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서로소를 사랑한 아저씨(5)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학생때는 글을 굉장히 쉽고 빠르게 썼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청춘이란 이름의 축복이 있었다.
수진이나 인한 강사처럼 글을 빠르게 쓸 수 있었고 그 행위에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글을 쓰는 게 고통뿐이었다.
청춘, 고통, 재능, 노력...
불현듯 고등학교때 공부를 가르치던 선생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비웃음과 꼰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노력이라는 이름의 재능을 설파하던 꼰대들.
그들은 본인이 얼마나 노력해서 그 성취를 이루었는지 자랑하며 우리를 훈계했었다.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제2, 제3의 꼰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노력이란 시기가 한정적인 재능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물을 봐라. 멈추지않고 흐르는 코피. 머리가 멍해서 자고있는지 깨어있는지 알 수없는 몸.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38살의 몸은 학생때의 몸과는 달리 너무나 약했고 쉽게 망가졌다.
재능을 노력으로 매꾸기에는 나의 몸은 너무나 늙어있었다.
노력이란 청춘의 부산물이다.
넘치는 에너지와 남아도는 시간을 쏟아부어 나오는 결과물이다.
선생들은 그랬었지.
한석봉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무리 천재라도 노력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잠을 많이 자는 학생들에겐 잠을 줄이라며 침까지 튀겨가며 훈계했었다.
천재라는 존재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격을 달리한다고 벽을 보았다고 이야기 했었지.
같은 수업을 받아도 같은 책을 읽어도 이해하는 수준도 생각하는 수준도 격이 다르다고 했었다.
나도 알고있다. 대학에서 많이 보았지.
천재란 것들이 지닌 눈부심을 고등학교라는 개울물에서 벗어나 대학이라는 이름의 바다로 가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생들이 설파하던 노력이라는 이름의 근성론이 통하는 시기였다.
나는 젊었고 건강했으니까.
그때의 나는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니, 대학에 가서 슬슬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지.
천재들을 많이 보았으니까.
하지만 겨우 학생들 수준의 글쓰기다.
글쓰는 재능이 없더라도 노력으로 메울 수 있었다.
조금 특출난 친구들이 1편의 글을 휘갈길때 나는 5편, 10편의 글을 썼다.
그들이 영감이라도 얻어 밤을 지새워 글을 쓸때면 나는 살아 숨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글을 쓰고 또 쓰고 퇴고하고 또 퇴고했었다.
그러다가 군대를 다녀오고 오랜시간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펜을 내려놓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썼다면 새로운 결과가 나오고 있었을지 모른다.
글을 쓰는데 이렇게 힘들어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보다 좋은 문장이 떠올라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기위해 보내온 10년이 넘는 그 삶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영감이 떠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도망쳤다.
어쩌면 내가 보내온 그 10년의 세월속에 세계를 감동시킨 대문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인생의 마지막 영감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러면 수진이와 어머님에게 떳떳한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청춘이라는 이름의 축복이 남아있을때 무언가 해답을 얻어야만 했다.
몸을 망치더라도 생활이 무너지더라도 글을 썼으면 나의 노력에 호응한 무언가가 탄생했을 지도 모른다.
그걸 외면한 반등을 지금 겪고있다.
다른 누군가를 묘사하는 것도 아닌 나 자신을 묘사하는 것조차 힘들고 지치는 나의 비참한 꼬라지를 봐라.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 머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몸은 늙었지만 정신은 그대로였다.
그때의 근성론을 믿으며 잠을 자는 것도 줄이고 살아 숨쉬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것을 글에 쏟아부었다.
오랜 시간의 학습으로 굳어진 정신력은 몸의 비명도 잊은채 나를 벼랑끝으로 내몰았다.
이젠 반짝이는 커서를 보면 구역질 밖에 나지 않는다.
머리가 핑핑 돌아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횡설수설하는 사람처럼 머릿속이 꼬이고 어지러워 바닥에 쓰러졌다.
아, 언제 이렇게 먼지가 쌓여있었지?
나는 지저분한 바닥을 바라보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기절하기 직전 무언가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사락 사락
누군가가 머리를 만지는 느낌이다.
꿈이다. 오래전의 꿈을 꾸고있는 느낌이다.
심한 감기에 걸려서 누워있을때 어머니가 내 곁에 앉아서 머리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두고 머리를 쓰다듬던 그때의 감각.
죽어가는 순간에 떠올린게 어머니라니 참나...
그래도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난다.
"바보... 멍청이... 흑..."
"으응?"
나는 무거웠던 눈꺼풀을 서서히 떴다.
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느껴진다.
"수...진이?"
"흑... 으아아아앙!"
수진이가 울면서 내 머리를 끌어 안는다.
왜 수진이가 여기에 있는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마지막에 수진이를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내가...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 아무래도 이건 현실인 모양이다.
꿈속의 수진이는 언제나 예의바르고 좋은 말만 하니까.
