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10)
"아싸!"
수진이가 팔짝 뛰며 만세를 부르고 나한테 다가와서 하이파이브를 한다.
어디서 연습이라도 한 걸까?
이전에는 심심하면 똥통으로 빠졌었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첫판부터 스트라이크가 나왔다.
운인지 실력인지 모르겠네.
"봤어요? 봤죠!"
그리 재밌는 걸까?
수진이는 신이 났는지 양손을 허리에 얹고 가볍게 허리를 흔들었다.
시험 스트레스가 제법 많이 쌓였나 보네...
"자! 선생님 차례~"
수진이가 웃으면서 나를 배웅한다.
좋아. 수진이도 했는데 나도 스트라이크를 노려봐야지.
14파운드짜리 볼링공을 들고 천천히 자세를 잡은 이후 볼링공을 굴렸다.
아쉽게 우측 끝에 2개의 핀이 남았다.
"아싸! 내가 이긴다아아아!"
수진이는 첫판 리드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볼링공을 다시 잡고 스페어를 처리했다.
다행히 2핀은 무사히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거 스트라이크 점수 어떻게 계산하는 거에요?"
"10점으로 계산하고 2번째, 3번째 판에서 얻은 점수를 보너스로 받을 수 있어."
"그럼 3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치면 첫판은 30점으로 계산하고 2번째도 3구 동안 스트라이크 계산이란 거에요?"
"그렇지."
"히히. 내가 이겼네."
수진이는 득의양양한 포즈로 볼링공을 잡으려고 했다.
"아직 내 차례야."
"아, 맞다."
젠장. 이런 초짜한테 져야 한다니.
질 수 없다.
어차피 수진이는 똥통에 빠뜨릴 테니까 조금만 더 집중해서 하자.
침착하게 굴린다고 굴렸는데 이번에는 1개의 핀이 남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볼을 굴렸지만 아쉽게도 스페어 처리에는 실패했다.
이거 영 불안한데. 아무래도 오늘은 질지도 모르겠다.
"자! 잘 보고 계세요."
수진이는 볼링공을 열심히 문지른 다음 공을 들고 걸어나갔다.
어디 얼마나 잘하려나.
나는 제법 긴장된 눈빛으로 수진이의 다음 공을 지켜봤다.
"악!"
공을 굴리려다가 삐끗해서 다리가 선을 넘어서 구를 뻔했다.
내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서니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아아아아!"
수진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가 본인이 굴린 볼링공이 똥통에 빠져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저러면 스트라이크가 아무 의미도 없지.
수진이는 스트라이크를 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다치진 않았고?"
끄덕.
"잘~ 봤다 수진아."
"큭..."
수진이는 제법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곤 고개를 휙 하고 돌려서 볼링공을 닦기 시작했다.
그놈의 승부욕은 데이트에서는 접어뒀으면 좋겠는데.
수진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다시 공을 잡고 볼을 굴렸다.
3번째 프레임은 좌우에 1개씩 핀이 남은 어정쩡한 스페어였다.
"아아아..."
수진이는 꽤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남은 핀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건 제법 힘들겠네.
수진이는 터벅터벅 걸어들어와 다시 볼을 잡고 굴렸는데 안타깝게 1핀을 넘어뜨리는 거로 만족해야겠다.
"이거 내가 이기겠는데?"
"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니까."
우리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볼링을 했다.
수진이는 놀랍게도 이번 라인에 2번의 스트라이크를 쳤다.
하지만 스트라이크만 나왔다 하면 다음 볼에서 파울이 되는 바람에 좋은 점수도 얻지 못하고 결국 100점을 넘기지 못했다.
"분명히 동영상으로 본 것처럼 했는데..."
또 유튭이라도 보고 오셨나 보네.
볼링을 치자고 하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유튭 영상을 보다가 생각이라도 났나 보다.
나는 투덜거리는 수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이기긴 했네."
"1번은 졌으니까 무승부죠."
"이겼으면 됐지. 저번에는 나보다 못했잖아."
