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새아기는 여고생(4)
수진이와 전을 다 부치고 양념에 재웠던 소고기 산적을 구웠다.
역시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설거지도 같이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특하게 행동하실까?"
"오늘 이렇게 점수를 따놔야죠. 안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뭐, 평소에도 도와주기는 하는 데 오늘은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무리하지 마.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예요."
"노트북은 가져왔어? 참고서랑 문제집은?"
"선생님..."
수진이가 매우 울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꼭 명절에도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
"그럼. 수험이 얼마나 중요한데."
"...꼰대."
"야."
수진이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올려본다.
"명절은 가족끼리 영양가도 없는 헛소리나 하면서 시간이나 낭비하는 기간입니다."
헛소리라니 너도 뭔가 언어선택이 조금 그런데?
"난 설날이든 추석이든 공부만 했어."
"으... 그러니까 이렇게 꼰대가 되지."
"그래서 싫어?"
"가끔 때때로?"
그럼 평소에는 좋다는 거 아닌가? 좋게 생각해야지.
수진이와 그렇게 평소 같은 장난을 치면서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끝~!"
수진이가 고무장갑을 벗고 앞치마를 풀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도 천천히 고무장갑을 벗고 앞치마를 풀어서 싱크대 주변에 튄 물을 행주로 닦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데 진짜 꼼꼼하시네요."
"기본이지."
마무리를 짓고 거실로 나아가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그죠? 히히."
수진이가 웃으면서 쪼르르 어머니의 곁에 가서 앉는다.
저런 동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뭐였더라... 그래 카피바라다.
어떤 동물이랑도 잘 섞여서 어울린다고 하던데 딱 카피바라 같은 녀석이네.
이젠 진짜로 이 집 딸인 느낌이다.
나도 수진이의 옆에 가서 앉았다.
TV에는 명절이라고 뭔가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는데 평소에 TV를 안 봐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고마워. 엄마가 한시름 덜었네."
"됐어요."
"그래서 얼마나 있다 갈 거니?"
어머니는 그렇게 물어오셨다.
처음에는 하루나 이틀 보내고 바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수진이가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글쎄요..."
"3일이요."
"응?"
"죄송해요. 저도 어머니가 올라오는 시간은 맞춰야 해서."
"아? 그러니. 그렇구나. 괜찮아. 오히려 난 내일 바로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요?"
"응. 준수는 바빠서 명절에도 집에 오래 있진 않거든."
바빠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불편해서였다. 내 집이 혼자 자취하는 집보다 불편했다.
"이젠 안 그럴 거예요."
"응?"
"제가 여기 머물자고 하면 선생님은 그러자고 할 테니까요. 그죠?"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수진이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
내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니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새아가, 너도 명절에는 어르신들 보고 그래야지."
"괜찮아요. 엄마는 서울에 계시니까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오빠도 있고... 그리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요."
"왜 그러니?"
수진이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친구들에 대해서 말하던 때처럼 약간 질척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세뱃돈을 주는 입장이지 받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아...
"그게 무슨..."
어머니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수진이와 나를 바라보신다.
나는 수진이가 짓고 있는 표정에서 그 말의 진의를 파악했다.
적당히 순화했지만, 사실은 매우 거지 같은 상황 일 거 같다.
경기도 나쁜데 연 10억 원 가까이 버는 친척이 있다? 돈 이야기가 무조건 나오겠지.
친척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뭐지?
성적이나 대학에 관한 학업 문제, 결혼 같은 이성 문제다.
수진이는 성적도 좋고 돈도 번다.
친척들이 모여서 우리 수진이는 이렇게 예쁜데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번다느니 하면서 칭찬하는 어르신이 있겠지.
그걸 듣고 있어야 하는 수진이 또래의 애들은 어떤 기분이겠나?
아마 최악일 것이다.
부모님은 수진이와 자신의 아이를 비교할 것이고 은근슬쩍 돈 좀 달라는 압박도 하겠지.
...역겹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존재들이 수진이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눈에 선하다.
수진이의 어머님은 사실 수진이가 그런 곳에서 감정낭비를 하지 말라고 떼어놓고 가신 게 아닐까?
"그 어머니, 있잖아요."
"어? 무슨 일이니?"
"그... 수진이가 저보다 수익이 많아요."
"그게 무슨..."
"수진이가 요즘 휴대폰으로 보는 소설 쓴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작가예요."
"..."
어머니는 눈만 끔뻑이신다.
그렇게 말해도 얼마나 잘 버는지 감이 안 오시겠지.
아무튼, 나보다 수익이 많다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눈을 감더니 곰곰이 수진이가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중이신 모양이다.
"아..."
어머니도 수진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눈치채신 모양이다.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크흠."
아버지가 헛기침을 한번 하신다.
"어른들이 점잖지 못하구먼. 새아기 편한 대로 하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TV를 보신다.
TV 보는 척하면서 듣기는 다 듣고 계셨네.
"그러렴. 새아기가 오니까 집이 밝아서 좋아."
"역시 선생님은 칙칙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올려다본다.
