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새아기는 여고생(1)
눈을 뜨니 수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잤어?"
"..."
수진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귀가 빨개진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고 귀를 살살 만져줬다.
"졌지?"
"으으으!"
수진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수진이를 수진이의 머리를 살짝 당겨서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
수진이가 내 가슴에 머리를 콩하고 박더니 내 팔을 베고 누웠다.
"칫..."
아무래도 어지간히 진 게 분한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소원이 빌고 싶었어?"
"..."
수진이가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내기에서 졌으면서 이런 식으로 장외 승부에 돌입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줄게. 말해보던지."
"...진짜요?"
"어."
수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뭔데 그래?"
"아까우니까 나중에요."
"어려운 건 안 들어줄 거야."
"괜찮아요. 저도 그런 거 바라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던지."
"선생님."
"응?"
"제 가슴이 그렇게 좋아요?"
"그럼. 수진이랑 결혼하면 수진이가 매일 아침 파이즈리랑 페라로 깨워줬으면 좋겠어."
"...그게 부탁이에요?"
아 씨 이거 좀 꼴리긴 하는 데 말이다.
이게 소원이라고 하려다가 뭔가 이건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 같아서 아깝기도 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아까우니까 나중에 말할게."
"얼마나 변태 같은걸 부탁하시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제 몸을 끌어안는다.
아무래도 내 부탁 = 야한 것인 모양이다.
하긴 수진이에게 부탁했던 것 중에서 야한 게 아닌 적이 없던 것 같기도 하고.
약간 도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수진이가 시계를 잠깐 확인하더니 내 몸을 다시 끌어안아 온다.
"앞으로 1시간은 이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을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그렇게 냄새가 나나?"
"그냥 맡고 있으면 뭔가 안심되는 느낌이에요."
"그래?"
나는 팔을 들어서 냄새를 맡아본다. 솔직히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다.
"선생님도 제 냄새 맡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수진이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니까."
"저도 그거 비슷해요."
"그래서 매번 내 셔츠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거야?"
"기분 나빠요?"
"아니, 왜 그러나 싶어서."
수진이의 몸을 끌어안는다.
수진이의 체온이 느껴지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수진이가 다시 킁킁거리는 느낌이 든다.
나보고 강아지 같다고 그랬는데 이렇게 보니 본인도 만만찮다.
"그 있잖아요..."
"응?"
"선생님 부모님은 어떤 거 좋아하세요?"
수진이는 내 가슴에 손을 얹고는 그렇게 물어본다.
우리 부모님이 좋아하는 거라...
"어머니는 해산물을 좀 좋아하시던 거 같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뭐를 좋아하더라?
그렇게 물으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무협지를 좀 즐겨보셨고 야구를 즐겨보신다는 것. 바둑채널을 보신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딱히 뭘 즐겨 드시거나 그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니면 내가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멀리해서 기억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수진이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죠."
기특한 녀석.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
"이제 2편 연재로 하시려고요?"
"네. 아무래도 팔이 너무 아파서 그 이상은 힘들 거 같아서요."
월요일 아침.
요즘 이름값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강인한 강사.
평소에는 몸에서 니코틴 향이 느껴지는 남자였는데 요즘은 파스 향이 솔솔 풍겨온다.
인한 강사는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그래도 선작수가 많이 늘었던데요?"
"그죠!"
다시 말짱해졌군.
인한 강사의 소설은 순조롭게 상승세를 타더니 어느새 선작 7천을 넘었다.
인한 강사는 일러가 나오면 적어도 절반은 더 오른다고 했으니 선작 1만은 넘기지 않을까?
인한 강사는 어쩌면 정말로 글먹하는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
"와이프가 잔소리는 안 하나 봐요?"
"처음에는 무슨 헛짓거리 하느냐는 둥 남사스럽게 왜 이렇게 추잡한 글을 쓰냐는 둥 했는데 막상 정산되는 금액 보더니 암말도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은근히 정산금에 눈독 들이는 것 같던데 좀 그래요."
얼마나 벌릴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돈인 모양이다.
인한 강사는 정산 금액을 생각하고 있는지 제법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완결까지 생각은 해두고 쓴 거에요?"
"네? 아. 대충 생각은 해봤는데 쓰다가 바꿀 수도 있고요."
"그래요?"
"네. 만약에 독자들이 코멘트 란에 전개 예측을 올려놓으면 바꿀 수도 있죠."
왜 굳이?
내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자 인한 강사는 얼굴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왠지 그대로 내면 작가가 전개 예측이 뻔한 글 쓴다고 욕먹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참신하다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남들이 똑같은 생각을 해버리면 갑자기 쓰고 싶은 맘이 사라지기도 하고 그래요. 갑자기 쓸려던 내용이 진부하고 재미없어 보여서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준수 강사님은 추석 연휴에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저요? 저야 뭐 내려가야죠."
"아, 내려가시나요?"
"인한 강사님은 안 가시려나 봐요?"
"아무래도 집사람 눈치가 좀 보이긴 했어요. 그래도 뭐 전염병 때문에 변명거리가 생겨서 이번 명절은 집에서 쉬려고요."
인한 강사는 결혼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피곤한 표정을 보이는 인한 강사를 보니 점점 그 생각이 달라져 간다.
인한 강사는 아마 꽤 괜찮은 사람과 결혼했을 것으로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인한 강사가 때때로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이젠 잘 모르겠다.
수진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알 것 같다.
