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이럴거면 왜 그러셨어요...?(3)
9월 둘째 주 금요일.
다정 강사의 환영회와 나의 송별회를 겸한 행사가 열렸다.
혜정이와 헤어지면 일상이 완전히 뒤바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전과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수진이는 9월 모의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학생의 본분을 지키느라 바쁜 일상이었고 나 역시 학생들이 틀리기 쉬운 고전시가와 고전문학을 쉽고 빠르게 푸는 방법을 강의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강의를 되돌아보며 무엇이 잘되었고 잘못되었는지 연구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나와 다정 강사 사이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이렇다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적는 사무적인 관계가 되었다.
아무래도 인한 강사와 있었던 그 사건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수진이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을 들킨 느낌이다.
난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다정 강사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던 모양이지.
솔직히 3월 말의 나에게 가서 넌 곧 고3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고 전해주면 절대로 못 믿겠지.
다정 강사에게는 조금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고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 환영회에서 다른 강사들과 친해져서 낯을 가리는 성격이 나아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 준수 강사님의 화려한 새 출발을 기원하고 다정 강사님을 환영하며 건배합시다!"
"건배!"
강사들이 모여 서로 건배를 외치며 잔을 주고받는다.
오늘은 환영회를 열 것이라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집에 차를 두고 왔다.
잔을 들고 술을 마시면서 옆을 바라본다.
다정 강사와 내가 주인공인 행사여서 서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다정 강사의 컵엔 나와 마찬가지로 맥주가 든 모양이다.
저번에 사이다를 마신 걸 보아하니 술을 잘 못 마시는 모양인데 알아서 잘 관리해서 먹었으면 한다.
"크으~ 준수 강사님. 서운합니다. 제가 잘해줬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잔을 받으라고 술을 권해오는 원장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받았다.
원장님은 내가 왜 그만두는지 굳이 묻지 않는다.
나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관계란 때론 드라이하다고 생각되지만 그게 서로에게 고마울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인한 강사를 바라봤다.
인한 강사는 공짜로 회식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신이 나서 술을 마시고 있다.
성실 연재를 해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다며 1편을 올리겠다고 했다.
언제 쓸 생각일까 싶었는데 학원의 강의준비실에서 쉬는 시간에 투다다닥 하더니 1편을 올려버렸다.
뭐 퇴고도 안 하고 급하게 쓰느라 오·탈자가 난무해서 댓글에 퇴고 좀 하라는 지적이 좀 나와서 시무룩하긴 했다.
나는 내 왼쪽에 있는 다정 강사의 그 옆에 있는 35살을 바라봤다.
양수호.
이 남자는 이런 행사에는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용케 참석했다.
그래도 위치가 다정 강사의 옆이니까 많이 찜찜하다.
아무래도 다정 강사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참석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나는 술을 마시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전에 있던 강사는 그냥 기분파여서 막 강의가 오락가락했는데 그때 딱! 준수 강사님이 오셔서는 강의를 하는데 크~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준비돼서 시간에 맞춰 딱!딱! 솔직히 학원에서 준수 강사님만큼 스케쥴대로 진행하는 강사님이 얼마나 됩니까?"
그저 로봇처럼 연습했던 대로 강의하던 내 강의가 전 강사랑 대비되어 원장님에겐 좀 색다르게 느껴진 모양이다.
듣고 있는 이쪽이 부담스러운 칭찬을 해온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나쁜 표정을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친한 사람끼리 웃고 떠들며 잔을 기울인다.
그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
아무래도 이게 나의 마지막 회식이 될 것이다.
잔을 내려다본다. 찰랑거리는 맥주가 보인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다. 그 특유의 씁쓸하지만, 목이 넘어가는 순간의 시원함이 열기를 식힌다.
"오! 준수 강사님. 오늘은 잘 드시네요?"
웃으면서 제 술도 받으시죠? 라며 술을 권해오는 인한 강사.
나도 웃으면서 술을 받고는 인한 강사에게 술을 따라준다.
"자자. 준수 강사님 돌아가면서 술 한 잔씩 받아주세요~"
원장님의 말에 따라 주변에서도 오오오! 소리가 나며 찬성하는 의견이 나온다.
맥주라서 다행이지 소주였으면 오늘 큰 사고를 칠 뻔했군.
천천히 사람들의 틈에 섞여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잘살라거나 보고 싶을 거라던가 하는 형식적인 이야기나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나눴다.
특히 소곤거리며 작게 말하는 여성 강사들의 이야기가 특징적이었다.
"아~ 준수 강사님 가면 짭준수 강사님만 남네요. 으으 싫어!"
"예?"
"저기요, 저기."
그렇게 말하며 작게 턱짓을 하는 여성 강사들.