"자꾸 반말할래?"
수진이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쟐묫했여요."
수진이의 볼을 놓아주자 히죽 하며 웃는다. 아무래도 완전히 놀아나고 있다.
그래도 뭐...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자꾸 비교해서 미안한데 혜정이 때와는 진짜 분위기가 딴판이다.
혜정이는 명절 자체를 아주 싫어했고 전을 부치는 걸 왜 굳이 해야 하느냐며 사서 먹자는 주의였다.
이렇게 소파에 앉아서 웃으면서 TV를 보지도 않았고 오면 볼일이 있는 게 아니면 내 방에 들어가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어머니도 굳이 불편하다고 하는데 고생시킬 것 없다고 내버려뒀었고 차례를 지내고 나면 바로 혜정이네도 들러야 해서 바빴다.
수진이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다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수진이의 허리를 살짝 잡고 TV를 본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돌들이 뭔가 여러 가지 하는 모양인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선생님."
"응?"
"저 애들 중에서 누가 가장 예뻐요?"
그렇게 말하면서 TV를 가리킨다.
나는 TV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쟤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너는 다 아나 보네. TV 잘 안 보지 않았어?"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하긴, 여고생인데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
나는 TV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봤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이거 아무래도 그런 문제인 거 같은데...
나는 TV를 바라보다가 한 여자를 가리켰다.
머리가 검고 수진이와 비슷한 길이에 가슴은... 수진이보다 좀 작나?
"쟤."
내가 TV를 가리키자 수진이가 약간 인상을 쓰고 뾰로통한 표정을 보인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쟤가 그나마 수진이랑 닮았네."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면서 나를 툭 하고 친다.
아무래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기특하다가도 하는 짓이 요즘 여자들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단 말이지.
그래도 귀엽지도 않은 여자들이 하는 질문이랑 귀여운 여자가 하는 질문은 다르지.
적어도 다른 남자들이랑 다르게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정말 사이가 좋구나."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수진이는 쑥스러운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연기가 아닌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을 지적당하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뭐, 평소에도 이런 느낌이에요."
"보기 좋아. 후후... 역시 인연이란 게 있나보구나."
"네?"
"네 아버지랑 사주를 보고 왔거든."
아니 사주팔자를 아직도 믿으신단 말인가?
나는 그딴 미신을 왜 믿느냐고 말을 하려다가 어머니가 매우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냥 들어보기로 했다.
"요즘 아들이 이혼하고 새로 만난다는 아이가 있는데 여러 가지로 걸리는 부분이 많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놓치면 큰일 난다고 하더구나. 정말로 큰일 나겠어."
생각보다 용한 점쟁이로군.
"선생님..."
수진이가 뭔가 불쌍한 존재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지금 용한 점쟁이다. 뭐 이렇게 생각했죠?"
흠칫.
아니 진짜로 초능력자야?
"진짜 얼굴에 다 드러나네요. 첨엔 몰랐는데."
나는 얼굴을 손으로 만져본다. 진짜로 티가 나나?
수진이가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어차피 사주에서 헤어지라고 해도 안 헤어질 거에요. 그렇잖아요?"
"그럼."
"그래도 좋게 말해주니까 좋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사주를 보나 보지."
나도 수진이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작게 웃으셨다.
"역시 서로 닮았구나. 잘 어울려. 용한 점쟁이라더니 틀리지 않았나 봐."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신다.
"왜요?"
"응? 과일이라도 준비하려고."
"앉아 계세요. 제가 준비할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TV 소리와 수진이와 어머니가 떠드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좋다.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다.
내가 포기했던 것들이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는 것들이었다니.
나는 사과를 깎고 포도를 씻고 딸기를 접시에 얹으며 몇 년 후의 미래를 떠올려봤다.
나와 수진이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 집에서 아장이며 기어 다니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좋다고 하시겠지?
수진이와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많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딱 그 정도를 바라고 계셨는데 말이다.
인제야 효도다운 효도를 하는 기분이다.
내가 돈을 벌어서 가정에 보탬이 되라고 얼마나 돈을 부쳐주든 부모님이 바란 건 그런 소소한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진이를 힐끔 바라봤다.
웃으면서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한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수진이가 더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수진이 만을 사랑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더는 수진이가 소설에서 나와의 이야기를 써주지 않더라도 나는 수진이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누군가에게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하지도 않는다.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곁에 있고 애를 낳고 그 애가 커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너무나 뻔한 그 사회의 톱니바퀴 같은 일상을 싫어했는데 아니었다.
누구와 함께 그런 삶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그 아버지조차 지금은 내 말을 들어주실 것 같다.
나는 오늘 하루만으로 아버지에 대한 견해가 많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그냥 무뚝뚝하신 분이었을 뿐이다.
운이 나빠서 친구분에게 속았고 그래서 피해를 보셨을 뿐이다.
어렸을 때의 내가 아버지에게서 섭섭한 감정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수진이 같은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광경이었을 것이다.
수진이의 변덕으로 결정된 의도하지 않은 명절이었으나 나는 너무나 값진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