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9)
5월 5일 어린이날.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진이는 간밤에 많이 피곤했는지 곤히 잠들어 있다.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서 부엌에 섰다.
올해부터 수진이의 생일은 내가 챙겨줘야 한다.
하지만 그게 귀찮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으니까.
수진이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고 아침에 부담스럽지 않을 반찬들을 만든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가게 준비해야지.
요리하며 떠올리는 것은 작년의 어린이날이었다.
수진이가 던진 떡밥을 제대로 물어버려서 룰루랄라 한 기분으로 데이트를 나갔었지.
우리의 첫 데이트의 날.
수진이는 그저 나라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인지 궁금해서 데이트했다고 했지.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의 심정을 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수진이의 모든 행동이 연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수진이에겐 장모님을 제외하면 정말 오랜만에 웃으면서 같이 대화도 하고 밥도 먹는 상대를 만난 거다.
은연중에 즐거움이 묻어나왔으리라 생각한다.
뭐, 이유야 어쨌든 그때 수진이에게 반쯤 차였으니까 이런 관계가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수진이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는 그 생각이 지금의 관계를 만들었다.
잘했다 김준수.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날 수진이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지.
매일이 이렇게 행복하고 즐겁다.
연애든 결혼이든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 온다고 하지만 우리 사이엔 그런 게 없을 것 같다.
수진이는 나란 인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안다.
그런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여자다.
서로에게 미칠 듯이 끌리는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사라지진 않겠지.
스윽.
갑자기 내 등을 끌어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느껴진다.
수진이다.
"일어났어?"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어서 씻고 와."
수진이는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약 5초 정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고마워요."
"너도 내 생일 때 이렇게 챙겨줬잖아. 이제부턴 장모님 대신 매해 내가 챙겨줘야지."
"후훗. 역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라니까."
수진이는 내 어깨를 손으로 짚고 내 볼에 뽀뽀를 해준 다음 화장실로 들어갔다.
요즘은 요리할 줄 아는 여자도 드물어서 요리하는 여자도 대세야.
3월 말에는 수진이가 내 생일을 직접 챙겨주었다.
비싼 양복 한 벌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만들어주었지.
누군가에게 생일상을 받은 게 오랜만이라 굉장히 기뻤다.
수진이는 내가 보인 반응이 굉장히 맘에 들었는지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꽃받침을 한 채 내가 굉장히 맛있다는 듯이 밥을 먹으니 그렇게 맛있느냐고 물으며 웃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지.
사람들이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 싶었다.
식사준비가 거의 끝나갈 때 쯤 수진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밥상을 다 차리면 딱 자리에 앉을 것 같다.
나는 수진이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마무리를 했다.
약 5분의 시간이 지나고 수진이가 방에서 나왔다.
"와~ 맛있겠다!"
"많이 먹어."
"이제 결혼식이니까 조금 먹어야죠."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말랐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결혼식 당일에 웨딩드레스가 몸에 안 맞을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야밤에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살도 안 찔 거 같은데.
"아침부터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좀 보지 말아요. 변태야~"
"어케 알았지?"
"찔러본 건데요. 하여튼 진짜 변태라니까~"
지난밤에 내 위에 올라타서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던 여자가 이제 와서 변태취급이라니 어이가 없구만.
수진이는 로데오 하면 잘할 거 같아.
"오늘은 계속 집에 있는 거죠?"
"그렇지. 빨간 날은 주식시장도 쉬니까."
"전업투자자 다 되셨네."
"그럼 어째. 소설보다 주식이 더 버는데."
내 소설은 50화가 넘은 시점에서 유료화를 했다.
선작은 4천 명에 구매수는 500명 정도로 첫 유료작 치고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처음엔 그냥 정판으로 하려다가 세태와의 야합을 통해 이세계를 섞은 게 효과가 있긴 했는지 독자의 나이 층도 다양한 편이었다.
뭐 500명이 읽는 소설은 사실 실패한 소설이다.
글먹을 하려면 편당 1천 명 정도의 구매가 있어야지만 생계유지가 가능하다.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가 연중 하는 이유는 별것 없지.
돈이 되지 않으니까.
내 글이 재밌다고 읽으라며 리뷰를 하는 독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부분이 그 부분이었다.
입맛만 맞으면 맛있게 먹는 소설인데 구매수가 너무 딸려서 연중 때릴 것 같다는 것.
나는 그 글을 보고 공지로 연중은 없을 것이란 글을 썼다.
솔직히 소설로 버는 금액이 너무 적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주식이 너무 잘나가고 있었으니까.
"사람 일이란 게 진짜 모르는 일이에요. 전 선생님이 언제 원금 까먹고 그만둘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럴 거 같았어. 근데 이게 되네?"
