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새아기는 여고생(3)
"아가, 커피 마시니?"
"아, 제가 탈게요."
"됐어. 앉아있으렴. 여보, 여보는?"
"마시던 거로."
"준수도?"
"네. 수진이는 블랙으로 타주세요. 밥 먹고 마시는 커피는 블랙으로 마시니까."
"수진이가 준수보다 더 어른스럽네."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며 작게 웃는다.
"선생님 입맛은 완전 초딩이에요. 히힛."
그렇게 말하면서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수진이를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는 수진이.
"왜요? 또 때리시려고요?"
찌릿.
아버지가 작게 노려본다.
꼭 내가 매번 수진이를 때리는 것 같은 언행이다.
이 자식이...
나는 수진이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수진아."
그렇게 작게 말하자 수진이도 덩달아 작게 입을 열었다.
"왜요?"
"자꾸 그러면 선생님한테 혼나요."
흠칫.
몸이 떨린다.
그리고는 귀가 살짝 붉어져서는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완전히 뻗어버렸던 그 정사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어, 어떻게 하실건데요?"
그렇게 작게 소곤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눈이 굉장히 촉촉하고 입김이 뜨거웠다.
남자를 흥분시킬 줄 아는 여성의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다.
내가 수진이의 입을 바라보며 무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어머니가 식탁 위로 커피를 가져오셨다.
"자, 여보."
"음."
"준수도 받고, 새아기도."
"고마워요."
"잘 마시겠습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식후 커피를 마셨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건강을 생각하셔서 요즘은 프림이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블랙으로 드신다.
그러니 지금 이 집에서 다방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인간은 나뿐이라는 것이지.
확실히 뭔가 나만 동떨어진 느낌이긴 하다.
"준수야."
"네."
"그래서 수진이 어머님이랑은 이야기가 잘 된 거니?"
돌직구를 던져오시는구나.
하긴, 성인이면 몰라서 미짜인 수진이를 명절에 가족에게 소개해준다고 데려오면 이야기가 된 거라고 생각하시겠지.
나는 수진이를 살짝 바라봤다.
수진이도 말문이 막혔는지 아까까지 그렇게 분주하게 놀리던 혓바닥으로 입술만을 적실 뿐이다.
내가 말을 해야지. 여기까지 분위기를 풀어줬으면 할 만큼 했다.
나는 식탁 밑으로 수진이의 손을 살짝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 이요."
"그러면 어떻게..."
"수진이 어머님이 전염병도 위험하고 하니 집에 남으라고 했는데 외롭다고 따라온 거에요."
"..."
수진이가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인다.
어머니는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그러니?" 라고만 말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시려다가 말은 느낌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여셨다.
"저기, 준수야."
"네. 말씀하세요."
"수진이 어머님께... 찾아가서 허락받으렴."
"..."
"솔직히 많이 고민했단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우리는 준수 믿기로 했어."
"네?"
"그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많이 고민했단다. 네 아버지랑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아버지는 조금 불편하신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딴청을 피우고 계셨다.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어. 지금까지 준수,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니까... 그러니까 믿어보려고. 우리 아들인데 우리가 안 믿어주면 누가 믿어주겠니?"
"어머니..."
"그러니까 허락받으렴. 미룬다고 될 일도 아니고 수진이가 그 정도로 흔들릴 아이도 아닌 모양이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수진이를 바라본다.
"그렇지?"
"네!"
수진이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아무래도 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수진이를 환영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수진이의 어머님과 만나서 고생을 할 텐데 굳이 친가에서까지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배려인 모양이다.
수진이와도 이야기가 이미 끝난 모양이지.
그래. 수진이가 어떤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는데 성적이니 컨디션이니 그런 변명을 하며 도망치지 말자.
어차피 늦나 빠르나 수진이의 어머님이 쉽게 허락해주실 리가 없지.
나는 일단 돌싱남이며 38살이고 수익도 이 나잇대의 남자들보단 조금 더 벌어도 결국 그뿐이다.
하지만 수진이는 이제 19살이다. 외모도 성격도 좋은데 수익마저 나랑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어떤 부모가 좋다고 이 결혼을 좋다고 허락해줄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생각도 없다. 나는 이미 수진이가 없으면 글러 먹은 인간이다.
수진이가 없으면 이제 못산다.
차라리 수진이를 몰랐다면 그런대로 살다가 죽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만나버렸다.
나를 격려해주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나버렸단 말이다.
수진이의 어머님이 나와 수진이의 결혼을 허락하실 때까지 밀어붙여 봐야지.
10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잖아?
"읏챠."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빈컵들을 치우신다.
"도와드릴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머니 옆으로 붙는다.
"그냥 쉬지 그러니?"
"허리도 안 좋으신데 무리하지 마세요. 어차피 4명이 먹을 명절음식쯤이야 금방 하니까 쉬세요."
"선생님."
"응?"
"저도 도와드릴게요."
"왜?"
"왜 가 왜 나와요? 제가 선생님 부인이니까 그렇죠."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온다.
"그렇다네요. 쉬세요."
"그래도 되겠니?"
"예. 며느리 손맛이나 좀 보세요."
"네! 맡겨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는 작게 웃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거실의 소파에 앉으셨다.
"난 수진이도 쉬었으면 좋겠는데."
"왜요?"
"여자들은 명절에 기분 안 좋아진다고 해서."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지.
꽈악
수진이가 내 옆구리를 꼬집어왔다.
