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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화 〉새아기는 여고생(6) (115/301)



〈 115화 〉새아기는 여고생(6)

추석 아침.

평소보다 일찍 잔 덕인지 잠이 빨리 깼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나왔다.


혹시 어머니가 우리를 깨우러 들어오셨다가 들키면 조금 그럴 테니까.

수진이의 애교에 져서 같이 잤지만, 굳이 풍파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지.

수진이는 정말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자는 얼굴이 추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봤지만, 수진이는 자는 얼굴도 귀여워.

그렇게 수진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몸을 뒤척이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찍 잤으니 눈이 빨리 떠진 모양이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는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른다.


내가 고개를 숙이니 작게 입을 맞춰주고는 떨어진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수진이가 침대에 앉아서 손을 벌린다.

수진이를 살짝 안아준다.


"후우~"


수진이가 작게 숨을 내쉬고는 내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역시 좋네요. 아침에 선생님이 옆에 있으면 진정되고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나도 그래."

"그럼 오늘도 같이 자는 거에요?"

"...그러자."

"히힛."


수진이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선생님이 먼저 씻으세요."


"그래."

나는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셔서 준비하시려는 모양이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금방 씻고 도와드릴게요."


"괜찮아. 천천히 씻으렴."


남자가 씻는  시간이 걸려봐야 얼마나 걸리겠나?

금방 씻고 수진이에게 씻으라고 말한 뒤에 어머니를 도왔다.

어차피 4인 가족이 단출하게 추석 같은 분위기를 내고 짧게 절이나 몇 번 하고 땡치는 매우 간소한 행사다.

아버지가 형제분들과 사이가 나빠서 큰집으로 가지 않으니 이런 점은 편하다.


수진이에게도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해줬기에 부담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떡국을 준비하는 것을 돕고 약식으로 추석 차례상을 차린다.

"새아기가 참 예쁘네."

아버지가 차례상을 준비하다가 뒤를 돌아보시고는 그렇게 약간 무뚝뚝하게 말씀하셨다.

"정말요?"

"크흠."


쑥스러우신가?


나는 수진이를 돌아봤다.


"아."

수진이가 생각보다 오래 씻는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한복으로 갈아입느라고 시간을 쓴 모양이다.

핑크색 치마에 하얀 저고리가 잘 어울린다.

비싼 옷인지 굉장히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였다.

왜 케리어를 들고오나 했더니 한복을 가져왔었구나.

수진이가 싱긋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온다.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제자리에서 몸을 살짝씩 틀어가며 옷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떻긴 뭘 어때.

알몸으로 자는 모습조차 아름다운데 이렇게 꾸미면 더 예쁘지.

수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수진이가 예쁜 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조금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긁으며 "예뻐." 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는 그런 내 퉁명스런 대답이 뭐가 그리 좋은지 작게 웃으며 차례상을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네.


***

준비를 끝내고 차례를 지냈다.

다른 가정은 여자들은 차례를 안 지내는 곳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3인 가족이어서 그냥 다 같이 지낸다.

아니, 이젠 4인 가족인가?

추석 차례를 지내고 명절 음식을 먹는다.


"정말 엄마가 한 거랑 똑같네."


"그래요?"


"응, 준수가 다 컸네."


이제 38살인 남자에게 타 컸다는 말을 하다니.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시더니 살짝 웃으셨다.

"부모에겐 아이가 몇 살이든 아직 어린애로 보이는 법이야."

"..."


수진이가 살짝 내 옷을 당긴다.

"왜?"

"어린애 취급당하니까 기분이 어때요?"


아무래도 내가  번 어린애 취급을  걸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본인이 돈을 버니까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린애 취급을 해서 기분이라도 나빴던 걸까?

나는 수진이의 머리에 손을 툭 하고 얹었다.


"그런걸 신경 쓰니까 애라고 하는 거야."

"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금 애랑 결혼하시려고 하는 거네요? 그죠?"

"..."


내가 말문이 막혀서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작게 웃으면서 입을 여신다.

"준수가 완전히 잡혀 사네."


"아..."


수진이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인다.


수진이는 우물쭈물하더니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원래 좀 당차요."

"선생님!"

"봐요."

수진이가 살짝 옆구리를 꼬집어온다. 나는 웃으면서 밥을 먹었다.

어머니도 네가 어떤 애인지는 벌써 눈치채셨을 거다.


그 성격조차 저리 좋다고 하시니 그냥 받아들여라.


혜정이와 비교하면 너는 여신이지.

***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다.


역시나 나와 수진이가 싱크대 앞에 서서 정리를 시작한다.

처음엔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던 어머니였지만 이제는 그냥 받아드리기로 한 모양이다.

"선생님."


"왜?"

"명절치곤 되게 편한 거 같은데요?"


"그래?"


"네, 저희는 좀 달랐어요."

"어땠는데?"

"어떻긴요. 그냥 큰집에 다들 모여서 엄마나 이모들이  구우면 그동안 이모부들이 술상 차리고 옛날이야기하고 그러죠."


뭐, 수진이의 어머님도 그런 세대다.

이제 수진이 세대부터야 그런 모습이 사라지겠지.


"너도 전 굽고 그랬어?"


"저도  줄 알았으니 돕고 그랬는데 그만뒀어요."

"...어른들이 참 어른답지 못해."

