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장모님. 따님을 주세요!(6)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머리를 감싼 기분이 들었다.
포근하고 기분 좋은 느낌.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이 천천히 의식을 깨운다.
어느새 잠든 모양이다.
그리고 이 감촉은... 아무래도 수진이가 또 장난을 치고 있는 모양이지.
"수진아?"
"어떻게 아셨어요?"
수진이가 끌어안고 있던 내 머리를 놓아준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나에게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이 수진이 밖에 없으니까."
"에이. 뭐야."
수진이는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나는 시계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저녁을 먹었을 시간이다.
"엄마가 데려오래요.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하는 것도 조금 불편하신가 봐요. 선생님의 끈기가 이겼네요, 히히."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나는 수진이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수진이의 어머님은 내가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신 모양이다.
올 때까지 안가고 버티려고 하니 불편해서 한걸음 양보하신 모양이다.
드디어 어머님과 제대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게 됐다.
어머님도 1주일의 시간이 흘렀으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셔서 만나볼 생각이 드셨을지도 모르지.
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과 어깨에서 우두둑하고 뼛소리가 난다.
"선생님 괜찮아요?"
수진이가 약간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온다.
"괜찮아. 얼른 가자."
내가 머그컵이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자 수진이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카페를 나오니 이젠 겨울 날씨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으~ 추워!"
수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나는 수진이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헤헤."
수진이는 작게 웃으면서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우리는 천천히 손을 잡고 수진이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그동안 우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어떤 말을 꺼내도 지금 손에 전해지는 온기보다 따뜻하진 않겠지.
수진이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수진이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
인터폰에서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수진이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내가 따라 들어갔다.
수진이의 어머님은 팔짱을 끼신 상태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수진아."
"응?"
"카드 줄 테니까 나가서 성진이랑 밥 먹고 와."
"어?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
"선생님이랑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얼른."
"..."
수진이가 갑자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식사 시간에 나를 불렀으니 식사 겸 대화를 하며 조금은 불편한 분위기가 해소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니 불안해진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나만 믿으라는 뜻을 담아서.
수진이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빠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수진이의 오빠... 아니 처남은 나와 어머님을 번갈아 보면서 위장이 아픈 듯 배를 누르며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처남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다.
나중에 용돈이라도 넉넉하게 줘야겠다.
미안해 처남.
저번에 마트에서 그렇고 여러 가지로 고마워.
쿵 위이잉.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수진이 어머님은 천천히 식탁에 앉으셨다.
나도 수진이의 어머님을 따라 걸어가서 맞은 편에 앉았다.
"어차피 핑계잖아요. 수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으니까요."
"..."
"계속 찾아오셔서 피곤하시게 하실 것 같으니 확실히 말하려고 부른 거에요. 헤어지세요. 그게 수진이를 위하는 길이니까."
"어머님. 저는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헤어지세요."
"저는..."
"헤어지라고요."
수진이의 어머님은 헤어진다는 말 이외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시선으로 노려보고 계셨다.
그래도 눈을 마주치고 말이라도 해주시니 다행이지.
나는 천천히 심호흡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머님은 이미 이성으로 설득할 상황이 아니다.
기선제압을 당하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이 끌려다니게 되겠지.
진정하자. 흐름을 이쪽에서 잡아야 한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머님은 아까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여셨다.
꼭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이다.
"38살이라고 하셨죠."
"네."
"수진이는 19살이에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충분한 이유기는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요즘은 나이 차가 나는 부부도 많습니다."
"많다고 해봤자 열에 하나도 안 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신다.
뭐, 그건 맞는 말이겠지.
"저는 수진이가 저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만났다면 분명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
수진이 어머님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저 간호사예요. 아시죠?"
"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병원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대부분이 남성이에요. 40대가 넘어서부터 그 빈도가 확 늘어나고요. 우리나라 남성 평균 수명은 약 80년이고 여성은 5에서 6년 정도 더 살죠. 제가 뭔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시겠죠?"
