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11)
그대로 좋은 분위기가 될 것 같았지만, 수진이는 굉장히 이성적이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 눈동자에 다시 이성이 돌아오고 헛기침을 하고는 리모컨을 사용해서 노래를 틀었다.
별빛달빛이라니 뭔가 동요 같은 노래구나.
가사와 리듬이 귀염뽕짝한 느낌이다.
방금까지 방에 흐르던 퇴폐적인 분위기는 완벽히 증발하고 말았다.
그대신 수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대신했다.
이런 수진이도 매력적이다.
수진이가 나를 보며 가볍게 윙크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 호응을 해줬다.
수진이의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이게 아이돌을 좋아하는 삼촌 팬의 심정인가보다.
귀엽다. 노래도 그렇지만 저렇게 열심히 불러주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수진이는 한참 노래를 부르고 나선 이마의 땀을 닦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곤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자."
수진이에게 카운터에서 사온 음료수를 건넨다.
"고마워요."
수진이는 캔을 따서 목을 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예약한 노래의 반주가 나오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불을 땐 서서 부르는 게 익숙하고 고음도 더 잘돼서 그리했는데 수진이가 나를 옆에서 붙들고 놔주지 않아서 앉아서 부르기로 했다.
수진이는 노래를 부르는 날 올려다보며 굉장히 싱글벙글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끄고 내려놓자 수진이는 짝짝짝 하며 박수를 쳤다.
"왜 말 안 했어요?"
"뭐가?"
"노래 잘 부르신다고."
"잘 부르는 건 아니지. 그냥 어디 가서 욕 안 먹을 정도는 부르는 거지."
"그래요?"
"너랑 내가 커플이니까 엄청 불쾌한 소리가 아니면 좋게 들리는 게 아닐까?"
"왜 이런 곳에선 미묘하게 자존감이 낮으실까..."
그야 여자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게 처음이니 그렇지.
그래도 반응이 좋으니 다행이다.
너무 고음으로 올라가는 노래는 최대한 피해야겠다.
선물은 뭔가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많이 연습했으니 잘 되는 편인 거지.
"자 빨리 예약해. 자꾸 끊어지면 안 된다고."
"노래방에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분위기가 중요하지."
"노래가 끊기면 분위기가 식는다고."
"그럼 왜 첫 곡부터 발라드를 고르셨는지?"
듣기론 여자들은 발라드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랬지.
"여자랑 노래방 온 건 처음이라서."
"네? 진짜요?"
"어."
"와... 전 아내분이 이걸 못 듣고 가셨네. 훗."
전을 강조하며 말하는 수진이는 아까보다 더욱 진한 웃음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이상할 정도로 퇴폐미가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작게 쿡쿡 웃는 수진이는 매우 야릇해 보였다.
수진이는 남아있던 음료를 마저 마신 다음 조금 더 신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끔 듀엣도 섞어가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새 그런 야릇한 분위기는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나이가 많은 것만 빼면 좋은 점 투성인데."
"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정말인데요?"
"그래그래."
내 성격을 알면서도 좋다고 하는 너의 그 특이한 취향 탓이지.
불우한 인간관계의 탓일지도 모르고.
나와 수진이는 서로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틈틈이 잡담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나와 노래방에서 신나게 소리를 지르니 서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버렸다.
"1시간이 굉장히 짧네요. 크흠. 그래도 오랜만에 노래해서 그런가? 목이 좀 아픈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집에서 날계란이라도 먹어봐."
"그걸 비려서 어떻게 먹어요?"
수진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리 말해왔다.
"아니 그걸 왜 못 먹어?"
그걸 왜 못 먹지.
"진짜 이럴 때마다 선생님이 아재라는 게 팍팍 느껴져서 웃긴다니까."
수진이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아니 이게 왜 아재야."
어른들이 목 아플 땐 날계란이라는 말을 요즘은 안 하나?
그걸 비려서 어떻게 먹지라며 중얼거리는 수진이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요즘은 안 하나 보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수진이와 함께 노래방에서 나왔다.
"으읏~ 하아, 노래방도 재밌었다."
"그러게. 이제 어디 가고 싶어?"
"오락실!"
왠지 그럴 거 같더라.