"이상하죠? 어른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매번 들었던 이야기만 하고. 염치도 없는지 눈치나 주고. 이제 사촌들이랑은 말도 못 섞겠어요."


"섞지 마. 이제 이쪽으로 오면 되니까."

"그래서 좋아요. 이제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온다.


"마음에 들었어요. 아버님이랑 어머님도 잘 대해주시고."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도?"


"네, 제가 뭐라고 말만 꺼내시면 작게 웃으시면서 호응해주시던데."


아무래도 내가 없는 곳에서는 웃으면서 호응도 해주신 모양이다.


뭐 확실히 38살이나 처먹은 아들내미가 재롱을 부리는 것보다 19살짜리 꼬맹이가 재롱을 부리는 게 훨씬 귀엽겠지.


그래도 너무 빨리 친해진 거 같은데.

"야 수진아."

"네 선생님."


"부모님께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좋다고 하시는 거야?"

"그..."

수진이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린다.

목부터 점점 빨개지고 있는 것 같은데.


오랜만이다. 화장실로 도망칠 때 보여주던 그 상태인 거 같다.

"내년에 결혼하면 아기부터 낳을 거라고 했어요."

"..."

순간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긴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진이가 입을 뻐끔거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가지고 싶잖아요. 아기."

그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어...어."

이미 손주 이름까지 생각해보긴 했지.

"빨리 낳아도 선생님 40이잖아요. 그러니까요."


하긴 40에 아이면 늦긴 하다.


수진이는 21에 아이니 너무 빠른 거고.

"나는 조금 더 늦어도 괜찮아."

"저는 조금 더 빨라도 괜찮아요."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

"그, 고마워."

"아뇨."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기가 쑥스러워서 서로 눈앞의 설거지를 해치우는 것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아이라...

수진이를 닮았다면 똑똑하고 예쁜 아이가 태어나겠지.


나는 안 닮았으면 아니 눈썹 정도만 닮았으면 좋겠다.

"그, 수진아."

"네."


"사랑해."


"저도요."

우리는 그렇게 웃으면서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거실에 가서 소파에 앉았다.


"고생했다. 이제 편히 쉬다가 가렴."


"아뇨. 괜찮아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어서 지금은 입기 편한 옷을 입고 있다.

한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데 정말 예뻤다.

요즘은 한복을 저렇게 예쁘게 디자인하는 모양이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수진이가 나를 바라본다.

"왜요?"


"아니, 그냥 한복 입은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자 방긋하고 웃는다.

"내년에도 입어 드릴게요."


내년인가. 조금 아쉽네.

"아쉬워요?"


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조금 솔직하시네요."


"어차피 얼굴에  드러난다며?"

"그렇긴 한데..."

솔직하지 못해서 귀여웠는데... 같은 소리를 하며 조금 아쉬운 눈치를 보인다.


우리는 그렇게 별것 없는 추석을 보냈다.

***


"이번 추석은 시간이 참 빨리 가네."


"그래."

부모님은 우리를 배웅하며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다음에도 또 올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운전 조심하고. 새아기도 건강 하렴."


"네 어머님!"


우리는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출발했다.


"고마워, 따라와 줘서. 부모님이 저렇게 즐거워 보이시는 추석은 처음이야."


"그럼 설날도 처음이시겠네요."


"그렇겠지."

수진이는 천천히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흐으~"

"피곤해?"

"아뇨. 그냥 긴장이 풀려서요."

"고생했어."


"고생은 아니고요. 몇 번 다니다 보면 더 좋아지겠죠. 너무나  대해주시던데."


"그러게. 나한테도 그렇게 안 대해주시는데."

"삐쳤어요?"


"아냐."

"삐쳤구나?"


"아니라고."

"히힛. 괜찮아요. 제가 더 잘해줄게요."

"어떻게?"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알잖아...요?"


왠지 야릇하게 들리는 건 나의 착각일까?


무심결에 액셀을 세게 밟아버릴 뻔했다.


"오늘은 안 재워줄 거야."


"진짜로 그럴까 봐 무서운데요..."

이제는 그럴  있느냐고 물어오지 않는구나.

이제 패배를 인정한 모양이다. 낮은  이겨도 밤에는 이겨야지.

어차피 10년만 지나도 수진이가 나를 잡아먹을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리드해야지.


"그래서 선생님, 언제 엄마 만나실 거에요?"

"글쎄."


언제 어머님을 만나야 할까?

갑자기 숨이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선생님. 긴장 풀어요. 우리 엄마 그렇게 갑갑한 사람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너한테는 말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2배나 나이 차이가 나는 사위를 좋아라고 반기겠나.


우리 집이랑은 완전히 반대   같은데.

초면에 싸대기나 안 맞으면 급제점이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어머님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김준수라고 합니다. 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 선생님. 그런데 우리 집엔 무슨 일로? 혹시 학원에서 수진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그... 사실은 저와 수진이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습니다.

짝!

음, 거의 백 퍼센트 싸대기 맞는 장면밖에 그려지지 않는구나.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응? 별거 아냐."


"아닌 거 같은데..."

어차피 어떤 상상을 하든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겠지.

"다음 주 중에 말씀 드려보려고."

"힘내세요."

"그래."

수진이도 힘을 냈으니 나도 힘을 내야지.


김준수 38살 인생에 최고의 시련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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