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5)
수진이와 둘이 부엌에 서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처남은 자느라 아침을 거른다고 하고 장모님은 오프라서 집에 계시니 3인분의 식사만 준비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혼자 준비하려고 했더니 수진이가 손님이 차려준 아침 식사라니 상식적으로 아닌 거 같다며 내 옆에 서서 준비를 도왔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아무튼 수진이가 옆에 있느니 즐겁다.
"간 좀 보세요. 자 앙~"
"앙."
수진이는 국을 수저로 떠서 후후 불고는 나한테 내밀었다.
딱 내가 좋아하는 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맛있다고 해줬다.
요리를 잘하는 아내는 이것만으로 행복하다.
요즘 젊은 애들은 요리를 못 한다고 하는데 요리 못 하는 여자랑 결혼할 젊은 친구들이 안쓰러워지는 순간이다.
간밤에 힘을 내고 지쳐서 잠들었는데 아내가 먼저 일어나서 밥을 차려주고 밥 먹으라고 부드럽게 깨워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일을 끝내고 퇴근했는데 아내가 웃으면서 고생했다고 반기며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 등등.
요리를 잘하는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결혼할 이유로 충분하다.
거기에 얼굴이 예쁘고 성격이 좋고 머리도 좋은데 돈도 잘 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뭔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수진이가 나의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콕콕 찌르며 울어온다.
"수진이 생각."
"그런데 이렇게 인상을 써요?"
수진이의 표정이 약간 불만이 섞인 표정으로 바뀌어 간다.
나는 수진이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우리 새댁 수진이 보지에 지금 당장 자지를 쑤시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네."
파밧!
수진이가 깜짝 놀라서는 나한테서 두 걸음 멀어졌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듣는 사람이 없는지 눈치를 본다.
짜식. 아침에 내 자지를 가지고 놀고 도망친 답례다.
수진이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상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선생님 집에 갈까요?"
제법 뜨거워진 시선으로 올려다보는데 이건 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매우 유쾌하다는 표정으로 수진이를 바라봤다.
수진이는 내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침 먹으면 부천이나 다녀오려고."
전화로는 안 되겠다. 역시 직접 찾아봬야겠어.
"큭!"
수진이가 얼굴을 팍 찡그리고 내 엉덩이를 손으로 꼬집어왔다.
"악!"
설마 옆구리도 아니고 엉덩이를 꼬집을 줄은 몰랐네.
아파서 팔짝 뛰어오르고 뭐라고 하려는데 거실에 나오신 장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흠... 흠흠."
장모님은 작게 헛기침을 하시더니 모르는 척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댁의 따님은 남자 엉덩이를 꼬집는 여자입니다.
수진이도 상황이 무안해졌는지 입술만 삐죽 내밀고 냄비만 휘젓고 있다.
미안. 그래도 장모님이 12월 31일 끝나면 멋대로 하라고 했으니 그때 하자고.
그리고 성욕보단 지금 당장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내 일을 저질러도 책임질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먼치킨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갑자기 큰돈을 벌게 된 것도 준범이 덕이고 쓰던 소설을 완결까지 무사히 쓴 것도 수진이의 도움 덕분이었다.
책을 제본하기 위해 일러스트를 구했을 때도 준호가 친구라는 이유로 다른 일정보다 우선해서 그려줬기 때문에 올해가 끝나기 전에 책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잘 쓴 소설이라도 읽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수진이가 부모님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지 않으셨으면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먼치킨이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글먹 분충을 희망하는 하꼬 분충이었을 뿐이지.
그래. 어쩌면 현실이란 건 이런 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먼치킨이 유행하는 것이지.
나처럼 피곤한 인간이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면 독자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래. 다음 소설은 정말로 주인공이 먼치킨인 걸로 쓰자.
가령 주인공이 천마인데 동자공을 단련해서 강해진 거였고 와이프가 주인공이 고자 새끼라서 이혼하자고 집을 뛰쳐나가는 거지.
위, 아래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동자공으로 익힌 내공이 몸에서 급격하게 빠져나가고 주화입마에 빠져서 죽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이세계로 환생하면 어떨까.
제목은 천마님 이혼하셨다! 정도로 하면 되려나.
...이런 건 무협이 아니야! 같은 댓글이 달릴듯한 느낌이다.
이세계로 가는 무협이 먼저 떠오르다니 역시 목향의 영향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면 차라리 목향처럼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것도 괜찮겠다.
도입부는 비슷한데 귀족 영애로 전생하고 깝치는 돼지 새끼나 거지 같은 약혼자를 주먹으로 다스리는 사이다물을 써도 좋을 것 같다.
대충 배경으론 금지옥엽으로 자란 영애가 고위 귀족의 압박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거지.
돼지새끼랑 초야를 치르려는 도중에 천마가 빙의하고 돼지 새끼의 멱을 따버리고 풍비박산을 내버리는 거다.
