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7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9) (137/301)



〈 137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9)

"다, 다녀오겠습니다..."

수진이가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은 채 집을 나섰다.


오늘은 수능 하루 전의 예비소집일이었다.

수험표도 확인하고 시험장소도 확인하고 필기구랑 전자기기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손목시계도 확인하더니 집을 나섰다.

나서기 전에 나를 살짝 돌아보고는 왼손을 들어 보인다.

"선생님.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수능은 시간 배분이 중요하다. 그러니 손목시계라도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수진이에겐 아날로그 시계가 없어 보여서 급하게 백화점에 가서  왔다.

수진이는 지갑을 사줬는데 다 큰 어른이 소설이 선물이야! 하고 퉁치기에는 뭔가 모양이 나빴으니 답례의 생각이었다.

수진이는 내가 준 선물을 보더니 볼이 빨개져서는 "이러다가 서울대도 가겠다... 히힛." 하며 연신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옆에서  모습을 바라보는 처남의 표정은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이 미친년이 지랄병이 도졌구만 어디서 귀척이냐?!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수진이가 나가자 집이 아주 조용해졌다.


처남은 새벽까지 휴대폰을 만지다가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골며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비록 처남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이젠 수진이가 잠시 집을 비우는 것만으로도 외로운 지경이 된 모양이다.


새로운 병이다. 이수진 의존증.
수진이가 근처에 없으면 몸에 힘이 나지 않는다.


나는 잡생각을 지우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4편씩 쓰던 소설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3편, 2편으로 줄여나갔다.


몇몇 독자들은 아쉬움을 표했으나 이전보다 나아진 문체를 반기는 독자도 많았다.


처음엔 선작이 400명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500명에 도달한 소설.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도 500명은 흐뭇하게 생각하며 읽어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최근화의 코멘트들을 살펴봤다.

최근화는 집에 수진이가 와 있는 상태에서 이다정 강사가 찾아와서 평소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수진이에게 들킨 장면이다.


많은 독자가 주인공이 개빡통에 병신새끼니 저게 어떻게 오지랖이니 하며 악플을 달았다.


캐릭터의 지능의 한계 = 작가의 능지라며 조리돌림까지 당했다.

역시... 수진이의 분노는 정당한 일이었나 보다.

나는 내 행동을 반성하며 이야기에 살을 덧붙였다.


이다정 강사.


그녀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니 그녀에게 감사와 나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이렇게 늙은 아저씨를 좋아하기엔 그녀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쓰고 싶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


그저 자세가 너무 구부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일이든 취미든 너무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기에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 자세가 그녀 나름의 처세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성격이 좋았기에 남들에게 상처받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녀가 조금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워 앞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이고 다니다니 그건 너무한 거 아닌가?

여고생이랑 섹스를 한 38살 아저씨도 어깨를 펴고 다니는 데 말이다.

이다정 강사는 미인이다.

어깨를 펴고 너무 긴 앞머리를 정리하면 남학생들은 첫사랑으로 끙끙대고 여학생들은 질투로 눈이 멀 정도로 미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면목은 외모만이 아니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유약해 보이는 외견과는 심지가 굳은 성격.

그리고 머리가 좋은데도 그걸 자랑하지 않는 겸손함.


그녀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마땅히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한 심정을 이야기에 녹여냈다.

내가 멋대로 그녀를 이야기에 등장시켰으니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이야기를 쓰고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처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처남. 밥은 먹을 거야?"


"예?  벌써 점심이네. 뭐 시켜드실 거에요? 피자나 치킨 괜찮으세요?"


"집밥으로 하지."

"예?"


처남은 아무래도 수진이가 요리하는 모습만 봐서 내가 요리를 못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늦잠을 자느라 아침은 거르고 점심을 먹고 저녁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내 방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니 밥은 전부 수진이가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집에서 지낸 지 거의 1주일인데 이제 와서 눈치채는 것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적당히 국이랑 고기반찬 그리고 밑반찬을 꺼내 처남을 불렀다.

"아... 정말로 직접 하셨던 거였구나."


처남은 내가 만든 음식의 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답게 밥을 먹는 속도가 나와 비슷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나는 처남의 앞에 과일을 놔주고 설거지를 했다.


처남은 과일을 먹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요."

"응?"

"수진이가  형님한테 반했는지 대충 알  같기도 하네요."


"그래?"


"네. 아마도 응석 부리고 싶은 상대가 필요했나 보죠."

그렇게 말하면서 길게 하품을 한다.


처남... 수진이가 나에게 응석 부리는 건 자주 있지만 나도 만만치 않아.

아니. 처음에는 오히려 내가 수진이에게 더욱 응석을 부리면 부렸지.

처남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내가 왜 수진이에게 반했는지 전부 설명까지 해줬을 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으면서 내가 해준 한끼식사에 납득을 하다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처남은 기분 좋게 후식도 챙겨 먹고 알아서 컵을 꺼내고 커피도  먹었다.

눈치는 있는지 K-헤밍웨이와 나는월억킥을 건드리진 않았다.

