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7)
"선생님~ 밥 다 됐어요~"
수진이가 부르는 소리에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돈하고 거실로 나갔다.
밑반찬을 해둔 게 없어서 식탁이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반찬이 푸짐했다.
30화가 넘는 분량의 소설을 읽을 때까지 왜 안 부르나 했는데 이걸 준비하느라 그런 모양이다.
계란찜이랑 감자조림, 미역국이랑 야채볶음.
내 몸을 생각해서 많이 기름진 음식은 뺀 모양이다.
그보다 미역국이라니 오랜만이다.
내가 미역국을 한창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빈혈 증상 있으신 거 같으니까 2그릇 드세요."
"어, 어..."
아무래도 내가 코피를 흘린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군소리 않고 미역국을 2그릇 먹기로 했다.
"잘 먹을게."
"네. 저도요."
수진이를 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글을 쓰는데 너무 열중해서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본 듯한 기분도 들고 어제 만난듯한 기분도 든다.
내 아리송한 표정을 봤을까 수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꼭꼭 씹어드세요."
"아니야. 그냥 수진이를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아서."
"치. 입만 살아가지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씰룩 씰룩거린다.
아무래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모양이다.
"오늘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오늘은 2편 써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만 예약으로 올려두고 쉴게."
"휴우... 잘 선택하셨어요."
수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내가 고집을 부릴까 봐 걱정을 했나 보다.
수진이 마망...
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 보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래. 수진이를 만난 이후부턴 이렇게 나이에 안 맞게 주책없는 인간이 되었다.
수진이 또래의 남자들처럼 철없이 행동했었다.
이게 지금의 김준수다.
답답하고 질척한 강준수는 이제 없다.
나에겐 냄새나고 텁텁한 담배 대신 카푸치노가 어울린다.
수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내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큰일이 나는 건 아닌지 입맛은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다.
나는 그 관심이 고맙기도 했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천천히 좀 먹어요!"
그렇게 약간 화를 내면서도 살포시 웃는 수진이의 모습에선 좀 전과는 달리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
저녁밥을 먹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수진이도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아직 자기에는 많이 이른 시간이다.
수진이는 내 체온을 느끼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부하려고?"
"네. 이제 진짜 코앞이니까요. 지금까지 이렇게 고생했는데 한 번에 붙어야죠."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식탁에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놓고 필기구를 손에 들었다.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슬쩍 수진이를 바라봤다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수진이는 공부하고 나는 글을 쓴다.
나는 한석봉이고 수진이는 마망인가?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써야 하는 부분은 수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질척한 감정을 드러낸 날이다.
전셋집에서 짐을 빼다가 수진이에게 내 부정을 들켰던 날.
물론 그 일을 전부 묘사할 수는 없다.
일단 전체 이용가로 쓰고 있는 글이니 성적 묘사는 빼야 한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나에게 품었던 감정을 최대한 섬세하고 또 한편으론 과격하게 표현해야 한다.
내가 혜정이의 부정을 깨달았을 땐 분노와 증오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미련이 만들어내는 감정.
하지만 수진이는 다르다. 수진이는 나와 헤어질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나의 부정을 눈치챈 것이다.
내가 유부남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나와 혜정이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란 것도 상상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혜정이가 집을 나갔다고 말해놓고 뒤에서는 섹스를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나는 메모장에 그녀에 대한 증오가 사그라지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었다.
그녀로서는 혹시 내가 자신을 버리고 혜정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내가 그녀에게 돌아갈까 봐 붙잡고 싶었겠지.
그러니 내 기억 속의 그녀를 지우기 위해 나와 그녀가 침실로 사용하던 방에서 나와 섹스를 했다.
섹스를 하는 내내 수진이는 혜정이를 그년이라거나 걸레 같은 더러운 말로 모욕했다.
내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을 일말의 미련조차 없애기 위해서.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내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 효과가 있었는지 난 그 침실에서 혜정이와 보냈던 신혼생활의 추억이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수진이의 신음과 질척하고 뜨거운 눈빛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 말.
내가 메모장에 적어뒀던 그 말은 결국 나란 남자는 타인으로 여기고 혈육인 아버지나 오빠를 생각하는 너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가 남남이기에 남녀관계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수진이가 했던 그 말은 다른 뜻이었다.
이제야 수진이가 했던 말의 뜻을 알겠다.
수진이는 내 입술에 난 상처를 넓히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나를 아프게 만들면서 자신이 느낀 아픔을 나에게도 느끼게 하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며 나의 피를 빨아 마셨던 그녀.
그래. 수진이는 그 순간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존재가 된 것이다.
몽마. 나를 유혹하는 수진이는 그 순간 나의 피를 빨아 마시고 나와 피의 맹약을 나눈 혈족이 되었다.
내 피가 흐르지 않는 타인 따위는 잊고 본인에게 열중하라는 말을 은근슬쩍 던져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에 압도되어 수진이가 던진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수진이가 왜 그렇게 질척한 감정을 폭발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수진이는 섬세하게 강준수는 어버버하는 어리숙함을 표현한다.
나는 순식간에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2편만 올려놓고 잘려고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3시간 만에 2편을 더 써내려 갔다.
수진이는 공부하다가 피곤했는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고 내가 또다시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는 것을 보다가 기겁을 했지만 평온한 표정으로 소설을 쓰는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이 자자고 하면 자는 거라며 나에게 경고를 했을 뿐이다.
