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2)
수진이는 말을 꺼내면 곧바로 이행하는 여자였다.
며칠 전에 같이 게임이라도 해보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땐 결국 내 뒤에서 내가 게임을 하는 거만 지켜보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데스크톱을 배달음식 정하듯이 휙 하고 사버린 걸 보면 말이다.
"이거 사양이나 그런 건 어떻게 했어?"
"그냥 고성능 게임 돌아가는 사양으로 올라온 거 대충 하나 집어서 샀어요."
"아,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돈이 많으니 그래픽카드는 이게 가성비가 좋으니 CPU는 이게 좋으니 메인보드는 어쩌니 하며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을 생략하고 고사양 게임이 돌아가는 컴퓨터를 기준으로 그냥 돈을 주고 사버리면 된다.
"이제 여긴 서재가 아니고 PC방으로 써야겠다."
"그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데스크톱은 서재에 넣어뒀는데 내 옆자리에 수진이의 컴퓨터까지 두니까 이젠 PC방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데스크톱을 다 설치해주니 수진이가 작게 웃으면서 어깨를 주물러준다.
"고마워요. 여보~ 힘드셨죠?"
"됐어. 자, 필요한 것들 이것저것 깔아야지."
"네~"
"또 노트북처럼 바탕화면에 파일들 막 설치하지 말고."
"네~"
수진이는 컴퓨터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이것저것 설치했다.
도중에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도와줘서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소모했다.
"후우~ 이제 다 됐나. 자 가르쳐주세요."
수진이는 배그를 사고 나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연습장이 추가되었으니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럼 한번 해볼까요?"
"그러자."
우리는 나란히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가 게임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고 수진이는 오늘 처음으로 게임을 한 거여서 결과가 좋길 바라면 양심이 없는 거지.
수진이는 죽을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지만 오기가 있어서 몇 번이고 게임을 돌렸다.
"아!!! 진짜 이건 아까웠는데..."
5판째에 탑 10에 들어가서 제법 상황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수진이는 헤드셋을 벗고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위이잉.
휴대폰이 울려서 확인해보니 준범이다.
`오랜만에 배그하냐? 같이 콜?`
`나 수진이랑 같이 듀오 중인데.`
`애미. 부인이 게임같이 해준다고? 미쳤네...`
`그런가?`
`게임 같이해주는 여자라면 결혼할만하지. 뭐 듀오라면 걍 둘이 해라.`
`스쿼드라도 하면 되잖아?`
`운용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서 어려워서 못해. ㅅㄱ하셈.`
`오냐.`
`이사는 다 했고?`
`ㅇㅇ`
`그럼 나중에 집들이나 함 간다.`
`오냐.`
"누구예요?"
"준범이. 나중에 집들이 온대."
수진이는 내 컴퓨터의 마우스를 움직여 준비 버튼을 누르고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정말로 지기 싫은 모양이다.
우리는 그대로 2판을 더하게 되었지만 결국 탑10에 들어간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수진이는 인상을 쓰며 다들 너무 잘한다며 총기 반동이 너무 세서 안 맞는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재미없다고 안 한다는 소리를 하진 않았다.
게임을 한 지 2시간이 넘었다는 걸 확인해서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오려고 하니 책장에 꽂힌 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해보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수진이도 이제 신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수진아."
"네."
"다음 신작에 대해서 생각한 건 있어?"
"아뇨. 아직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서요. 선생님은 뭐 있어요?"
"나? 뭐 그냥 생각해본 게 있기는 한데."
나는 수진이에게 지난번에 생각해뒀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수진이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선생님이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하시는 거 같아요."
"응?"
수진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공이 남자였는데 여자로 환생하는 TS물을 쓰는 거 별로라고요."
"그래? 갤에서는 언급이 많이 되던데."
장갤에선 항상 TS떡밥이 돌고 있어서 적당히만 쓰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많은 사람이 TS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TS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글을 많이 써서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아."
"그냥 무난한 거로 해보세요."
기성 작가의 조언 감사합니다.
난 TS물로 쓰면 좋은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지.
글먹 분충의 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
3월이 되어 수진이의 대학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대학교가 인터넷 강의를 하는 만큼 수진이가 집에서 나가는 일도 없었고 백수가 되어버린 내가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다.
그저 일상에 수진이가 강의를 듣는 시간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게 대학생의 생활이 맞아요?"
인강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는 수진이.
강의에 집중이 안 되는지 소파에 앉아있는 내 어깨에 기대서 칭얼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대학 생활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한 모양이다.
"대학 생활이 어떨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일단은요. 가방에 넣어도 되는데 굳이 손에 전공 서적을 들고 캠퍼스를 걷고 바로 옆에 조금 싼 카페가 있는데 굳이 비싼 메이커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강의실에 들고 들어가고..."
수진이는 웹툰에서 본 듯한 전형적인 캠퍼스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웹툰에 나오는 여대생이 딱 저런 느낌이긴 하지.
그러다가 남자와 만나서 이리저리 꼬이다가 서로를 이성으로 보게 되며 사귀게 되는데 여자 주변에는 남자가 하나 더 나타나서 삼각관계가 되는 게 주류다.
