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장모님. 따님을 주세요!(3)
수진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일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이다.
만약 그곳에서 어머님과 딱 마주쳤다면 나는 아마 딱딱하게 굳어서 입도 뻥긋 못하고 어버버 하다가 싸대기만 한대 얻어맞고 끝났을 것이다.
난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는 약하니까.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심호흡을 한다.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남자는 자신감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보여준다면 가장 정돈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우선은 외견부터 깔끔하게 해야겠지.
나는 내일 오전에 미용실의 예약을 잡고 행거에 걸려있는 양복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넥타이는... 수진이가 사준 넥타이를 하고 가면 되겠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양복을 들고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꼭 처음으로 맞선을 봤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때와 무엇하나 달라지지 않았나.
아니, 아니지.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달라.
나는 들고 있던 양복을 행거에 다시 걸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수진이의 어머님이 거절하면 어쩔 건데?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이냐?
절대로 아니다.
나는 이제 수진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수진이를 달라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어차피 수진이의 어머님으로서는 웬만한 남자들은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수진이보다 잘난 남자를 찾는 게 더 힘들지.
나는 천천히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차피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
"안녕하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한 이후 예약했던 미용실로 찾아왔다.
"그냥 다듬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미용사는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1달에 1번씩 미용실을 찾으니 그냥 자라난 머리를 조금 짧게 다듬을 뿐인 시간이다.
싹둑거리는 소리가 나며 잘리는 머리카락.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눈이 약간 충혈된 것이 보인다. 결국, 어젯밤은 잠을 잘 잘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자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눈을 감으면 수진이의 어머님이 보이실 반응이 몇 번이고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머리를 다 자르고 식사를 끝내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진이의 어머님과 만날 시간이 된다.
나는 수진이에게 미리 연락해서 내가 도착하면 문을 열고 맞이해달라고 이야기를 끝내놓았다.
수진이는 알겠다며 카톡을 보냈다.
"길이 괜찮으세요?"
"네."
나는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머리를 정돈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가 몸에서 용기와 열기를 빼앗는 기분이다.
밥을 해먹을 정신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미용실 근처의 가게에서 식사하고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행거에서 양복을 꺼내서 입는다.
수진이가 사준 넥타이를 목에 걸고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코털도 눈썹도 잘 정돈되어 있다.
외형은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나는 수진이와 약속한 시각이 될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으로는 어머님과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고 우리의 관계를 허락받을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좋은 결과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
띵동ㅡ
`누구세요?`
약속대로 수진이가 응대해줬다.
나를 바라보고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준다.
"수진아? 왜 말도 안 듣고 문을 열어줘?"
수진이의 어머님이 의아한 듯 수진이를 따라 현관으로 나오신다.
집이라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이다.
검게 윤기 나는 머리, 수진이와 닮은 이목구비의 외모.
40대라고 들었지만, 그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안녕하세요. 수진이 어머님."
"...누구세요?"
"수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준수라고 합니다."
"아, 네. 선생님.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아 참, 내 정신 좀 봐. 들어오세요."
수진이의 어머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천천히 구두를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수진이의 집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수진이의 어머님을 따라 걸어가서 식탁에 앉았다.
"선생님, 커피도 괜찮으신가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드세요."
그렇게 말하며 들고왔던 과일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둔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면서 과일 바구니를 손에 들고 바라보신다.
그 모습이 수진이와 많이 닮아서 마음이 괴로웠다.
이제 곧 저 웃음이 경악으로 물드는 시간이 다가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진이의 어머님은 수진이에게 과일 바구니를 조리대 한쪽으로 치우시고는 커피를 타려고 하시다가 나를 돌아보신다.
"아 참, 커피는 어떤 걸로 드시나요?"
"다방 커피로 주세요."
"네."
수진이 어머님은 커피를 두잔 준비해서 내 앞과 본인 앞으로 내려놓으셨다.
아무래도 수진이의 집에 있는 다방 커피는 어머님의 취향인 모양이다.
천천히 커피를 한입 마신 어머님은 약간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이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수진. 정신 사나우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선생님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응..."
수진이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어머님과 1대 1로 대화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했었다.
상황이 꼬이면 수진이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면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어머님이 더욱 나에게 실망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선생님도 아니고 학원 강사님이 집에 찾아오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인데..."
수진이의 어머님은 약간 걱정된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시다가 수진이의 방 쪽을 살짝 바라보신다.