나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이젠 소설을 쓰는 것이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나와 수진이의 이야기를 과시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우리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응원받아도 된다.
그렇게 응원받는 결혼을 하고 축복 속에서 나와 수진이의 아이를 기다리고 싶다.
수진이를 아주 많이 닮고 나를 조금만 닮은 아들, 딸을 키우며 수진이와 살아가고 싶다.
"누구게요?"
수진이가 내 등에 다가와 눈을 가리고는 귀에 그렇게 속삭여왔다.
아무래도 공부가 끝나고 자려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다.
어떤 말을 해야 수진이를 골려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음...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수진이."
스윽 스윽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다.
"헤헤..."
조금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참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도 이젠 이 행위가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전에는 여고생에게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게 왠지 자존심이 상했는데 이젠 그런 게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여고생이 부드러운 가슴으로 품어주며 머리를 만져주는 데 기분이 좋은 게 정상이지.
수진이가 내 몸에서 떨어져서 나의 등을 양손으로 밀기 시작한다.
나는 수진이의 손에 떠밀려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수진이는 나를 눕히고 본인도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온다.
나를 바라보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다.
이전에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수진이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전신에서 내가 좋아 죽겠다는 감정이 뿜뿜 뿜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꼭 펜스룰에 낚여 수진이를 향한 마음을 소설로 써내려 갔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주며 수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없는 어두운 방.
하지만 촉촉하게 젖은 그 눈만큼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수진이가 나의 입에 천천히 입을 맞추고는 내 가슴에 파고들어 온다.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에요."
"갑자기 왜 또 그래?"
가슴에 파고든 수진이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알몸 와이셔츠가 추운 계절이다.
그걸 의식했는지 집에서 잠옷까지 챙겨온 수진이.
핑크색의 귀여운 잠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은 커서 그 언밸런스함이 수컷의 본능을 자극하는 여자다.
하지만 그간 몸을 너무 혹사했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성욕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꼈는지 발기가 되진 않았다.
수진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구라고 믿었던 여자애들은 저를 헐뜯고 관심도 없던 남자애들은 저를 이해한다며 접근하고 아닌척 은근슬쩍 추잡한 시선을 보내고... 저는 신물이 났어요."
그날 들려주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내뱉으며 나의 몸에 얼굴을 묻어온다.
나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그리고 감춰두었던 추악함을 드러내고 있다.
수진이의 작게 떨리는 몸을 살짝 안아줬다.
수진이의 몸에서는 떨림이 멈추었고 잠시 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돈을 벌었어요. 처음엔 백만 원 남짓 다음엔 수백 그리고 수천... 그리고 알게 됐어요. 학교란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는 걸. 그렇다면 이미 돈을 버는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곳이라는 걸. 또래들이 우습게 보였어요. 부모 돈으로 학교에 다니는 멍청이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앞가림도 못 하는 것들이라고 무시하기로 했어요."
스윽 스윽.
나는 수진이의 말을 들으며 수진이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진이는 기분이 좋은지 작게 웃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선 남자들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고 그럴수록 여자들은 더욱 피곤하게 했어요. 그래서 질렸어요. 그냥 엄마랑 같이 살다가 개나 한 마리 기르고 그렇게 살려고 했어요."
나는 수진이가 안쓰럽게 느껴져서 천천히 안아줬다.
"그래도 좋았어요. 돈이 많아서 할 것도 많았고 소설 쓰는 것도 즐거웠으니까.
수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촉촉하고 뜨거운 눈빛이다.
"난... 혼자라도 좋았어요. 집밖에는 갈 곳이 없었어요. 어디를 가도 징그러운 시선과 헐뜯는 소리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집에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엄마라도 있어 주면, 그러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래도 좋았어요."
수진이의 뜨거운 숨이 내 얼굴에 닿는다.
수진이는 촉촉해진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나를 집에서 끄집어 냈으니까... 집 밖은 피곤해도 즐겁다는 걸 알려주고 이런 나라도 남들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꽈악
수진이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선생님이... 나를 40년간 방치해도 용서해줄게요. 원망하지 않을게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몸에서 작게 떨었다.
그녀에게서 두려움이 전해져온다.
내가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던 모습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러니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를 홀로 두고 싶지 않다.
"수진아."
"네..."
"선생님은 약속 함부로 안 해. 난 진짜로 120살까지 살 거야."
"선생님..."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120살까지 살겠다고. 시대가 좋아졌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네. 믿을게요. 선생님."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품에서 천천히 잠이 들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저희의 관계를 허락하지 못한 것이 나이 때문이라면 저는 수진이보다 오래 살겠습니다.
수진이는 19살. 저는 38살.
지금은 나이 차이가 2배나 납니다.
하지만 제가 120살까지 산다면 어떨까요?
19살의 차이는 그렇게 크다고 느껴지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약하고 소심한 어른입니다.
수진이는 강하고 당찬 아이입니다.
그러니 만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슷한 부분을 찾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 이끌렸습니다.
저는 소심한 어른이니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뎌 보겠습니다. 수진이가 따라올 수 있게 아주 천천히.
수진이는 당찬 아이니 제 뒤를 쫓아 열심히 달려올 것입니다.
1년 또 1년.
시간이 지날수록 저와 수진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겠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수진이가 제 곁에 설 나이가 되면 달려오느라 고생했다고 웃어주며 지친 그 손을 꼬옥 잡고 같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의 사랑을 허락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