수진이는 한참을 대학교에 대해서 묘사하기 시작했다.
두루뭉술 한 것부터 생각보다 상세한 것까지 묘사하는 게 정말 많이 알아본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벗어나서 새 출발을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니 답답한 걸지도 모른다.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대학 생활이라고 다 그런 것도 아니야."
"선생님은 어떠셨는데요?"
"나? 뭐 별건 없었지. 그냥 OT를 가서 몇몇 애들이랑 친해지고 MT를 가서 몇몇 그룹이랑 알게 되고 동아리에 들어서 같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지."
"참고로 동아리는 어디였어요?"
"그냥 문예 창작하는 동아리였어. 모여서 글을 쓰기도 하고 독서를 하기도 했는데 술 마시며 놀았던 시간이 더 긴 것 같기도 하고. 1학년이 끝나고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는 알바로 바빠서 갈 일도 없었고."
"선생님도 평범한 대학생활은 못 해본 거네요?"
그렇게 말하며 동질감이라도 느꼈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그래도 난 1학년 때 같이 밥 먹으면서 어울릴 사람들이 10명은 넘었어.
한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수진이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학에 생각보다 많은 기대를 품고 있는 모습인데 이걸 어찌 해야 하나 모르겠다.
한 5분쯤 시간이 지났으려나.
역시 오리엔테이션이라 그런지 강의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이라 그리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은 없었다.
수진이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진이가 자세를 숙이고 있으니 헐렁한 상의에서 힐끔힐끔 가슴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방비한 녀석.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수진이를 품에 안아서 내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리고는 수진이의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고 가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처음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 서서히 목덜미가 빨개지며 달뜬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살짝씩 비비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변태."
그렇게 말하면서도 생각보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추고 천천히 소파로 쓰러졌다.
***
3월 중순이 되어 나와 수진이는 더욱 분주해졌다.
5월 29일에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웨딩 촬영부터 예식장을 준비하고 하객을 부르기 위한 초청장을 준비해야 하니 생각보다 빠듯한 일정이었다.
"5월 말고 10월로 연기해도 되는데."
우리의 원래 예정은 5월이었다.
하지만 5월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해보니 하객들이 다 내 지인뿐이다.
수진이의 지인 쪽으로 올 만한 사람이 없다.
아니, 처남의 친한 친구 몇 명이 온다고는 하는데 그건 처남 지인이지 수진이 지인도 아니잖아...
나와 수진이가 웨딩 촬영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주변에는 나와 내 친구들.
곧 40이 가까운 아저씨, 아줌마들이 가득하다.
거기에 수진이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다.
적어도 몇 명 지인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2학기가 인강이 아니라도 친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결혼식을 한다고 부르면 부담스러워서 안 올 거 같은 데요. 그리고 별로 상관없어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전 결혼식도 안 하고 그냥 혼인신고만 하고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쉽지 않아?"
"축하해줄 사람도 없는데 상관없어요."
수진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 말엔 조금 씁쓸한 감정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수진이의 말대로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결혼식에 찾아와서 축하해주기란 어려워 보였다.
"하객 알바라도 불러?"
"됐어요. 그리고 10월에 축하해줄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전 5월에 할거에요."
"왜?"
수진이는 작게 웃으며 내 볼을 손으로 쿡쿡 찔러왔다.
"선생님이랑 하루라도 빨리 부부가 되고 싶으니까요."
귀여운 녀석.
나는 수진이를 한번 안아주고 나서 예식장을 찾아봤다.
내 쪽은 고향 친구들이나 부모님 정도로 끝이다.
재혼이니 굳이 부모님의 지인분들을 부를 생각도 없다.
많아 봐야 30을 안 넘는다.
수진이는 처남이랑 장모님의 아는 몇 명만 온다고 했으니 다 합쳐서 50명이 안 될 거다.
스몰 웨딩으로 찾아보면 되겠지.
그래도 웨딩 촬영은 되도록 좋은 곳에서 하는 거로 하자.
웨딩드레스는 입어보고 판단하는 거로 해야지.
처음엔 웨딩드레스를 한 벌 사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가격도 비싼데 신부 체형에 바뀔 때마다 수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년 입기도 불편하고 세탁이나 보관도 어렵다고 한다.
수진이도 그럴 바에야 그 돈으로 여행이나 몇 번 더 다니며 사진이나 찍는 게 이득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신혼 여행지는 역시 제주도밖에 없겠지?"
"지금은 여러모로 위험하니까요. 어쩔 수 없죠."
예식장을 정하고 나면 청첩장을 준비해야 한다.
"청첩장은 모바일로 많이들 하던데 그건 어때요?"
"청첩장을 종이로 직접 건네주고 모바일로 한 번 더 보내는 건 몰라도 모바일로만 보내는 건 좀 아니지."
"그래요?"
"내가 꼰대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피곤한 일인데 모바일로 청첩장 하나 보내놓고 축의금까지 놓고 가라고 하면 미안하잖아.
"그래도 역시 돌싱남이라 편하네요?"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