그래. 결국, 수진이가 이기긴 이겼다.
2세트의 게임을 했는데 1세트는 내가 이겼는데 2세트에선 5프레임에서 갑자기 똥통으로 자꾸 빠져버리는 바람에 수진이에게 져버렸다.
"하아~ 그래도 재밌었다. 으읏!"
수진이는 기지개를 켜고는 빌려온 볼링화를 벗고 신발로 갈아 신었다.
"자, 가요."
"그래."
수진이가 한 손에는 볼링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우리는 그렇게 바퀴벌레 같은 커플이 되어 볼링화를 반납하고 볼링장에서 나왔다.
수진이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내 팔을 당겼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 아직 시간 많아."
"어?"
본인도 본인이 서두르고 있었는지 잘 몰랐나 보다.
내가 지적을 해주자 그제야 본인이 제법 신이 나서 서두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간지럽혀줬다.
"아흣."
...제법 섹시한 소리를 내는구나.
수진이도 본인이 낸 소리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화가 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하고 찔러왔다.
"하하."
"우이씨!"
귀여운 녀석.
우리는 길을 걸으며 티격태격 장난을 쳤다.
"점심 뭐로 먹을까요?"
"수진이가 먹고 싶은 거로."
"아무거나는 안 되죠?"
"그래."
"음~ 그럼 초밥!"
"그래 그럼."
이제 5월이 지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아무래도 날것을 먹긴 부담스러우니 지금이라도 즐겨야지.
나와 수진이는 손을 잡고 근처의 초밥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안내를 받은 다음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시간을 확인해봤다.
아직 정오니 한참은 더 놀 수 있겠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글쎄요. 아무 데나 괜찮아요?"
"고럼."
"그럼~ 노래방!"
"그러든지."
"어?"
아무래도 수진이는 내가 노래방을 싫어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히죽 하면서 장난치는 듯한 느낌으로 말을 걸어왔는데 간다고 하니 제법 당황한 눈치다.
"왜?"
"아, 아니요."
대학교 1학년 때는 나도 동아리에 가입해서 제법 재밌게 놀았다.
노래도 못 부르진 않을 거다.
요즘 아이돌들 노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노래들이 아니라면 무난하게 부를 수 있겠지.
음치라고 욕을 먹은 기억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볼링장에 노래방이라니 딱 수진이 나잇대의 아이들이 자주 갈법한 데이트 코스다.
다음에는 오락실이라도 가자고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수진이는 내 표정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노래 잘 부르세요?"
"남만큼은 부르겠지."
"하긴... 목소리가..."
"뭐라고?"
"아뇨. 암것도 아니에요."
"목소리가 좋다고?"
"다 들었잖아!!!"
수진이가 카악! 하며 화를 낸다.
귀여운 녀석.
수진이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수진이를 알고 있다.
이젠 마냥 당하지는 않습니다. 수진 씨.
수진이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목덜미가 살짝 붉어진 듯 보였다.
오랜만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기승위를 하는 당찬 여자가 돼버렸는데 이런 모습도 가끔 그립단 말이지.
낮에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데 밤에는 정액을 쥐어짜 내는 서큐버스가 되는 여자.
이수진.
내가 연신 히죽거리는 게 맘에 들지 않았는지 수진이가 신발로 정강이를 살짝 툭 하고 쳐왔다.
이 이상 놀리면 안 될 것 같다.
때마침 주문한 메뉴도 나왔겠다 여기까지 해야지.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방금까지 있었던 조금 새콤달콤한 공기를 날려버리고 밥을 먹었다.
"맛있네요."
"그러게."
수진이는 이런 점이 참 좋다.
금방 기분 전환이 되는 점이나 본인이 언짢으면 그렇다는 티를 내서 내가 어떻게 접해야 할지 쉽게 알려주는 점.
보통의 여자들은 본인이 기분이 나쁘면 왜 나빠졌는지 알려주지 않고 혼자 꿍해져서 남자한테 틱틱거리며 왜 본인이 화가 났는지 알아줬으면 하고 몰라주면 섭섭해 한다.
