장히 껄끄러웠다.
"선생님도 참 바보라니까요. 후훗."
"왜?"
"여자들은 다 액세서리 사주면 좋아하는 줄 안다니까요? 선물이 다 똑같아."
"뭐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돈이 좀 나가고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명품가방이라든지 지갑이라든지 금이나 다이아 같은 거 말이지.
수진이는 나를 보며 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액세서리는 코디의 연장이라고요? 옷 분위기에 안 맞으면 선물 받아도 안 써요."
"..."
이런... 그건 몰랐는데.
그래도 대충 보다가 예뻐 보이는 거나 점원이 잘나간다고 하는 종류로 사는 데.
"어차피 예뻐 보이는 거 사거나 점원 추천으로 사잖아요. 그 순간 예뻐 보이는 것도 선물 받은 것들이랑 함께 착용하면 색상이 부자연스러운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점원 추천! 그거 귀찮아서 대충 툭툭 던진 거나 비싼 거 추천하면 호구 잡히는 거 알아요?"
내가 그걸 어찌 알리오.
그랬단 말인가.
대체 이 나라 여자들은 선물에 왜 이렇게 바라는 게 많아?
나는 좀 답답한 기분이 되어 물을 마셨다.
"그래도 전 선생님이 주는 건 뭐든 좋아요."
싱긋.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웃고는 반지를 과시하듯 손을 세운다.
그 손의 위치가 귀와 가까워서 내가 선물한 물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악한 녀석.
내 맘을 항상 술렁이게 하는구나.
어머니도 수진이의 모습에서 무언가 느끼는 게 있으신지 조금 쓴웃음을 지으셨다.
어머니. 당신 아들이 이렇게 당하고 삽니다.
"내가 길가에 돌멩이 주워다가 줘도 좋아할 거야?"
"해보세요."
수진이가 싱긋 웃으면서 그리 말해온다.
솔직히 반응이 궁금하긴 한데 저녁밥으로 돌 밥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못하겠다.
선물이 정말 어렵긴 하네.
그럼 다음 선물은 그냥 옷으로 할까?
수진이가 입는 옷들은 대부분 백화점에서 잘 나가거나 여성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그런 류의 옷이다.
차도녀같은 스타일과 청순한 소녀와 같은 원피스를 자주 입는다.
그에 맞춰서 옷을 사면 나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다음 선물은 뭐로 할까 생각 중이야."
"돌멩이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있냐?"
"아하하!"
조금 과묵한 밥상이 금세 활기를 띤다.
수진이가 있으면 이 집조차 화사하고 떠들썩한 집이 된다.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도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계시고 말이지.
나는 자꾸 장난을 치는 수진이와 웃고 떠들면서 식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사온 카네이션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에 달아드렸다.
지금까진 택배로 카네이션을 붙이는 게 연례행사였는데 이렇게 직접 달아드리는 것도 오랜만이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는 수진이가 달아드렸다.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은 아니겠지.
여전히 무뚝뚝하시지만,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이 작게 웃음이 나왔다.
수진이도 나를 보며 작게 웃고 있다.
"아!"
수진이는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요."
"찍기 불편할거 같은데."
"저 요즘 셀카봉 들고 다녀요."
언제부터 셀카에 그렇게 빠졌냐.
수진이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진짜로 셀카봉을 들고 나왔다.
"자, 다들 좀 더 가까이 붙어요. 찍어요~ 하나 둘 셋!"
김치ㅡ
수진이는 사진을 찍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 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와 부모님의 휴대폰으로 각각 사진을 전송했다.
"잘 찍혔죠?"
수진이는 그리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확실히 괜찮게 찍힌 거 같긴 하다.
아버지는 잠시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다.
약 5초 정도 휴대폰이 뚫어져라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뭔가를 하기 시작하셨다.
"흠."
아무래도 뭔가 안 되는 모양이다.