"아파."
"지금 그 사람 생각했죠?"
이젠 진짜 뭐 초능력자나 뭐 그런 건가. 어떻게 알았지?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내가 허탈하게 웃으니까 수진이가 얼굴을 찡그린다.
"웃지 마요."
이런 남자에게도 질투심을 품어주니 자존감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기분이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왜요?"
"아니, 그냥."
수진이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에 앞치마를 둘렀다.
나도 수진이를 따라 앞치마를 둘렀다.
명절 음식을 만드는 건 귀찮긴 하지.
그래도 수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것조차 괜찮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서서 만드는 거에요?"
"아니, 이걸 쓸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기로 구워지는 커다란 프라이팬을 꺼냈다.
"아~"
어머니가 허리가 아프시다고 해서 앉아서 편하게 준비하시라고 식탁에 올려놓고 조리할 수 있는 프라이팬을 샀다.
수진이와 식탁에 앉는다.
"어떤 거부터 하실 거에요?"
"작은 거부터 큰 거 순으로 하자."
"네."
당근이나 햄, 맛살, 파, 양파 등을 썰고 두부랑 돼지고기 다진 것과 잘 섞는다.
그리고 랩을 사용해서 기다랗게 만든다.
"신기하네요."
"응?"
"집마다 하는 법이 다른 가봐요."
"당연히 다르겠지. 너흰 어떻게 하는데?"
"저희는 그냥 햄이랑 맛살, 파를 섞어서 계란 물에 재워서 그냥 구워요."
"그게 편하기는 하겠다."
손이 덜 가겠네.
수진이는 내가 밑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보더니 랩을 사용해서 똑같이 전을 뭉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잘라서 올리는 거에요?"
"응, 이러면 시중에서 파는 거랑 거의 똑같아."
동그랑땡이랑 차이가 거의 안 난다.
오히려 식감이 살아있어서 더 낫다.
"이 오이고추랑 깻잎은?"
"그냥 속을 파서 안에다가 채우고 구우면 끝이야. 쉽지?"
"그러네요. 그냥 만들고 채우기만 하면 되니까 그냥 만두 만드는 것 같고."
"그렇지. 그리고 어머니가 해산물을 좋아하니까 대충 새우튀김만 조금 만들고 적이나 조금 구우면 되고. 아, 소고기 산적도 조금 하면 되겠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봐요."
"뭐가?"
"선생님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 없어요?"
"갑자기 왜?"
수진이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외모도 괜찮고 키도 큰 편인데 대학도 좋은데 나왔고... 요리도 잘하고... 그것도 잘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다.
부모님이 들을까 봐 그런 모양이다.
"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걸 왜 몰라요?"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으니까."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진이도 나를 따라서 프라이팬에 전을 올리고 부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것일까?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수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고생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저한테 왔다고 생각해버렸어요."
"괜찮아, 나도 그런 생각 종종 하니까."
"선생님도요?"
"응, 만약에 수진이 니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랑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적당히 그 근처에 남학생이랑 사귀고 헤어지고 그러고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수진이가 나 같은 아재랑 만나는 이유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해서 뒤틀린 감수성을 가져서 그럴 테니까.
나는 나대로 뒤틀렸고 수진이는 수진이대로 상처받았으니 서로 이끌린 게 아닐까.
"닮았네요."
"그러게."
"조금 불안해요."
"응?"
수진이는 전을 뒤집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서로 성격이 정반대여야 잘 산다고. 저랑 선생님은 비슷한 거 같아서 아닌 거 같은데..."
"난 그거 별로 안 믿어."
"네?"
"날 보면 알잖아?"
"..."
수진이가 약간 얼굴을 찡그린다.
또 혜정이 이야기가 나오니까 욱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너다 수진아...
"정반대인 사람들은 한쪽이 무너지는 순간 끝나."
"그래요?"
"어, 성격이 급한 사람, 꼼꼼한 사람이 만나면 보통 급한 사람이 하는 실수를 꼼꼼한 사람이 보완해주지."
"그렇죠."
"서로서로 존중해주면 좋지. 근데 그게 쉽지가 않아. 최소 20년은 다른 배경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만나서 산다는데 얼마나 힘들어. 수진이 너도 오빠랑 20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도 그렇게 싸우잖아."
"아니 그건..."
"그래. 가족이랑 연인이랑은 또 다를지도 모르지. 그래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게 그런 거야. 서로 좋다가도 조금 틀어지기 시작하면 알게 모르게 쌓이고 그렇게 쌓이다 보면 터지는 거지."
나처럼 말이다.
"성격이 반대인 사람들끼리 만나도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마 받아주는 쪽이 희생해서일 거야. 그럴 바에야 그냥 끼리끼리 만나는 게 더 낫지."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럼 됐어요."
"응?"
"남들이 뭐라든 무슨 상관이에요. 저희도 남들이 보면 손가락질하는 관계 아니에요?"
그렇지. 좋다고는 안 할 거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렇다면 됐어요. 저도 신경 안 쓸래요. 왠지 선생님 말이 더 논리적인 것 같아요."
"그럼. 나는 국어 강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수진이가 작게 웃으면서 전을 뒤집는다.
"명절 증후군 때문에 걱정했는데 말이야."
"이 정도 양이면 그냥 평소보다 조금 공이든 요리 정도 아니에요?"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이 너처럼 받아들인다면 지금쯤 출산율이 1.6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