볼링장 노래방 오락실이면 딱 수진이 또래 애들이 놀만 한 코스다.
"그래 가자."
"괜찮아요?"
"나도 게임은 좋아해."
나이를 먹었어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지.
40대 아저씨들이 배그 스쿼드를 하는 것도 종종 봤다고.
수진이는 내 표정을 살펴보곤 작게 웃었다.
"그럼 가요!"
수진이는 내 팔을 끌어안고 당기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놀고 있는 주변은 수진이의 친가 근처다.
첫 데이트는 내 고향인 부천에서 놀았던 것처럼 결혼하기 전의 마지막 데이트는 본인의 친가 근처에서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진이에겐 오랜만에 친가 근처에서 노는 것이다.
중학생 때 이후로 친구들과 다니지 않았다고 했으니 3년도 넘었겠지.
"여기도 아직 안 망했네. 다행이다."
수진이는 나의 손을 붙잡고는 스티커 사진을 찍는 곳으로 들어갔다.
"사진 찍는 거 그리 힘들어하더니 이건 또 괜찮아?"
"그건 그거 이건 이거죠. 그리고 전 힘들긴 했는데 재미도 있었어요. 오히려 선생님이랑 오라비가 지루해한 거 다 알거든요?"
"들킴?"
"이응이응"
수진이는 조금 분주히 움직이더니 나를 카메라 앞에 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앨범은 들고 다니지 못하는데 이건 붙일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휴대폰에 붙이고 다니세요."
"알았어."
그래. 더는 숨기지 않고 당당히 만나도 되는 관계니까 오히려 과시해준다는 생각으로 해보자.
수진이는 처음엔 평범하게 사진을 찍고 다음 사진에선 내 볼에 뽀뽀를 해주는 등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긴장 안 하네?"
"이건 노는 거니까요."
수진이는 아까 내가 불러줬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진에 낙서하고 있었다.
얼굴은 건드리지 않고 주변에 하트를 그리거나 하는 심플한 꾸밈이 끝나고 인쇄가 되어 나왔다.
수진이는 사진을 잘 나누어 절반은 나에게 건네주었다.
케이스에 한장, 그리고 케이스를 벗기고 한장을 붙였다.
"이참에 커플티라도 하나 맞출까요?"
"저번엔 이대로도 좋다며?"
"그건 그때고요. 이제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저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래요. 역시 우리도 해야겠어요."
"그럼 그러던지."
그래. 수진이의 말이 맞다.
굳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 필요는 없지.
어차피 우리의 직장은 집이고 우리의 인간관계도 더는 넓어지지 않는다.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도 우리의 관계를 인정했다.
길거리에서 한번 마주치고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의 시야를 신경 쓰지 말자.
수진이는 휴대폰에 스티커 사진을 붙이고는 웃으면서 휴대폰을 흔들어왔다.
"어때요? 귀엽죠?"
"그래. 수진이는 언제든 귀엽지."
"정말 항상 그렇게 말하시네."
"팩트)다."
"아하하하!"
수진이는 조금 큰소리로 웃고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스티커 사진만 찍고 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게임도 할 생각인가 보다.
"아! 저거 해봐요. 저거."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지를 뻗었다.
그 끝에 있는 것은 THE☆BishiBashi라고 적힌 오락기였는데 빨강, 초록, 파랑의 버튼과 노랑의 버튼이 3쌍 있는 조금 특이한 모양이었다.
"이게 뭔데?"
"보면 알아요. 오라비랑 엄마 심부름 갔다가 오라비가 재밌다고 해서 해본 건데 재밌더라고요."
"그래?"
3쌍이 있으니 혼자서도 놀 수 있고 최대 3인까지 가능할 거 같다.
아마 처남은 여친이랑 오락실 데이트를 하다가 같이 할만한 게임을 고르다가 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수진이를 먼저 자리에 앉혀놓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동전으로 바꾼 다음 자리에 앉았다.
오락기에 돈을 집어넣고 캐릭터를 고르고 게임을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지 안 알려줘?"
"어차피 설명으로 다 나오더라고요."
"아."
우리는 시간상으로 마지막 데이트가 될 오락실 데이트를 시작했다.
