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7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8) (157/301)



〈 157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8)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수진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주중엔 준범이의 집에서 주식을 배우는 시간이다.


이렇게 수진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니 꼭 직장에 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새댁 같은 느낌이라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 된다.

예쁜 마누라와 밤새 섹스를 하고 일어나면 모닝 키스를 하며 침대에서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고 같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이게 인생이다.

아, 테스형~ 이게 인생이지.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아 준범이의 집에 도착했다.

시간은 곧 8시 30분이 된다.


자, 그럼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해 봅시다.


***

준범이의 집에서 주식을 배우다가 4시가 되면 집으로 향한다.

오전에만 가르쳐준다던 녀석인데 내가 제법  따라오니 신이 났는지 이것저것 알려준다며 예정에도 없던 추가 교습도 시켜주는 녀석이다.

나는 집 앞에 도착하면 초인종을 누른다.

그러면 수진이가 인터폰으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직접 문을 열어준다.


"어서 와요 여보~"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한번 힘껏 끌어안아 온다.


처음엔 그냥 장난이었다.


전자도어락을 직접 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면 수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처음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2번째부턴 오히려 이런 식으로 문을 직접 열어주며 몸을 꼬옥 끌어안아 줬다.

그다음엔 평범하게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더니 수진이가 왜 그냥 들어왔냐고 다시 나가라고 해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수진이는 이 신혼 놀이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해야 하려나.

약 10초가 지난 다음 수진이는 내가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와줬다.


"안 귀찮아?"

"음~ 귀찮아요!"

솔직한 녀석.

내가 그런데 왜 이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수진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선생님이 이런 거 할 때마다 좋아하니까요."

내가 그랬다고?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지만 이런 걸로   있을 리가 없지.

신선한 기분이긴 했는데 수진이 눈엔 내가 기뻐 보였나 보다.


"귀찮으면 안 해도 되니까 무리하진 말자."

"네~"

"뭐 하고 있었어?"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럴 거 같았어."

"치. 그럴 거면  물어봐요?"


"그냥."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고 옷을 갈아입었다.

수진이는 내 외투를 행거에 걸어주었다.


나는 수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손과 발을 씻은 다음 곧장 노트북을 꺼내 들고 수진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 주말이 올 때까지 청첩장에 넣을 문구를 생각해야 한다.

"선생님 진짜 진심이세요?"


"그런 청첩장을 받으면 재밌을  같지 않아?"

"그거야 뭐, 그렇긴 한데..."


수진이는 사뭇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씻으면 5시가 된다.

일일연재도 해야 하는데 집안일도 하고 그러니 저번처럼 컨디션을 망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괜찮아. 그렇게  피곤해."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별로 피곤하진 않다.


수진이가 옆에 있으니 밥도 먹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해서 이전처럼 컨디션을 망칠 일도 없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도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다 보니 글을 씀에 있어 막힘도 없다.


청첩장도 19명에게 쓴다고 하니 많아 보일 뿐이지 19명 분량을 다 합쳐도 소설 1편 정도의 분량 밖에 안 나온다.

그러니 그런 걱정하는 표정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진이는 웃는 표정이 제일 예쁘니까.

수진이는 한차례 나를 바라봤다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계속 안 하고 이렇게 놀아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30분 후에는 저녁준비 해야 해서 손에  잡혀요. 빨리 써보세요."

"알았어 알았어."


역시 처음 떠오르는 녀석은 준범이지.


이 녀석에겐 그동안 많이 신세를 졌고 지금도 지는 중이다.

뭐, 서로 알 만큼 아는 사이니 적당히 써도 되겠지.


나는 수진이를 잠깐 바라봤다가 문구를 적어나갔다.

사랑은 한순간이지만 우정은 영원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우리지만

나는 2번이나 그 말을 어기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미안합니다.

쓸쓸히  약속을 지키고 있는 그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작은 인연을 하나의 운명으로 엮는 우리를 축하해주세요.

"선생님 지금 청첩장으로 시비 거는 거에요?"

"이 정도면 충분해."


수진이는 어이가 없는지 작게 웃으면서 내가  문장을 바라본다.


그래. 굳이 있어 보이는 문장을  필요는 없다.


친구들에겐 딱 이 정도로 정중한 문장인 듯 정중하지 않은 문장을 보내는 게 더 재밌게 느껴질 거다.

평범한 사람들이 받으면 이게 뭔가 싶은 내용이라도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들이라면 분명 닿겠지.


나는 한명, 한명 친구들에게 보낼 청첩장 문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우에겐 이번 설날엔 떡국을 먹으며 나이만 먹지 않고 눈칫밥도  먹었느냐는 문구를 준석이에겐 회장님을 모시기엔 비좁지만 찾아와 달라는 내용을 준호에겐 70만 원짜리 축의금을 기대한다는 내용 등등.

19명분의 청첩장이었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술술 나왔다.


수진이는 내가 쓰는 청첩장의 문구가 재밌었는지 옆에서 웃으면서 내가 쓰는 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인한 강사님한텐 안 보내요? 친하셨잖아요?"

"아, 그러네."

인한 강사도 우릴 축하해줄 것 같으니 보내는  맞는 것 같다.

인한 강사에겐 좀 고민을 해서 보내야겠는데...