천마는 좋구나.
그냥 대충 천마만 넣어도 주인공이 먼치킨에 짱 세다고 표현해도 아무도 태클도 안 걸겠어.
천마싸대기, 천마무소유(불알깨기) 등등. 바리에이션도 풍부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침을 준비했다.
***
"""잘 먹겠습니다."""
나와 수진이 그리고 장모님이 앉은 식탁.
결국, 처남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장모님은 깐깐해 보이셨는데 은근히 그런 쪽으로는 너그러운 모양이다.
내가 처남의 방을 곁눈질하고 있으려니 장모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냥 두려고요."
"아..."
역시 장모님은 굉장히 좋은 어머니였다.
그러니 수진이가 이렇게 예쁘고 착하게 잘 컸지. 처남은 잘 모르겠고.
"오라비가 또 게임한다고 시끄럽게 해서 못 잔 거 아니에요?"
"아냐. 잘 잤어."
수진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보인다.
빨려 들어갈 듯 촉촉하다. 역시 수진이랑 한지 오래돼서 그런지 수진이가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크흠."
장모님이 보기 불편하셨는지 헛기침을 하시고 물을 마시고선 손으로 부채질하신다.
"수진아?"
"..."
수진이는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밥을 깨작이기 시작했다.
장모님이 앞에 있어도 이젠 나밖에 안 보인다는 걸까?
하나하나 사랑스러워서 볼 때마다 보지에 질내사정 해주고 싶다.
...역시 자위로 물이라도 빼야 했나. 자꾸 미친 생각이 드네.
내가 번뇌에 괴로워하고 있으려니 나를 바라보시던 장모님이 천천히 입을 여셨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네?"
"결혼식이라든지..."
"아."
나는 수진이를 잠깐 바라봤다.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라는 느낌이다.
나는 장모님께 저번에 수진이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꺼냈다.
수진이의 생일이 지나고 5월에 식을 올리고 싶다는 이야기.
어머님은 나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조금 아니 상당히 구체적인 이야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설마 성진이보다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는데... 엄마랑 살겠다더니 못된 계집 같으니."
"아 왜 그래~ 어차피 주에 한 번은 올 거야."
"왜 그렇게 자주와. 김서방 피곤하게."
"여보~ 그래도 되용?"
"수진이가 하고 싶은 거 다해."
"꺄앙~"
수진이는 내 팔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비벼왔다.
"지랄하네 지랄을 해."
어머님은 기가 막히신 지 한숨을 쉬시고는 묵묵히 식사하셨다.
하지만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역시 수진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수진이가 떠나서 외로우시다면 자주 찾아봬 면 되지.
어차피 멀리 갈 일도 없고 서울에 살고 있으니 언제든지 올 수 있다.
"그래서 선생님 언제 가실 거에요?"
"음? 아, 아침 다 먹으면 가야지."
"응? 김서방 벌써 가려고요?"
"네. 오랜만에 친가 좀 다녀오려고요."
"그럼 그러세요."
내가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수진이가 매우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 이것아."
"힝."
"쓰읍! 이수진, 안 된다면 안돼!"
"칫!"
아무래도 따라오고 싶었나 보다.
수진이를 데려가면 좋아하실 것 같긴 한데 이번에는 혼자 가는 게 나을듯싶다.
수진이가 곁에 있으면 수진이를 찾게 된다.
아버지에게 전할 말이 있다.
미안하다고.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고작 그 몇 마디의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은 당당하게 내 손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김서방. 다음에 또 봐요."
"네. 장모님."
"여보~ 나중에 봐요."
여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집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수진이가 빌려준 에코백이 있다.
부모님이 모아뒀던 나의 상장.
휴대폰을 꺼냈다.
나는 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전화가 연결됐다.
`준수냐.`
"예. 접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오늘 점심 전까지 잠깐 집에 좀 들릴게요."
`그래.`
뚝.
전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화는 언제나 용건만 간단히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제는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니까.
자식을 위해서 환갑이 넘은 몸으로 10살이나 넘게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릴 정도로 나를 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도 어른이 될 시간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어른다운 행동을 해서야 비로소 어른이라 불리는 것이지.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어렵더라도 할 수 있다. 이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니까.
몸에 스며드는 한기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걸어나갔다.
얼굴과 머리는 한겨울의 찬바람에 차가워졌지만, 몸은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주차된 차에 올라타서 히터를 켜고 부천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하면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아버지랑은 1주일에 제대로 된 대화를 10분 이상 나눠본 기억이 없다.
어떤 이야기로 말을 꺼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내 소설을 읽으셨나? 수진이의 부탁이라고 해도 소설이라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조금 부자연스러운데.
그럼 내가 부모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았다는 걸 텐데.
...조금은 자제해서 쓸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