남자들이 감정노동이니 감정소비니 하며 연애를 극혐하는 이유가 이곳에서 온다.
하지만 수진이는 그런 점이 없다.
쌓아두더라도 한방에 터뜨리지 혼자 뚱해져서 몇 날 며칠 사람을 볶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기특한 여자.
행복하다.
"왜 그래요?"
"수진이랑 만나서 행복해서."
"치. 물어볼 때마다 매번 그렇게 대답하시네."
"진짠데."
"네~ 네~"
건성으로 답변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씰룩이는데.
나는 그 점을 지적하진 않고 마저 식사를 마쳤다.
저 모습을 지적하면 나중엔 고쳐올지도 모르니까 냅둬야지.
언제까지고 약간은 허당끼가 있는 수진이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진짜 자신 있어요? 나중에 무르기 없기~"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
수진이는 내 팔을 잡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울적해질 때마다 노래를 부르러 오는 노래방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거리 두기니 뭐니 해서 망한 거 아니야?"
"설마요..."
종종 있는 일이라서 웃음이 안 나오네.
요즘 자영업자들은 정말 많이들 망했으니까.
다행히 우리가 가려는 가게는 망하지 않은 모양이다.
"휴~"
수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내 팔을 붙잡은 상태에서 가게로 들어갔다.
우리는 체온을 재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고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날까요?"
"글쎄? 백신이라도 다 맞아야 끝나겠지."
"휴우... 진짜 우울하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는 게?"
"자꾸 그러면 오늘 밤엔 그냥 잘 거야."
"미안해."
치사한 녀석.
카운터에서 알려준 번호가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노래방은 세월이 흘러도 별로 변하지는 않는구나.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자리에 앉아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나는 수진이의 옆에 앉았다.
"자요. 먼저 하세요."
"이럴 땐 가자고 한 사람이 먼저 한 곡 뽑는 게 예의 아닐까?"
"쫄?"
이 자식이.
그래. 해주자.
나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책을 손으로 집어 펼쳤다.
내가 그러고 있으려니 옆에서 수진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왜?"
"요즘 애들은 노래방에서 책으로 안 찾아요."
"너 요즘 애들이랑 노래방 안가잖아?"
"우씨!"
쿡 쿡 쿡 쿡.
제법 감정이 실린 손가락 연속 찌르기가 옆구리를 연속으로 찔러온다.
간지럽고 제법 아파서 몸이 움츠러든다.
"미안해, 미안."
"빨리 선곡하시죠. 틀딱 꼰대 아저씨!"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나는 투덜거리는 수진이를 옆에 앉혀놓고 노래를 불렀다.
한때 카페에서 많이 흘러나오던 노래.
멜로망스의 선물.
한 번쯤은 수진이를 옆에 앉혀놓고 불러주고 싶었다.
내 인생에 찾아온 고마운 선물이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수진이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수진이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미동도 안 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별론가. 아니면 좋아서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나는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끝까지 다 불렀다.
그렇게 곡이 끝나고 나서 내가 마이크를 내려놓자 수진이는 정신을 차린 듯 몸을 한번 움찔 떨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땠어?"
"..."
수진이가 쑥스러운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
"잘 불렀다고?"
"다 들었으면서 왜 자꾸 물어봐요!"
"수진이가 귀여워서."
수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너도 불러."
"칫."
수진이는 리모컨으로 노래를 예약하며 자꾸 나를 힐끔거렸다.
"왜?"
"정말 양파 같은 사람이야."
"싫어?"
"누가 싫대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온다.
귀여운 녀석.
나는 수진이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수진이는 제법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 이래서 커플들이 노래방에서 사고를 치는구나.
나는 약간 어두운 노래방의 조명 속에서 수진이의 호수같이 깊고 맑은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앵두같이 먹음직스러운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고 혀를 밀어 넣었다.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섞이는 혀.
1분 정도 차분히 혀를 섞고 입을 뗐다.
수진이는 제법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오늘의 데이트는 조금 일찍 끝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