준범이의 말로는 전염병이 세계를 휩쓰니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했고 미국이 돈을 찍어내니까 다른 나라도 돈을 찍어내서 경제를 돌린 게 첫 번째 이유라고 했다.
그다음엔 부동산값이 너무 올라서 갭투자가 안되니 주식이나 비트코인으로 몰린 거고.
젊은 세대들에게 이제 주식이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으니 안 갈 수가 없다나.
"지금이라도 많이 벌어둬야지. 22년 겨울엔 다 팔아야 할 거 같으니까."
23년부턴 주식처분이익에도 양도세의 개념을 도입해서 세금을 매긴다고 한다.
수익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는 것이 세법의 기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웃기는 놈들이지.
그럼 자동차나 집을 소유할 때 보유세라는 항목으로 세금을 걷는 건 위헌인가?
주식을 하다 보니 알겠다.
세상엔 참 돈을 빼가는 구석이 많구나.
준범이가 왜 그리 정치인을 욕하는지 알겠다 싶다니까.
"그럼 그땐 글먹하셔야 겠네요."
"글도 경험이니 그때쯤이면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수진이는 좀 더 많은 사람이 내 소설을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재밌게 잘 쓰는데 아쉽다고 말이다.
500명이나 사서 보는 소설이면 재미가 없지는 않을 거야.
결국은 경험이다.
쓰다 보면 언젠가 많은 사람이 재밌다고 느낄만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겠지.
"오늘 뭐 하고 놀까요?"
"시험은 다 끝났고?"
"내일이랑 모레에 한 과목씩 남았는데 오늘은 없어요."
"그럼 오랜만에 데이트나 갈까?"
"정말요?"
"그럼."
수진이는 웃으면서 씩씩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데이트가 제법 오랜만이기는 했다.
둘 다 기본적으로 집에서 지내는 스타일이니까.
그래도 봄인데 좀 집 밖으로 나가서 놀기도 하고 그래야지.
"어디로 갈까요?"
"가고 싶은데는 있어?"
"음~ 볼링장!"
"볼링장?"
"저번엔 졌으니까 이번엔 이길 거에요."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떤 옷으로 입고 갈까~"
힐끔.
나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들으라는 듯이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귀여운 녀석.
수진이가 사 놓은 옷들은 다 여성스러운 옷들이라 뭘 입든 어울린다.
아니. 청바지를 입어도 섹시한게 수진이다.
뭘 입든지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짧은 치마는 피해야겠지. 자칫 속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다.
아마 이게 결혼 전에 하는 마지막 데이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대한 즐겁고 알차게 보내야지.
"얼른 먹자."
"네~"
우리는 서둘러서 식사를 마쳤다.
***
우리가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9시였다.
아침을 7시 반에 먹기 시작해서 8시에 설거지까지 마쳤는데 준비에 한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수진이는 12월이 지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본인의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 바르며 화장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성과가 있긴 했는지 화장은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여고생일 때도 나름대로 화장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판이 좋아서 기초화장만 했는데도 그런 느낌이 나왔던 거였다.
본격적으로 화장하니 훨씬 미인이 되었다.
"그렇게 찍어 발라도 땀나면 다 번질 거 같은데?"
"후흥~ 이거 방수 화장이야!"
"아직 한발 남았나?"
"풉! 아하하하!"
수진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굉장히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오늘은 오랜만에 데이트하니까 기분이 좋은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자주 밖으로 외출도 하고 그러는 건데 잘못하고 있었네.
"수진아."
"왜요?"
"종종 데이트하자."
"응?"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다가 일단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를 낳더라도 나이를 먹더라도 이렇게 데이트를 하자 수진아.
보통의 부부는 결혼한 다음에는 데이트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이를 우선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게 가정이라는 것이니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거지.
하지만 데이트를 한다니까 저렇게 전신으로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수진이를 보니 도저히 그렇게는 못 살 것 같다.
어차피 우리는 직업적으로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아이를 우선하긴 할 거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밤잠을 설치고 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서로를 상처입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돈이 있으니 보모를 고용해서 수면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아이가 자라면 가끔은 우리 둘만 이렇게 손을 잡고 외출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수진이는 성인이 되었어도 아직 어리다.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수진이는 아직 20대다.
보통이라면 30대 초반까지 데이트하며 청춘을 즐겼을 나이다.
나를 만나서 후에 그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수진이 생각."
"완전 선수라니까."
내 옆구리를 툭 하고 치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수진이.
10년 후도 20년 후도 그리고 80년 후도 이 미소를 계속 바라보고 싶다.
나는 수진이와 맞잡은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수진이도 그걸 느꼈는지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발걸음도 씩씩하게 데이트를 나섰다.
결혼 전의 마지막 데이트.
즐거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