꿈속의 수진이는 나데나데의 여신이다.
감정이 격해지면 소리치고 반말하는 수진이는 현실의 수진이다.
"흑, 흐윽, 흑흑."
수진이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뜨거운 물방울이 묻어 오랜만에 세수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왜... 여깄어. 격리는? 시험은..."
"이미 2주 지났어. 이 멍청아!!!"
수진이가 지르는 고함에 귀가 찌잉하고 울려서 인상이 찌푸려진다.
"구급차 부를뻔 했잖아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어요. 집안 꼬라지도 선생님도..."
"하하, 미안. 오랜만에 글을 쓰다보니 너무 열중했나봐."
"바보야..."
수진이는 얼굴이 거꾸로 보인다.
아무래도 나는 수진이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상태인 모양이다.
아, 무릎베개 좋은 경치로군.
이렇게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수진이는 아름다웠다.
천천히 몸을 좀 먹고있던 죽음의 기운이 사라졌다.
정말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는 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울적한 표정을 보이는 수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온걸까?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물을 언제 마셨더라? 목이 너무 칼칼하고 아팠다.
"전화를 걸어도 안 받고 카톡을 보내도 답장도 없으니까 그렇죠... 이 바보 멍청이."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리를 딱하고 때렸다.
때리지마. 지금은 골이 울려서 토할 것 같다.
"지금 몇시야?"
"오전 10시요."
나는 수진이의 말을 듣고는 다급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수진이가 내 머리를 잡아 당겨서 나를 다시 본인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만든다.
"움직이지 말아요!"
"놔..."
"움직이지마!"
수진이는 내 머리를 끌어안고 나를 못움직이게 막았다.
"지금... 지금 뭐하려는 거에요?"
"소설... 써야지."
"왜!"
"그래야 하니까."
"그만, 그만해요! 내가, 내가 말했잖아요...? 엄마가 허락 안하면 그냥 집에서 나오겠다고. 그만해요, 그만해! 내가, 내가 이런다고 좋아할거 같아요?"
"..."
"나, 이럴거면 엄마 허락이고 뭐고 필요없어. 선생님만 있으면 된다고... 그만해요. 그만해."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격한 감정을 토해냈다.
내 얼굴이 수진이가 흘린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메말랐던 몸에 수진이의 걱정과 슬픔이 스며든다.
그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던 이유를.
그리고 이렇게 글이 써지지않던 이유를.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수진이는 나를 더욱 세게 끌어 안았다.
답답할 정도로 강했지만 수진이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수진이를 많이 힘들게 한 모양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아직 나는 해야할 일이 남았다.
그러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진아, 놔줘. 나 소설써야해."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에요? 왜? 왜? 왜!"
"수진아... 우리가 왜 도망쳐야해?"
"네...?"
"너도 소설에 썼잖아. 우리 사랑을 남들한테 과시하고 싶었던거 아니야?"
"그건..."
"난 말야. 우리 관계가 잘못이라고 생각 안해.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거고."
"그래서 이 모양 이꼴이 된거에요? 제가 그런다고 좋아할줄 알았어요?"
"아니. 니가 걱정할 줄은 알았지.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어."
"왜요!"
"나는 실패했으니까... 나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
수진이는 나를 끌어안는 손에 힘을 천천히 풀고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도 나를 이해해주는 좋은 부모는 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결혼이 두려웠어. 아버지처럼 될까 봐.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봐 걱정이었지."
"될 수 있어요."
스윽 스윽
수진이가 내 앞머리를 손으로 쓰다 듬어온다.
그래. 지금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고 생각했어. 나에겐 너무 어렵고 차가우셨으니까. 부모가 바라지않은 아이라는 생각이 가슴 한켠에 남아서 괴로웠어."
"..."
"그러니 나는 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어른의 눈치를 살피지않는 건강하고 밝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 그런데 어머님이 우리의 관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면... 아이는 눈치챌거야. 그 불편한 분위기에 억지로 웃음을 짓고 착한 아이인 척 하겠지."
그래. 반에 한 명씩은 꼭 있는 애늙은이 같은 아이로 자라날 것이다.
나는 그게 싫다.
"선생님..."
"우리의 만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싶지않아. 누구에게나 축복받는 새 삶을 시작하고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아이를 맞이하고 싶어.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어머님을 설득할 거야."
수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내 입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수진이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쓸고 머리에는 부드러운 수진이의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서로의 입술을 살짝 붙였다가 떼는 키스.
하지만 그 키스는 100마디 말보다 1,000글자의 글보다 더욱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수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통해 전해져 온다.
"역시 엄마는 사람보는 눈이 없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렇게 근사한 사람을 못 알아보다니..."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19살 여고생한테서 어머니의 향기를 느끼다니 내가 어지간히 미쳤나보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죽은 드실 수 있죠?
"부탁할게."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맡에 베개를 넣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멀어져가는 수진이의 발소리를 들으며 정말 오랜만에 깊고 평온한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