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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2) (139/301)



〈 139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2)

준호는 수진이의 사진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어떤 구도로 일러스트를 그릴지 상담해왔다.


원래 이 과정에서 작가와 일러레 사이의 이미지 차이가 발생해서 원하지 않는 일러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이야기하며 상담하니 그럴 일은 없겠다.

일러는 당연히 수진이가 나오도록 기준으로 잡는 것으로 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의자에 앉아있고 니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상태로 그려서 니 뒤통수만 나오게 그린다고?"

"어. 그런 느낌."


"그리고 이 아이가 작가니까 노트북을 켜고 커피도 옆에 한잔 두고?"

"그래. 근데 자꾸  아이, 이 아이 하지 마. 뭔가 범죄적인 냄새가 나는 거 같으니."

"그럼 제수씨로 부른다."


"제, 제수씨..."

수진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곱씹고 있다.

살짝 발그레한 표정을 보이는 데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준호가 그걸 보더니 "허..." 소리를 내며 손을 놀린다.


아무래도 지금 지은 표정이 환쟁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모양이다.

나는 준호에게 2가지 일러를 부탁했다.


정면 표지에 쓰일 수진이의 모습과  뒷부분에 쓰일 우리의 머그컵을 그려달라고.


물론 필명은 바꿔야만 했다.


소설 속의 히로인인 수진이도 남성향 판타지가 아닌 로판을 쓰는 작가로 바꾸었기에 소소한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큰 틀을 바꾸지는 않았다.

"자 그럼 이렇게 한다?"


"그래, 잘 부탁한다."


"오키. 나는 딸내미가 기다리니까 빨리 가야겠다."

"고마워."

"돈 받고 하는데 뭘, 야 가자."

"야 좆병신아"

"뭐가?"

"잘 먹고 잘 싸라."


"미친 새끼가 빨리 안 꺼져?"

"이응 이응."

준범이는 끝까지 헛소리를 내뱉고는 준호를 따라 집에서 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식탁에 엎드렸다.

지난밤에 너무 고생해서 솔직히 온종일 잠만 자고 싶은 기분이다.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한번 쉬고 뭔가를 하는 듯하더니 내 앞에 컵을 내밀었다.

"드세요."


아무래도 꿀물을 타준 모양이다.

수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꿀물을 마셨다.

조금은 몸에 기운이 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진이는 나보고  거면 방에서 자라는 이야기를 꺼내곤 대충 정리된 방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방을 정리하는 뒷모습을 보려니 남편이 말도 없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난장판을 만든 걸 치우는 와이프가 이런 느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그래도 친구놈들은 다 가정이 있으니까 오늘만 그럴 거야.

어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놀랐는지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고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킨다.

"일어나서  먹어요."

"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식탁으로 가려다가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많이 퍼마신 다음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아이콜이 뿜뿜하며 나는  지독한 냄새다.


수진이는 잘도 이런 나한테 뽀뽀를 하는구나.

몸이  찝찝해서 수진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고 곧바로 몸부터 씻었다.


머리로 따뜻한 물을 맞으며 앞으로의 대해서 생각해봤다.


이제 내 주변에서 나와 수진이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은 사람은 어머님뿐이다.

어머님만 설득하면 더는 수진이와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왔어, 김준수.


준호가 최대한 빨리 표지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될 수 있으면 이번 해가 끝나기 전까지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싶다.


이제 써야 하는 부분은 내가 어머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장면이다.

소설의 마무리는 어머님께 우리의 관계를 허락받는 것으로 정해뒀다.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빠르게 몸을 씻고 나갔더니 수진이가 밥을  차려놓았다.

술을 마신 날 걱정했는지 북엇국을 끓인 모양이다.

이런 세세한 배려심이 더욱 그녀에게 빠져들게 한다.

"잘 먹겠습니다."


"..."


내가 인사를 건네고 밥을 먹으려니까 수진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왜?"


"술."


"응?"


수진이는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20살까지 살려면 술, 담배 금지."


"..."

"아셨어요?"

"넵..."

아무래도 휴대폰 관리, 사정 관리까지 당했는데 술, 담배 관리까지 당할 모양이다.


숨이 턱 막히는구나.

장수란 게 이렇게 힘든 거였어.

"...맥주 정도는 가끔 마셔도 허락해줄게요."

"고맙다..."


"태식아?"

"잘 아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그래. 어차피 술도 잘 못 마시는데 그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그래도 지금까지 자유롭게 하던 걸 타인이 못하게 하니 좀 아쉽다.


헬조선의 여고생 와이프는 관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평소보다 힘없이 밥을 먹었다.

***


공부가 끝난 수진이는 굉장히 편해 보였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 옆에서 기웃거리면서 장난을 쳐왔다.

정신이 사나워서 글이 안 써진다고 노려보면 "수진이 때릴꼬얌?" 하면서 도망친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이상한  배워왔는지...

또래답다면 또래 다운데 말이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수진이가 가져온 노트북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할  없으면 내가 쓴 소설 퇴고나 해라."

"네? 저 월억킥인데요? 지금 저보고 퇴고하라고요?"

"안 할 거면 여기서 팬티 내리고  자지에 보지나 끼워주던지."

"..."

수진이가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져서 노트북을 켰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해라.

요즘 수진이랑 섹스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불알이 묵직한 기분이 들어서 미칠 거 같으니까.


나는 수진이를 내버려두고 소설을 썼다.