수진이의 말대로 오락기에서는 매 스테이지마다 설명이 나왔다.
게임은 대부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됐다.
일단 화면을 삼등분해서 1P, 2P의 화면을 보여주고 각 화면을 또 삼등분해서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빨초파의 색상이 각각 왼쪽, 중간, 오른쪽에 대응하게 되어있었고 그에 맞춰 색상에 대응하는 부분을 눌러서 점수를 획득하는 거다.
마지막에 finish라는 영어가 나오면 위에 따로 놀고 있는 노란 버튼을 누르면 정산이 된다는 식이었다.
"이 정도면 쉽겠네."
"흐응? 글쎄요?"
수진이는 키득 이며 절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됐다.
설명으론 어묵이 가로로 눕혀져서 내려오는데 게임 속의 캐릭터의 양손 검지의 사이에 어묵이 도달했을 때 좌우의 버튼을 눌러서 캐치는 게임이라는 것 같다.
쉬워 보인다.
수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수진이는 화면을 쓰윽 한번 보고는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다.
한번 해봤기 때문에 여유롭다는 걸까?
"근데 했던 거 또 하고 그러면 질리지 않아?"
"이건 게임이 여러 개가 있어서 할 때마다 조금 섞어서 랜덤으로 나오더라고요. 이건 우연히 했던 거고."
"그래?"
레디? 고!
게임이 시작됐다.
어묵이 내려온다.
제법 천천히 내려오기에 처음엔 우리 둘 다 무난히 성공했다.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하지만 천천히 속도가 빨라져서 한두 개 놓치는 어묵이 나오기 시작했다.
15개를 성공했을 때 노란 버튼이 반짝이기 시작해서 바로 노란 버튼을 눌렀다.
수진이 쪽을 바라보니 나보다 1개를 더 잡아서 17개를 성공했다.
뭐, 수진이는 운동신경이 나쁜 편도 아니고 해봤던 게임이니 그럴 수 있지.
"처음치곤 잘하시네요?"
"이 정도는 할만하지."
그다음에 나온 게임은 시력검사에 나오는 한쪽 구멍이 뚫린 원형이 나오는 게임이었다.
구멍이 뚫린 쪽의 버튼을 누르면 되는 모양이다.
"이것도 제법 쉬워 보이는데?"
"해보면 알아요."
게임이 시작됐다.
나는 순서대로 좌우좌좌중중우우좌... 하면서 연속으로 두드려 나갔다.
생각보다 쉬운데 이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나는 투타다다닥 누르면서 게임을 끝냈다.
수진이가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 노란 버튼을 누르며 게임이 끝났다.
"어라?"
수진이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을 껌뻑이고 있다.
"쉬운데?"
"..."
수진이는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비록 미니게임 같은 거라도 여친한테 질 수는 없지.
솔직히 첫 번째 게임에서 진 것도 조금 그랬다.
승부욕이 타오른다.
"저도 다음 판엔 진지하게 할 거예요."
"그러세요."
"이씨!"
수진이가 어깨랑 손을 풀고 있다.
"솔직히 방금 게임 내가 고득점 못 먹었으면 너 라이프 1개 깎였어."
"원래 협력 게임이거든요?"
"그렇긴 하지."
"그놈의 승부욕 으이구~"
너한테 듣고 싶지는 않다.
오전에 볼링장에서 그렇게 분해했던 녀석이 참나.
끼리끼리 만난다고 했나.
이런 부분도 미묘하게 닮은 것 같다.
나와 수진이는 협력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숙명의 라이벌을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게임에 열중했다.
주위에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진이와의 승부가 더 중요했다.
나보다 고득점을 얻을 때마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수진이가 조금 얄미워 보여서 어떻게든 이겨주고 싶었다.
"아! 좀! 어른스럽게 행동하세요. 완전 애야, 애!"
"너도 이제 어른이야, 이 자식아!"
우리는 고작 플래시게임에 가까운 오락기에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열중했다.
"으아아아... 손바닥이 너무 아파..."
"..."
우리는 손바닥이 평소보다 두껍게 느껴질 정도로 게임에 열중한 모양이다.
손바닥을 호호 불고 있는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수진이는 그제야 민망했는지 얼굴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