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4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6) (134/301)



〈 134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6)

흔들흔들


"선생님 일어나세요."


나를 깨우는 소리에 천천히 눈이 뜨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싱긋

수진이가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보인다.

몸에 쌓여있던 독기가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래. 이제 강준수는 김준수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


김준수가 강준수를 이해할  없었기 때문에 글이 써지지 않았다.


이후에 글이 써지지 않았던 이유는 체력이 너무 떨어졌었기 때문일 테고.

이제는 다르다.

하루에 4편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수진이가 걱정할 테니 이전과는 다르게 확실하게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수진이가 준비해준 죽을 천천히 식히고 입안으로 넣었다.

밍밍하지만 살짝 단맛이 느껴지는 게 허기졌던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줬다.

배에 온기가 스며든다.

정신이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내가 밥을 먹는  확인하더니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오는 게 이젠 가을이라기보다 겨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공부하는 데 방해만 됐겠네."

"이미 공부는 다 끝났어요. 컨디션 조절만 잘하면 문제없어요."

"그래?"


"그리고 선생님 때문에 컨디션이 메롱이고요."


"흠..."

나는 무안해져서 얼굴을 긁었다. 그러자 얼굴에 개기름과 멋대로 자라기 시작한 수염이 손에 만져졌다.

 생각보다 나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킁킁거리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본다. 겨드랑이 같은 부분에선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수진이는 잘도 이런 나한테 키스를 해줬구나 싶다.

이게 사랑인 걸까?

나는 입천장이 데여가며 허겁지겁 죽을 배속으로 집어넣었다.

수진이 앞에서는 좋은 모습으로 있고 싶다.


얼른 씻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수진이는 청소기까지 꺼내 들고 거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죽을 다 먹고 싱크대에 그릇을 옮긴 다음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쏴아아.

따뜻한 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다시 몽롱해지며 잠이 올 것 같다.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다. 과로사의 끝자락에 다다른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몸에 쌓인 더러움을 씻어냈다.


수염을 자른 것만으로 깔끔해 보인다.

코털과 눈썹은 좀 나중에 정리하고 일단은 좀 자야 할  같다.

평소보다 조금  오래 씻고 밖으로 나오니 수진이가 거실을 다 치웠는지 이번에는  방의 침대 커버를 벗기고 새로운 커버를 씌우고 있었다.

나는 수진이를 도와 침대 커버를 씌웠다.

"도와줄게."

"됐거든요~ 환자는 잠이나 자세요."

"미안해."


"알면 됐어요, 알면. 바보 멍충이."

수진이는 아직도 나에게 많이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배려에 어리광을 부리기로 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눕자마자 곧장 잠이 들었다.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아직 회복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

흠 흐응 흥  흥 흐응~♪


기분 좋은 콧노래소리가 부드럽게 잠을 깨운다.


몸에서 모든 피로가  녹듯이 사라진 기분이다.

천천히 눈을 뜨니 수진이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잤어요?"


"응. 아직  갔네?"

"환자를 두고 어떻게 가요."

"공부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


"공부할 것도 챙겨왔어요. 갈아입을 옷도 챙겨왔고."

"어?"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본인이 끌고 온 케리어를 보여준다.


정말로 어머님이랑 싸우고 집을 나와버린 건가?


내가 걱정되는 눈초리로 수진이를 바라보자 수진이는 내가 어떤 말을 꺼낼 것인지 아는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괜찮아요. 엄마도 별말  했으니까. 어차피 선생님은 내가 말려봤자 무리할 거 같으니 내가 지켜봐야겠어. 선생님은 소설을 쓰고 난 공부를 하고."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완전 빈속에 죽만 먹었더니 배가 고파졌다.


열량이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배 괜찮겠어요?"

"어, 너무 기름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제가 쓴 소설 읽으면서 기다리세요."

"응?"


"딱 보니까 안 읽었을 것 같아요. 완결까지 다 올렸는데 댓글도 안 달고."


"아..."

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머리를 긁적이고 작게 "미안." 이라고 말하며 사과했다.

수진이가 거실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 누운 상태로 수진이가 올려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용사와 주인공은 확실히 변했다.

그리고 변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용사와 주인공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제받은 이들 중에 강한 의지와 뜻을 품은 자들은 검을 들고 일어섰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이 동화 1장이라는 저렴한 물건이 아니라며 자존심을 품고 일어섰으며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검을 들었다.

원작의 이야기에서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하나, 둘씩 전장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용사가 아무리 강했어도 그는 개인이었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세계와 다르게 이번 세계에서는 뜻을 품은 자들이 검을 들고 전장으로 나섰다.


용사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인공과 용사는 결국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만으로는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사만으로는 지킬 수 없었던 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결국 티격태격하면서도 협력했고 그렇게 최후의 전장에 서게 되었다.

주인공은 과거를 회상해봤다.


최후의 전장에 섰던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은 성녀를 포함한 5명의 동료.


그마저도 마왕과의 대결에서 죽었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인공은 뒤를 돌아봤다.


입은 갑옷도 든 무기도 제각각에 어느 부대는 나무 곤봉마저 들고 있었다.


오합지졸이 있는가 하면 군대같이 각이 잡힌 부대도 있었다.

최후의 전면전.