수진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작게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고 본인이 해드리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조금 고민을 하시다가 수진이의 손에 휴대폰을 올려주었다.
수진이는 10초 정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는 아버지에게 휴대폰을 돌려드렸다.
뭘 한 거야?
설마?
나는 카톡을 켜서 아버지의 프로필을 살펴봤다.
아버지의 프로필 이미지가 우리가 찍은 사진으로 변경되었다.
...이건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카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작게 웃으신다.
어쩌면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어머니가 반한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렴."
"네. 다녀오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친구분들과 식사를 할 예정을 잡아두셨다고 했다.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니 늘 그러셨듯이 약속을 잡은 모양인데 올해는 우리가 찾아와서 일정이 조금 꼬였다.
저녁은 우리끼리 해먹어야 할 것 같다.
"사실 자랑하러 나가시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응?"
"선생님이 꼭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보냈다고 그러셨잖아요. 아들이 보낸 카네이션을 자랑하려고 친구분들 만나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나와 수진이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하암~"
수진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피곤한 모양이다.
"많이 졸려?"
"선생님이 밤에 자꾸 괴롭히니까 그렇죠. 짐승남이야 완전."
좋으면서 튕기기는.
수진이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렇게 잠깐 시간이 흐르니 체중이 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짜로 많이 졸린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천천히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피곤하긴 하곤 하네.
지금은 4시.
부모님은 저녁을 드시고 들어온다고 했으니 7시나 8시쯤 들어오시려나.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저녁을 준비해서 먹으면 될 것 같다.
수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나도 수진이의 옆에 누웠다.
수진이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깼어?"
"당연히 깨죠."
수진이는 하품을 하고는 내 가슴에 파고 들어왔다.
"잘 자요."
"그래. 잘자."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오후.
창문의 커튼 너머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햇빛.
햇볕에 말린 듯 포근한 해님의 냄새가 나는 이불 속에서 수진이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상할 정도로 잠이 쏟아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너무 바빴던 것 같다.
서둘러서 예식장을 알아보고 웨딩 촬영을 하고 하루 만에 사진을 고르고 청첩장에 써넣을 이야기를 쓰고 일일연재를 하고...
가끔은 이런 조용하고 느긋한 하루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잠깐 낮잠을 자고 깬 이후에는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왠지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그냥 라면이나 해먹자."
"찬성~"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냄비에 물을 담고 불을 올린다.
냉장고에 있던 파나 고추를 썰어 넣고 계란도 넣었다.
가끔은 이런 식사도 나쁘지 않지.
"그러고 보니 우린 그걸 안 했네요."
"응?"
"라면 먹고 갈래?"
"아, 그러네."
"라면 먹고 갈게요. 히힛."
수진이는 작게 웃으면서 라면을 후후 불고 입에 물었다.
"라면 말고 딴 거 먹잖아."
"풉! 콜록 콜록! 읍!"
수진이가 사레가 들린 사람처럼 기침한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상태로 나를 노려본다.
"정액을 마시는 새. 이수진."
"진짜 미쳤어요? 라면 먹는데 그러고 싶어?!"
미안. 왠지 장난이 치고 싶었다.
수진이는 두고 보라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천천히 내 눈치를 보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 건드리면 터질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해야지.
여기서 2연타로 나는 모유를 마시는 새라고 하면 발차기가 날아올 것 같다.
지금은 처남이 왜 그리 수진이를 가지고 노는 지 알 것 같다.
리액션이 혜자야.
리액션 천재 이수진이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싶어진다.
내가 뭐라고 하든 재밌게 웃어주고 헛소리를 해도 격하게 반응해주니 놀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도 당사자가 짜증 나면 악감정만 쌓이기 마련이니 가끔씩만 해야지.
수진이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내가 평범하게 라면을 먹고 있으려니 그제야 조금 긴장을 푼 상태에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 긴장한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라면을 함께 먹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나와 수진이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ㅡ
ㅡ5월 29일.
우리들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