2주 만에 소설을 마무리 짓고 준호한테 표지를 받은 다음 책 제본을 끝내야 한다.

다행히도 요즘은 돈만 있으면 인터넷으로도 쉽게 제본을 할 수가 있다.

어차피  책은 팔려고 만드는 게 아니니까 돈도 많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수진이의 어머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생하는 강준수를 열심히 묘사했다.

이렇게 괴로워할 정도로 수진이를 원한다는 감정이 묻어나게 공을 들였다.

독자들이 고구마라고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사이다패스며 먼치킨 물이 유행이니까.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수진이가 또 살금살금 내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확 뒤를 돌아보고 수진이를 덮쳐서 번쩍 안아 올렸다.

"꺄아아아악!"


수진이가 간드러진 소리와 함께 작게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진이도 나와 그렇고 그런 상황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진이와 섹스를 하면 모처럼 잡은 감정선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나는 기대를 하는 수진이를 침대에 살짝 던지듯이 내려놨다.

"꺅!"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허벅지를 비비면서 유혹을 해온다.

아으 시발... 개꼴리네.

나는 아주 잠깐의 번뇌를 떨쳐내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자새끼!"


"..."


"조루!"


"..."

"...이제 저한테 질렸어요?"


"..."

"아이 씨..."

나는 수진이가 삐져서 침대에 누워서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주가 지나자 준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 그렸는데 일단 아니다 싶으면 어디가 문제인지 말  해줘.`


"오키."


나는 준호와 통화를 하며 준호가 보내준 이미지를 확인했다.

완벽했다. 수진이와 비슷하면서도 수진이와는 미묘하게 달라서 고칠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네. 이걸로 할게. 계좌는 나중에 불러줘라."


`이거 그냥 축의금 대신으로 해도 되는데?`


"됐어. 너도 딸내미가 있는데 벌 수 있을 때 벌어둬라."


`고맙다... 태식아...`

"시발 그거 언제까지 써먹을래?"


`나 한번 밖에 안 썼는데...`


이제 삽화를 얻었으니  제본을 끝내면 된다.

솔직히 어머님께 허락받는 부분은 완전히 상상의 영역이었기에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가득 찬 내용을 넣었을 뿐이다.

나는 책 제본을 해주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직접 상담전화를 걸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를 받았다.

수십, 수백 권이면 몰라도 수권이면 금방 끝낼 수 있단다. 직접 방문을 하면 바로 가능한 모양이다.

나는 직접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전화를 끊었다.


많이도 필요 없다.

나와 수진이, 어머님을 위해 3권의 책만 만들면 된다.


세상에 단 3권밖에 없는 소설책이라니 뭔가 낭만적인 듯한 느낌도 들고 좋다.


이 정도면 솔직히 어머님도 허락해주시겠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된다고 하면 뭐, 진짜로 병원에 찾아가서 결혼 허락해달라고 조르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수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부터 소설을 만들러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수진이는 나에게 `화이팅!`이라며 응원을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속마음으로 화이팅을 외치며  소설과 표지가 담긴 USB를 챙기고 차를 몰았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

수진이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과연 수진이와 만나지 않은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으려나.

아마 이혼소송을 거쳐서 돈을 최대한 받아냈겠지.

그리고 준범이 덕에 큰돈을 벌게 되어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겠지.

전셋집은 주변 시세가  올랐으니 집주인이 나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집을 나와서 갈 곳을 찾아야 하긴 하겠지.


하지만 학원 근방에 집값이 싼 곳은 없었다.


이곳도 월세 80을 받지만, 원래는 더 받아야 하는 곳이다.


집주인의 자녀가 내년에 살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때까지 짧게 살 사람을 구한다고 월세를 조금 싸게 내놓은 것이다.

살인적인 월세.


그렇다고 다른 방은 물은  나올지 의심스러운 고시원 분위기의 방들뿐이었다.

아마 만수 형에게 부탁해서 그 근처에서 다시 학원에 다니지 않았을까?

그 대신 지금 사는 월세방에서 잠깐 살게 되겠지.

그 넓은 방에서 혼자서 밥을 먹고 씻고 학원에 다니는 것이다.

삭막하다.


다른 사람에게 상대적 박탈을 느끼게 만들었던 돈을 손에 넣었는데도 상상 속의 나는 너무나 지루하고 삭막하게 느껴졌다.


역시 수진이가 없으면  되는 모양이다.

나는 꼰대다.

인터넷에선 결혼하지 마 씹새끼들아 같은 글이 유행하지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외롭다.

그렇다고 TV를 보는 취미도 없다. 집안은 영원히 조용할 것이다.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날은 오지 않겠지.


...수진이에게   잘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고 있으려니 네비게이션이 목적지 주변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나는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대고 내렸다.


나는 들고온 USB를 손에 꽉 쥐고 천천히 건물로 들어갔다.


책이 만들어지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수진이의 집 앞으로 찾아와 수진이를 부르고 책을 건네줬다.

"그럼 이제부턴 저한테 맡기세요!"


"그래,  부탁해."


"네!"


수진이는 2권의 책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젠 정말로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초조하게 수진이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12월 24일.


나는 수진이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어머님이 할 말이 있으니 집으로 오라고 했다는 그 말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은 과연 우리의 관계를 허락해주실까.

나의 이야기는 어머님께 닿았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난, 수진이가 최고라고 말해준 내 소설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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