용사도 주인공도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행했던 일들이 하나의 길이 되어 그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마물들의 거친 공격에 치명상을 입는 나약한 인간들.

하지만 그들의 상처는 곧바로 회복되었고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신을 섬기는 인류와 그의 대리인인 신관들이 죽지 않았기에 그들의 신은 전능했고 자애로웠다.


그 전장에 사망자는 없었다.

모두가 한뜻이 되어 모든 마물을 물리치고 마왕성에 다다르게 된다.


그때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게이트.


 너머로는 용사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하던 세계가 보였다.

용사는 고민했다.
집에는 가족이 있다. 평온이 기다린다.
하지만 이곳에서 도망치면 지금  전장에 남은 사람들은 어쩌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일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용사에게 사람들이 다가온다.

가세요. 용사님.
그래요. 돌아가세요. 용사님!
돌아가세요!


모든 사람들이 용사에게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라며 그를 떠민다.

용사는 당황한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고.


그러자 그들은 서로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용사도 그들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장을 가득 채운 깃발과 사람들이 보인다.

아니, 용사들이 보였다.


그 전장에는 수만 아니 수십만의 용사들이 모여있었다.


용사는 그동안 미안했다며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소중한 사람을... 가족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용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용사는 콧물이 질질 흐를 정도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고개를 처박고 끅끅거리며 울음소리를 참았다.


추해 보였지만 누구도 그를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른 용사는 자신의 가족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떠나려고 하니 게이트가 작아지기 시작했고 용사는 서둘러서 빙의자를 찾았다.


게이트가 닫히면 돌아갈  없다.

그를 찾아서 돌아가야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는 그가 보였다.

용사는 주인공에게 어서 돌아가자며 손짓을 한다.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자 주인공은 천천히 팔짱을 풀고 작게 웃더니 그에게 기사 서약을 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 작가님.

나는 당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에고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우리의 삶을 모욕한 당신을 평생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대가 용사의 시련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고통을, 내가 겪은 절망을 이해해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리석었고 멍청했으며 이기적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혼자서는 구할 수 없던 사람들을 구해냈으며 용사로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 전장에 나선 사람들은 당신의 빛에 이끌려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주인공을 따라 용사도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우리들의 용사님.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져 가는 게이트에 용사를 밀어 넣었다.

용사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은 사라져 가는 용사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ㅡ이제부터 이곳은 우리들의 전장입니다.

쿵.

의자에서 넘어졌다.


엉덩이가 아파서 손으로 부딪힌 부위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자신의 방이다.

아무래도 긴 꿈을 꾼 모양이다.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머리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화관.


그가 용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만들어준 계기.


마을 촌장의 딸이 만들어주었던 화관이었다.

시들까 봐 마법을 걸어서 머리에 쓰고 다녔다.

투구 밑엔 항상 화관이 함께 했다. 그 화관이 손에 잡혔다.


꿈이 아니었다. 그건 진짜로 있었던 일이었다.


작가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전장은 그곳이고 나의 전장은 이곳이다.

이번에야말로 다시 쓰는 것이다.

웹소설은 해피엔딩이 국룰이니까.


그는 작가에서 용사가 되었다가 다시 작가가 되었다.

그들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작가는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욕을 하며 돌아섰던 독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회귀물이면 말을 할 것이지라며 작가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전과는 작가가 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와 깊이가 있는 이야기.


완벽한 해피엔딩이지만 누구도 욕을 하지 않는 이야기가 쓰였다.


작가는 웃으면서 책상 한편에 놓인 드라이플라워가 담긴 유리통을 바라봤다.

 세상이 아닌 어딘가에 살고 있을 진짜 용사와 성녀.

그리고 그 동료와 수십만의 용사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영혼이 빠져나간 용사의 몸에 주인공의 혼이 깃든다.

엑스트라의 몸은 원래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졌다.


용사의 몸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아무래도  엑스트라가 우리를 굽어살피는 신이 보내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비겁한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게 만든 힘이라고.

용사와 인류는 용감하게 검을 빼 들고 최후의 전장에 나섰고 결국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용사는 딱히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귀족이 되지도 않았다.

이전 세계에서 성녀가 말했던 마왕이 사라진 이후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용사와 성녀와 그 동료들을 찬양하는 축제가 열린 밤에 몰래 도망친다.


그를 따라나선 건 성녀뿐이었다.


그들은 용사와 성녀 이전에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사람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용사와 성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챘지만, 누구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행복이 가득하기를 빌었을 뿐이다.


용사와 성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들을 도와줬던 또 한 명의 용사가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었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한 명의 소년이 세상에 나타났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

모르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그 둘과 닮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를 불러세우지도 않았고 찬양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더는 전설 속의 용사에게 의존하는 약자들이 아니었다.

그 전장에 섰던 모두가 용사였으니까.


그저 그들을 이끌었던 두 명의 어린 소년, 소녀의 아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소년은 웃으면서 작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말과 함께 이야기가 끝이 났다.



모든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화관'이 이런 장치로 쓰일 줄이야.

...드라이플라워를 이렇게 표현해줄 줄이야.

다른 독자들에겐 단순한 화관이겠지만 나에겐 다르다.


가슴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고맙다 수진아.

지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독자인 것 같아.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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