처남이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몸에 묻은 비말에 전염이 될 수도 있으니 철저하게 위생을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수진이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밥 주세요!"


아무래도 밥을 안 먹고 그냥 온 모양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앞에 밥을 차려주었다.

"선생님은  드세요?"

"처남이랑 먼저 먹었어."

"칫."


수진이는 짧게 혀를 차고는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처남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처남이 없었으면 본인을 기다리다가 같이 먹었을 텐데 처남 때문에 그렇게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처남에게 나와의 시간을 뺏겼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볼이 빵빵해진 수진이를 보고 작게 웃으며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봤다.

"뭐 하세요?"


그러자 수진이도 작게 웃으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달력을 확인했다.

수능 하루 전.

이제 수진이는 19년 인생의 마지막 시험을 보러 간다.


긴장도 많이  텐데 아침과는 다르게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수진이를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싱긋 웃는다.

"시계를 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우습게 느껴지더라고요?"

"뭐가?"


"어차피 시험 망쳐도 재수하면 그만이고 안가도 그만인데요 뭘. 평생 백수로 살아도  만큼 돈도 있는데."

"하하하..."

정말 당돌해서 뭐라 말도 못하겠다.


하긴. 그래도 되지.


수진이는 역시 수진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수진이는 본인이 먹은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식탁을 치우고는 소파에 누워있는 처남을 발로 걷어차고는 소파에 앉아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나는 수진이의 옆에 가서 앉았다.


수진이가 나의 어깨에 기대고는 작게 하품을 하였다.


"피곤해?"

"네. 밥을 먹어서 그런지 방이 따뜻해서 그런지 졸려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비빈다.

"옷 갈아입어. 잠깐 낮잠이라도 자면 좋아지겠지."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굉장히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공부하라는 말을  하시네요?"

"시험 하루 전날은 무리하는 것보다 몸이 편안한  더 중요하지. 그리고 니가 그랬잖아. 재수하든지 그냥 고졸로 살든 돈이 많아서 상관없다고."

"후훗."

수진이가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저년이 멀쩡한 사람 한 명 조져놨네. 엄마가 들으면 기겁을 하겠구만."


"응~ 용돈 반의반."

"..."

"용돈 반의반의 반"


"죄송합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처남의 용돈은 수진이가 관리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3인 가족의 생활비를 어머님 혼자서 버시는데 용돈을 넉넉히 받기는 힘들겠지.


처남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처남은 굉장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방 쪽을 슬쩍 쳐다봤다가 지갑에서 오만원권을 2장 꺼내서 처남에게 건네줬다.


"형님?"

본인의 손에 놓인 돈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더니 감동한 표정을 보인다.

남자가 그러지 마라. 징그럽다.

처남은 겸손이니 튕기니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수진이가 돌아와서 뭐라고 할까 봐 얼른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쑤셔 넣고 5초도 지나지 않아서 수진이가 방에서 나왔다.


처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신세를 졌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뭔가를 받았으면 뭔가를 돌려줘야 하는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처남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되어주겠지.

 10만원으로 그 정도 효과를 뽑아낼 수 있다면 명절마다 용돈을 챙겨줘도 이득이다.

어차피 처남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은 나와 수진이의 아이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지금이라도 즐기시게 처남.

수진이는 내 옆에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또래들을 보니 웃음이 나와서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데 처남은 이런 미친년! 같은 표정으로 수진이를 바라보며 기겁을 했다.

확실히 수진이가 정상적인 감성이 아니기는 하다.

그래도 나에겐 그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


이건 확실히 병인 것 같긴 하다.


우리는 그렇게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수진이가 아무 말이 없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으로 내일 시험에 대해서 생각하며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수진이의 고통과 노력이 보상받는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서.

***

그렇게 수능 당일이 되었다.


나는 아침 일찍 수진이와 처남을 차에 태우고 수능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망쳐도 되니까 긴장만 하지 마. 선생님이 먹여 살려줄게."

"풉!!!"

수진이는 빵 터져서는 아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더니 마스크를 썼다.

"선생님 이제 백수잖아요! 아하하하!"

그렇게 말하고는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백수가 무슨 소리에요?"


처남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아... 말을 안 했나?"

강준수가 되어 글을 쓸 때 글이 너무 써지지 않아서 하나, 둘씩 퇴로를 끊었었다.


만수 형에게 전화해서 강사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했던걸 없던 일로 해달라고 했다.

이제 정말로 날 백수다.


그래도... 그렇게 퇴로가 없어져서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남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짧게 들려줬다.

"와 씹상남자셨네... 저도 그거 읽어봐도 돼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집으로 차를 몰았다.

걱정은 없었다.

수진이는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벽초인 여고생이다.

그러니 수진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요리를 하고 기다리면 된다.

수진이에게 처음 해줬던 그 요리를 하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처남은 내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수진이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수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수진이는 웃으면서 가채점을 한 종이를 보여주었다.



뭐, 결과야 뻔하지.

수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역대 최고의 점수를 받아왔다.

내년 3월이면 내 후배가 될 정도로 고득점의 점수를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