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3)
전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그동안 꾸준한 식사와 운동으로 몸은 이전으로 돌아왔다.
머리도 눈썹도 수염도 코털도 깔끔해.
옷은 내가 가진 양복 중에서도 가장 비싼 걸 꺼내입었다.
넥타이는 수진이가 사준 것 중에 저번에 하고 간 게 아닌 쪽의 넥타이를 했다.
수진이가 사준 지갑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주머니에 넣고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추운 한기가 몸으로 파고든다.
나는 서둘러서 차에 올라타고 히터를 틀었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나 추웠다.
액셀을 밟고 거리로 나왔지만, 이상할 정도로 거리에 사람은 적었다.
원래라면 이브라고 바퀴벌레 같은 커플들이 기어 나올 거리인데 역시 상황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아, 벌써 수진이의 집 앞이다.
후우. 진정하자.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그러니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만나자.
초인종을 누르니 인터폰에 수진이의 얼굴이 보인다.
작게 웃으면서 바로 문을 열어준다.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후끈한 기온이 몸에 스며든 한기를 녹여준다.
집안은 조금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기온이었다.
역시 수진이는 추위를 많이 타는지 방 온도를 높게 설정하나 보다.
현재 시각은 4시.
저녁이라기엔 이르고 점심이라기엔 너무나 많이 지난 시간.
웃으면서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건 아니시겠지.
나는 선행하는 수진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이 식탁에 앉아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입을 여셨다.
"네. 안녕하세요."
적어도 문전박대는 안 당할 분위기다.
아니, 초대해놓고 문전박대를 하면 싸이코겠지.
문전박대라고 하니까 갑자기 준범이 놈이 했던 개소리가 떠올라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입술을 깨물어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상황이 매우 어렵게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
"수진아. 잠깐 안에 들어가 있어."
"어~"
수진이는 엄마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봤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어머님은 나를 바라보며 "다방 커피면 되나요?" 라고 물으시며 식탁으로 자리를 권했다.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내 소설이 그 정도로 효과가 좋았나?
그래. 진심을 담으면 어느 정도 통하기는 하는 법이지.
내심 안심을 하며 어머님이 내 앞에 놓아준 커피를 한입 마셨다.
따뜻한 기온이 몸 전체로 퍼져간다.
지금 내 몸이 한겨울인데도 따스한 봄날의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방의 온도나 커피의 따뜻함 때문만은 아니겠지.
내가 기대를 하며 어머님을 바라보자 어머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시는 도중이었다.
이런... 너무 방심했나.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렇게 저돌적인 분인지는 몰랐네요. 책까지 만들어서 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네."
"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읽기도 싫었고요. 수진이가 제발 좀 읽어달라고 사정사정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알아서 잘 먹고 잘살라고 제 딴에는 최대의 양보를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듣더군요."
"..."
"그래도 그렇지 부모님을 부르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네?"
여기서 부모님이 왜 나와?
"..."
"..."
"하아... 이수진, 이 년이."
"하...하하."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천천히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본다.
수진이의 부모님 이야기는 아닐 거고 어머님의 부모님 이야기도 아니니 우리 부모님 이야기겠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으셨는데 설마 수진이가 우리 부모님을 소환한 거냐?
머리가... 머리가 아프다.
"준수 씨 부모님이 찾아오셔서는 제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소설을 꼭 읽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어르신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니 도저히 안 보겠다고는 말을 못하겠어서 물어봤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저는 이미 둘이 결혼하는 것에 아무런 참견을 안 하겠다고. 둘이 살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고요."
어머님은 격해진 감정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진정시키시곤 다시 입을 여셨다.
"아버님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시더군요. 열심히 키워온 자식에게 상처를 줘서 죄송하다고. 우리 아이가 나이가 많은데 염치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니 돌아가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다고?
"다 본인 잘못이라며 고개를 숙이시더군요. 아비가 못나서 상처만 줬다고. 당신이 너무 고생하셔서 아이만큼은 책상에 앉아서 편하게 살길 바라셨답니다. 알아서 잘하길래 참견을 않았더니 속으로 많이 앓고 있었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피했더니 너무 몹쓸 짓을 했다며 본인 잘못이라고 계속 그러시더군요."
그렇게 말씀하신 어머님은 식탁에 무언가를 올려두셨다.
식탁에 올라온 건 내가 지금까지 성적 상을 받았거나 백일장 등에서 입상해서 받았던 상장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준수 씨가 자랑스러우셨답니다. 당신이랑 다르게 머리가 좋아서 항상 자랑이셨다고. 그래서 준수 씨가 배를 굶주릴지도 모를 일한다는 게 화가 나서 몹쓸 짓을 하셨답니다. 그러니 지금 벌을 받고 계시다고 하시더군요. 준수 씨가 평생 당신을 원망할 짓을 하셨다고. 그래도 자식이니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뭔가 가슴속에서 퍼져나가 얼굴 위로 올라오는 이 무언가가 작은 자극에 툭 터져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준수 씨가 쓴 소설을 읽어보면 알 거라고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소설만이라도 읽어달라고 하시더군요. 준수 씨에겐 꼭 수진이가 필요하다고. 염치가 없지만, 너무나 죄송하지만 제발 읽어보고 결정하라며 고개를 숙이셔서 저도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입술을 꽈악 깨문다.