수진이는 내가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고 혜정이나 다른 여자와 얽히는 것을 경계할 뿐 다른 것에 참견하진 않는다.
요즘 젊은 애들과 다르게 집안일도 할 줄 알고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도 없다.
...사실상 만날 수 있는 여성 중에 최고의 여성이 아닌가 싶다.
수진이에 대한 사랑이 +1만큼 상승한 기분이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네?"
"뭔가 엄청 심각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수진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신붓감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정 강사가 강의준비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 다정 강사는 제법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잘 털어낸 모양이다.
행동이나 외견은 소심해 보여도 역시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다정 강사님은 추석 때 어떻게 하실 거에요?"
인한 강사가 그렇게 물어오자 다정 강사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큰집에 내려가야죠."
"그런가요?"
"네."
역시 다정 강사의 집은 예절이나 명절이나 그런 전통적인 것에 민감한 집인 모양이다.
어쩌면 무슨 종갓집 이런 걸지도 모르겠네.
그러니 요즘 사람들과 다르게 이사한다고 옆집에 떡을 돌리지.
다정 강사가 연휴로 집을 비우면 역시 소음을 신경 쓰지 않고 수진이를 열심히 괴롭힐 수 있겠다.
***
"선생님 준비는 다 되셨어요?"
"준비가 뭐가 필요해. 그냥 가면 되지."
"그거야 선생님 이야기고요. 일단 마트 좀 들러요."
9월 30일.
수진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수진이의 어머님과 처남은 계획대로 외가로 내려간 모양이다.
수진이는 작은 캐리어를 들고왔다.
"캐리어까지 들고 올 필요가 있나?"
"갈아입을 옷은 있어야죠."
"아니, 그러니까 짐치고는 너무 큰데?"
"그런 게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나가자고 나를 보챈다.
"잠깐만. 혹시 모르니까 확인 좀 하고."
문단속은 확실히 해야지.
"불은 안 끄세요?"
"도둑이 들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있는 척하려면 불을 켜두는 게 낫지."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손을 잡아끌었다.
"확인 끝났으면 어서 가요."
나는 수진이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안전벨트를 메고 천천히 근처에 있는 D마트로 향했다.
카트를 하나 끌고 나오니 수진이가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서서 팔짱을 껴온다.
신혼부부가 연휴에 마트에서 장을 보며 데이트를 하는 게 이런 기분이겠지.
"역시 연휴에는 종합선물세트 뭐 이런 걸까요?"
수진이가 진열대에 올라가 있는 선물세트를 가리킨다.
참치캔이나 스팸, 식용류 등이 담겨있거나 샴푸나 린스, 비누나 치약이 담겨있는 제품도 있다.
"무난하긴 하겠지."
그 옆에는 몇 년 산 홍삼선물세트라며 전시된 것도 있었다.
"아 역시 나이가 있으실 테니 이런 게 좋을까요?"
수진이도 그 선물을 본 모양이다.
가격이... 좀 나간다.
수진이를 바라본다. 수진이는 입가에 손을 대고 고민하는 눈치다.
살 돈은 충분히 있는데 왠지 사가면 고등학생이 이런 걸 다 사 왔다고 뭐라고 할까 봐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수진이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왜요?"
"우리 집에 가는 건데 왜 니가 고민을 해. 그냥 내가 사면 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엉?"
"`우리 집`이니까 고민하는 거 아니에요?"
싱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온다.
요망한 녀석. 오늘도 요망하다.
이제 더는 두근거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들었다 놨다 하는 녀석이다.
"그냥 이걸로 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결국 그 홍삼을 카트에 담는다.
"히힛. 좋아하시면 좋겠다."
내가 사 왔다고 해야겠는데. 여고생이 샀다고 하면 좀 그럴 거 같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트를 밀었다.
수진이와 둘이서 이제 뭐를 사야 하는 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한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주류코너다.
"술이라도 사시게요?"
"어."
아버지가 뭘 좋아하는지에 관해서 물었던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몰랐던 만큼 나도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내가 수진이처럼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이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제법 높은 가격의 술을 손에 들어본다.
"그거 사시려고요? 비싼 거 같은데..."
수진이는 건강에 좋거나 오래 쓰거나 예쁘거나 아무튼 돈을 쓴 만큼 만족감이 있는 것에는 돈을 쓰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는 돈을 쓰기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지만 굳이 수백만 원짜리 옷을 사 입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술도 못 마시는 내가 건강에도 안 좋은 비싼 술을 살려니 조금 안 좋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니까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 술도 못 드시면서."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카트에 술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수진이가 나를 천천히 안아온다.
"역시 후회하죠?"
"응?"
"그 날에 난리 쳤던 일이요."
후회라...
안 한다면 거짓말이지.
속이 후련하긴 했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증오와 섭섭함.
그 모든 것들을 털어내서 후련하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후회는 해도 잘못했다고는 생각 안 해."
"그래요?"
"거기서 그냥 참았으면... 아마 헤어지라고 하셨을 테니까."
"선생님, 저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수진이가 보인다.
입이 마스크에 가려져 있어도 눈꼬리만 봐도 수진이가 어떤 입 모양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하다.
딱
"아! 아 왜 때려요!"
수진이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수진이가 이마를 누르고 나를 노려본다.
"귀여워서."
수진이가 내 옆구리를 꼬집어온다.
"아파."
"저도 선생님이 귀여워서 꼬집는 거거든요."
피식거리며 수진이가 내 몸을 잡아당긴다.
이제 살건 다 샀으니 가야지.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