긴장된 표정으로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수진이의 어머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수진이는 성적도 좋고 태도도 좋아서 학원에서도 기대되는 학생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
수진이 어머님의 표정은 불안함에서 의아함으로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서서히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설마...?"
어머님은 역시 수진이의 어머님인 모양이다.
눈치가 참 빠르셨다.
나는 고개를 팍 수그리고 입을 열었다.
"수진이 어머님. 저는 수진이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관계를 허락해주세요."
"..."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정면에 앉아있는 수진이의 어머님을 바라봤다.
어머님은... 얼굴에 그 어떤 표정도 띄우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무표정.
화난 표정보다 그 정색한 표정이 더욱 공기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김준수 강사님."
"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교제요?"
"네..."
"하."
수진이의 어머님은 매우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지금 몇 살이시죠?"
"38살 입니..."
짝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요즘 말을 하는 도중에 싸대기를 맞는 경우를 자주 겪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싸대기라도 한대 처 맞으니까 왠지 나쁜 짓 하고 벌을 받은 듯한 느낌이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이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다.
"지금 장난하세요? 38살? 당신 미쳤어?!"
"아니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저 수진이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수진! 이수진! 당장 튀어나와 이 미친년아!"
수진이의 어머님은 수진이를 부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수진이도 문을 살짝 열고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금방 걸어 나왔다.
"지금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짜야? 너 진짜 미쳤어?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가 있어? 저 사람 38살이라고!"
수진이의 어머님은 이제 거의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나와 수진이를 노려보고 계신다.
그 모습은 그래, 그날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나와 수진이의 관계를 알게 된 날.
나의 뺨을 때리고 소리 지르던 그 모습과 닮아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이수진!"
수진이도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매우 낯설 것이다.
아마 이혼을 하셨을 때 이례로 본 적이 없겠지.
수진이의 어머님은 수진이를 닦달했다.
수진이는 고개를 작게 숙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미안... 나 선생님 많이 사랑해. 결혼할 거야..."
"읏!"
수진이의 어머님이 다시 손을 드셨다.
나는 서둘러서 수진이 어머님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놔!"
수진이의 어머님이 소리를 지르시며 손을 당겼다.
나는 어머님의 손을 놓아드렸다.
수진이를 등 뒤로 숨기고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어머님과 마주 선다.
어머님은 나와 수진이를 번갈아 쳐다보시고는 천천히 입을 여셨다.
"사랑? 결혼? 정말 미쳤구나! 이수진. 어쩐지 요즘 그렇게 몸가짐에 신경을 쓴다 했어. 성진이도 알고 있는 거지?"
수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나만 몰랐다 그거네?"
어머니는 고개를 살짝 젖혀서 천장을 바라보시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쪽을 바라보고는 입을 여셨다.
"나가."
"어머님, 그 이야기를..."
"당장 나가!!!"
아무래도 수진이의 어머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딜 다시 찾아와! 당장 꺼져!!!"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려서 현관으로 향했다.
수진이가 나를 따라온다.
"이수진! 넌 이리와!"
수진이의 어머님이 수진이를 부른다.
수진이가 나와 어머님 사이에서 망설이더니 어머니 쪽으로 가려고 했다.
나는 천천히 수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선생님?"
수진이의 약간 불안한 눈빛이 보인다.
나는 수진이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그 더러운 손 못 치워?!"
수진이의 어머님이 소리 지르며 다가오신다.
나는 나가려고 하다가 수진이의 손을 놓아주고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왜 이러세요!"
수진이가 당황해서 나를 말리려 들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조아렸다.
자존심 그건 참 무거운 녀석이다. 이 나이가 되면 더욱 무거워지지.
하지만 그게 수진이를 포기할 정도로 가치 있는 녀석은 아니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머리 위로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머리를 숙인 상태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많이 화가 나셨다는 건 잘 압니다. 제가 부모라도 나이가 2배나 차이가 나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주먹부터 나갈 것 같으니까요."
"그걸 아는 사람이 왜!!!"
"그래도 수진이를 사랑하니까요. 욕을 먹든 싸대기를 맞든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니까요."
"..."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수진이의 손을 붙들고 집을 나왔다.
어머님은 우리를 말리지 않았다.
쿵
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댔다.
"선생님 괜찮아요?"
수진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조금 붉어진 내 뺨을 어루만진다.
나는 그것만으로 내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니까."
"뭐가 괜찮아요..."
수진이가 울적한 표정을 지은 채 작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수진이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나는 수진이의 몸에서 떨림이 멈출 때까지 한동안 수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