인한 강사를 제외한 19명에게 보낼 청첩장 문구를 쓰는 데는 1시간이 조금  돼서 끝이 났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수진이는 서둘러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도 책상을 정리하고 앞치마를 두른  수진이의 옆에 섰다.

"피곤하실 텐데 쉬셔도 돼요."

"됐어. 그러다 보면 나중에  사람만 하게 된다고. 그리고 너도 공부하느라 피곤하잖아."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맙지.

내가 피곤할까  배려해주는  마음씨가 고맙다.


"아, 그러고 보니 장모님이랑 처남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지인이요?"

"어."

"외가 쪽에 엄마랑 가장 친한 이모 한 분이랑 오라비 친구 중에 가장 친한 2명이 오기로 했어요."

"그래?"

생각보다 더 적게 오는구나.


수진이와 웨딩 촬영을 하는 순간엔 뒤에 40줄만 가득하겠네.

수진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내 코를 손으로 콕하고 찌른다.

"또또또또! 지금 불쌍하다고 생각했죠?"


"..."

"흥! 전 괜찮거든요?"

수진이가 살짝 토라진  같은 목소리로 낸다.

귀여운 녀석.


그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이 이상은 실례지.

식사 준비를 마치고 한자리에 앉아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밥을 먹는다.

"어때요?"


수진이는 본인이 끓인 김치찌개의 맛을 물어왔다.


요리를 제법 잘하는 수진이었지만 김치찌개는 조금 달랐다.


수진이네 집은 시중에서 파는 김치를 사서 먹었고 나는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김치를 먹는다.

그러니 같은 재료를 넣어서 요리해도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약간 미묘한 맛이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됐다.

"맛있어. 시집가도 되겠네."

"그게 뭐예요."

수진이는 작게 웃으면서 제법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 남았네요."


"그러게."

오늘은 4월 26일.

결혼식은 5월 29일이니 이제 약 1달이 남았다.


4월 26일... 그러고 보니 이번 주부터 수진이의 시험 기간이었는데.

"시험은  봤어?"


수진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망치냐는 눈빛을 보내온다.

"내일부터 시험이에요."

"힘내."

시험이 끝나면 여러 가지로 바쁜 5월이다.

수진이의 생일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결혼식이 있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도 있으니 그때  쉬면 된다.

***

4월 30일 금요일.

나는 준범이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일찍 퇴근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면서 동시에 수진이의 생일이다.


백화점에 들러서 수진이의 생일선물을 사야지.


수진이는 내 생일에 오더메이드 양복을 맞춰줬다.


평소엔 낭비하지 말라고 하면서 옷을 살 때만큼은 FLEX하는 수진이.

나에겐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무리를 안 하나.

받았으면 돌려줘야지.


"찾으시는  있으세요?"

마스크를 낀 점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그리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물용 목걸이를 찾는다고 전했다.

수진이가 입는 옷 중에는 제법 대담한 옷들이 있다.

어깨나 가슴 부근이 드러나는 옷들.


데이트를 할 때 종종 입어주는데 가슴께가 허전해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나는 수진이가 자주 입는 옷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신중하게 목걸이를 비교했다.

솔직히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단 말이지.

나는 점원에게 요즘 20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목걸이를 알려달라고 전했다.

점원은 나를 잠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른 목걸이들을 보여줬다.

...쯧.

목걸이들은 방금까지 보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 심플한 디자인이 많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나는 그중에서 가격이 조금 나가는 목걸이를 골라서 포장을 부탁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간다.


...알고는 있다.


30대로 보이는 사람이 20대에게 선물할 목걸이를 찾는다고 하면 의아하긴 하겠지.


내가 사실은 40대고 딸에게 선물하는 거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내가 30 초반이고 20대 후반인 사람을 20대로 부르는 거로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궁금하긴  거다.


세상의 시선이란 이런 법이지.


그러니 우리의 관계를 축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

"어서 와요 여보~"


수진이는 오늘도 신혼 놀이를 하며 나를 반겨줬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맴돌던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수진이가 곁에 있으면 항상 봄인 것 같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시험 언제야?"

"1시에 이미 하나 쳐서 끝났어요."


"그래? 다행이네. 잘 봤고?"


"공부한 범위에서 나와서 잘  거 같아요. 결과야 나와봐야 알죠."

"잘 봤겠네."

수진이는 머리가 좋으니 공부한 범위에서 나왔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손발을 씻고 수진이가 앉아있는 소파에 같이 앉았다.

수진이는 뭔지 잘 모르는 예능을 보며 작게 웃고 있다.

예능은 몇 번을 봐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수진이도 내가 예능에 별로 재미를 못 느낀다는 걸 알아서 이젠 같이 보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같이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그게 좋은 모양이다.


내 왼손에 깍지를 껴오는 수진이.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고 있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어주고 나서 휴대폰을 꺼내서 웹소설을 읽었다.


웹소설이 이런 점은 좋네.


"선생님."


"응?"


"고마워요."

"엉?"


"선물 사오셨죠?"

움찔.

"어? 정말 사오셨나 보네?"


수진이가 선생님은 정말 알기 쉽네요~ 하면서 작게 웃는다.


요망한 녀석.


나는 수진이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꺄아~"

수진이는 간드러진 비명을 지르면서 소파에 쓰러졌다.

수진이 앞에서는 비밀이고 뭐고 없을 것 같다.


이젠 나보다 나를  아는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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