방심하면 무언가가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참기 힘들었다.
"소설 잘 봤습니다. 솔직히 이 나이에 이런 연애소설을 읽으니 뭔가... 간질간질해서 보기 힘들더군요. 그래도 잘 알겠습니다. 준수 씨가 수진이를 장난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수진이가 선생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도."
나는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르고 어머님을 바라봤다.
어머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이렇게 좋아 죽는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데 부모가 돼서 반대하는 것도... 뭔가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약속해 주시겠어요?"
"네."
내가 조건도 듣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쉬시며 천천히 입을 여셨다.
"저보다 오래 살고 수진이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외롭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생각보다 쉬운 일들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저보다 좋은 남자는 밤하늘의 별만큼 있을 겁니다. 외모도 좋고 머리도 좋고 돈도 많은... 주변 사람들이 누구나 결혼을 부러워할 만한 남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하지만 수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120살까지 살면서 수진이 입에서 저와 만나서 행복했다는 말만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약 2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려고 하니 어머님이 나직이 중얼거리셨다.
"여고생이랑 선을 넘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못 미더운데..."
뜨끔.
나는 경련이 이는 얼굴로 천천히 어머님을 바라봤다.
어머님은 도저히 40대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에 수진이 같은 짓궂은 표정을 띄우고선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식은땀을 흘리며 누군가 이 상황을 타개해주길 빌었다.
"진짜로 돌발적인 상황엔 약하신가 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웃음소리를 내신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크리스마스는 어디 나갈 생각 말고 여기서 가족파티나 하죠. 아셨죠, 선생님?"
뜨끔.
나는 수진이와 많이 닮은 얼굴로 입만 웃고 있고 눈은 노려보는 재주를 선보이시는 어머님께 감히 크리스마스에 연인과 떡을 치고 싶다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내가 딱딱하게 굳어서 어버버하고 있으려니 어머님이 추가타를 날리셨다.
"12월도 1주일 남았으니 1주일 후엔 뭐라고 안 할게요. 됐죠?"
내 맘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장모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그러지 마세요. 갑자기 나이 먹은 거 같으니까.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요?"
"그럼?"
"누나라고 부르세요."
"...누나?"
"그걸 또 하시네."
"..."
나를 바라보며 히죽이는 장모님이 보인다.
찍소리도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고 있다.
수진아 도와줘...
내가 마음속으로 수진이에게 구조신호를 보낸 것이 통한 것인지 수진이와 처남이 방에서 나왔다.
수진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처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우 개쩌네. 내가 딴 남자보다 부족할 순 있어도 널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 캬! 시발 좆된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이성진! 엄마가 집에서 욕 쓰면 용돈 안 준다고 했지."
"아~ 여사님! 이건 감탄사야! 욕이 아니라고!"
처남과 장모님이 티격태격하며 말을 주고받는데 수진이가 천천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나에게 다가와 몸을 딱 붙이더니 나를 올려다본다.
"사랑해요. 선생님."
황홀하다는 표정이 어울릴 정도로 뜨거운 눈빛을 보내온다.
나는 그 시선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수진이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였더니 어디선가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크흠."
티격태격하던 장모님과 처남이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남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이었고 장모님은 조금 많이 당황한 표정이셨다.
수진이가 어머님 앞에서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셨겠지.
"웨엑..."
처남이 헛구역질하며 인상을 쓰고 있으려니 수진이도 인상을 쓰며 처남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남이 수진이의 말투를 따라 하며 도망치면 수진이가 얼굴이 빨개져선 처남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수진이의 집은 편모 가정이라기엔 너무나 따스했다.
"이것들이 지금 손님이 오셨는데...이수진! 이성진!"
나는 난장판이 된 수진이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어머님이 타주신 커피를 마저 마셨다.
식탁에는 어머님이 올려두신 내 상장들이 가득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이렇게 많은 성적 상을 받았었구나.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오긴 한 모양이다.
상장들은 하나같이 깔끔했다.
오래된 종이들은 습기를 머금거나 곰팡이가 설기 마련인데 이것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신경을 써서 관리한 느낌이 난다.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구나... 말이라도 해주시지.
그러니 그렇게 화를 내셨던 거였나.
자식이 배를 굶주리고 산다는데 찬성하는 부모가 더 이상할지도 모르지.
오늘따라 눈물샘이 약해진 기분이다.
나는 상장들을 정리해서 식탁 한 구석으로 치웠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집에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
"선생님 뭐 하세요?"
한참 뛰어다니던 수진이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이제 선생님이 아니고 여보인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에 얼굴을 비벼온다.
귀여운 녀석.
그래. 나와 수진이는 이제 가족이 된다.
부모 공인의 부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