수진이의 어머님은 천천히 나를 타이르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보다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그 말이 무작정 거절하며 매도하는 말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수진이에게 들으셨겠지만, 저희 이혼가정이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죠. 그때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인생의 절반을 함께 살았던 사람이 가족을 저버리고 떠나버려서... 그 빈자리가 너무나 괴로워요. 저는 그 아픔을 그 아이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
"선생님이 얼마나 진지하게 수진이를 사랑하든 저는 어머니로서 선생님과 수진이의 관계 허락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 수진이를 정말로 사랑하시거든 헤어지세요."
정론을 들이미니 숨이 막혀왔다.
이전의 나라면 여기서 포기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넥타이를 바라봤다. 수진이가 사준 넥타이.
왠지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본인의 말에 납득해서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로 물러날 생각이었으면 여고생이랑 떡을 어떻게 칩니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나의 뜬금없는 말에 수진이의 어머님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덕분에 방금까지 공간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가 희석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제 천천히 내가 분위기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벅찹니다. 그런데 남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죠. 그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나는 수진이의 어머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진이가 아직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아내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의 어머님은 더욱 인상을 쓰셨다.
38살에 이혼남까지 겹치니 부모로선 완전 쓰레기 새끼겠지.
하지만 말의 허리를 끊지는 않았으니 계속 말해보라는 이야기겠지.
"아내랑 심하게 싸웠습니다. 평소에 쌓여왔던 악감정이 작은 계기로 터져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죠. 서로 투명인간처럼 지내다 보니 어느새 아내가 바람을 피웠고 그러다가 수진이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래서요?"
"수진이와 알게 되고 나선 계속 수진이와 전 아내를 비교하게 되더군요. 사소한 선물에도 기뻐하는 사람과 값비싼 선물에만 호감을 표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뭐,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잠깐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어머님은 이전과 다르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것 같은 분위기를 하고 계셨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정말 어른스러웠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요. 수진이를 만날수록 저는 점점 빠져들었고 그럴수록 아내가 미워졌습니다."
"..."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로 아내가 다시 관계를 되돌리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모습이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다른 남자를 침실로 들이던 여자가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이니 좋을 리가 없죠.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꺼내도 죽어도 헤어지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모습에선 미움을 넘어 혐오의 감정을 품었습니다."
수진이의 어머님은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젠 말의 허리를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쩌면 어머님에겐 이게 법정에서 재판이 내려지기 전에 죄수가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기회를 주는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회를 준다면 잡아야지.
"하지만 이혼을 하고 돌아서려니 뭔가 마음이 이상하더군요. 그렇게 미워했는데 마지막엔 그녀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었습니다. 아내가 저랑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제는 본인 쪽에서 물어오신다. 제법 좋은 분위기다.
"이 나이가 되니 별다른 취미도 없죠. 그저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며 돈을 벌 뿐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죠. 직장을 다녀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TV를 켜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 그런 무료한 삶을 살던 그녀가 저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랬기에 다른 남자를 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은 거죠."
"..."
"전 아내랑은 6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혼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뭔데요?"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탈선했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다시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리려고 하신다.
괜찮다. 나도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니까.
"어머님은 수진이를 위해서 헤어지라고 하시는데 그게 진짜 수진이를 위해 선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머님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한 발언을 공격이라고 받아들이신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어머님은 수진이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나요?"
"수진이는 원래부터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손이 덜 가는 아이였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겠지.
"역시 부모라고 아이를 다 이해하진 못하는 거죠."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아니요. 진심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모르듯이 부모도 아이를 모르는 거죠."
나의 꼰대 발언이 그녀를 화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지금 저보다 수진이에 대해 잘 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까와는 달리 매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시는 어머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뭘 아는데!"
소리를 지르시는 어머님.
이성을 잃고 날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