나는 거기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술이 약한지 금방 얼굴이 달아오른 다정 강사와 옆에서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35살이 있었다.
"짭준수라니 실례입니다."
"아~ 역시 뒷담화는 안 좋을까요?"
그녀들을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씩 어색함을 보였다.
"아뇨. 지금 제 앞에서 앞담화 하셨잖아요. 하하."
그렇게 말하자 무엇이 웃겼는지 아하하하하! 하며 웃기 시작하는 그녀들.
"아~ 준수 강사님, 평소에 이렇게 말도 섞고 그러시지."
"유부남인데 어떻게 그럽니까? 입방아에 안 오르게 조심해야지."
사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원이란 나에게 돈을 버는 장소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를 보며 역시 준수 강사님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
"짭준... 아 이건 앞담화였죠? 아하하하! 아무튼 정말 별꼴이에요. 그죠?"
"네, 저번에는 저한테 찝쩍이더니 그전에는 카운터에 은혜 씨한테 찝쩍이고 아주 진짜 밥맛이야."
"영어신문은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지 아하하하!"
술집의 소음에 그녀들의 중얼거림이 녹아든다.
35살은 우리가 본인을 술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들도 그에게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다.
몇 번이고 생각하지만 역시 인간은 본인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유학을 다녀왔으며 명품으로 몸을 꾸민 교양이 있는 사람이니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런 인간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발정이 난 듯 이곳저곳을 찔러보는 사람이지만.
"뭐, 해외유학을 다녀왔을 때 습관이 남았을지도 모르죠. 집이 인천공항이거나."
"아하하하!!! 인천공,항 아하하하하! 여기서 인천공항이 왜 나와요?"
"아하하하!!!"
"공항에서 외국인들이 영어신문 많이 보잖습니까?"
"아하하하!!!"
오늘의 그녀들은 술을 과음한 모양이다. 이상하게 웃음이 헤프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재밌는 개그를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아하하... 후우. 아무튼, 도대체 왜 저러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다정 강사는 양손으로 머그컵을 잡는 자세로 맥주컵을 잡고는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옆에서는 35살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다가 내가 자리로 오니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다정 강사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물어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뜨거운 커피처럼 마시고 있다. 술을 못 마시기는 하나보다.
나는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굳이 나를 피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그만뒀다.
수진이가 꼭지가 돌아버린 게 다 내 탓이었는데 그걸 잊고 또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버리면 이번에는 사정관리로 안 끝날지도 모른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니 화장실이 가고 싶은 건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은 분위기가 무르익어서인지 아니면 목이 많이 말라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술이 잘 넘어갔다.
어쩌면 요즘 술을 자주 마셔서 몸이 적응됐는지도 모르지.
화장실의 타일에 머리를 기대서 이마를 조금 식히며 오랜만에 수진이와 카페를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진이도 좋아하겠지?
손을 씻고 자리로 갈려고 하니 다정 강사가 술을 마시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보였다.
우리가 이 가게에 들어와서 술을 마신 지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도수가 낮은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저렇게 떠들면서 귀찮게 하는 남자가 있다면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술로 입을 채웠을 것이다.
술이 약한 사람이 2시간 동안 계속 맥주를 마셨다면 안 취할 리가 없지.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고 2차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다정 강사는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리에 갈려고 하니 35살이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다정 강사님이 많이 취하셔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슴으로 다정 강사의 머리를 기대게 하고 있다.
다들 술에 취했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 느낌이다.
원장님은 애초에 학원 강사들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불리는지 모르는 눈치다.
"오, 그런가요? 그러면 다정 강사님은 들어가셔야죠."
이미 다정 강사는 인사불성이다. 저 상태로 어떻게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나는 천천히 35살이 어떻게 나오는지 봤다.
"그럼 제가 택시에 태워서 돌려보내겠습니다. 저도 좀 취해서 들어가 보고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챙기면서 일어서는 35살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성 강사들은 다들 알아서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다정 강사는 주인공이니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한다는 그 압박감에 남아있다가 돌아갈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이건 아무래도 나서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아무리 봐도 35살을 믿을 수가 없다.
인한 강사도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이걸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느낌이지 않나.
나는 천천히 다정 강사의 곁으로 가서 어깨동무했다.
"준수 강사님?"
원장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제가 죰 많이 취햔 것 같은데 이먄 들어가 보겠슙니다~!"
"그래요? 그럼 뭐 들어가셔야지.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요?"
"다정 강사님 저랑 같은 아파틉니다. 저랑 같이 돌아갈게요."
그렇게 말하자 인한 강사도 둘이 같이 카풀한다며 동조해주었다.
나는 인한 강사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다정 강사의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저도 도와주고 오겠습니다!"
인한 강사는 나와 같이 다정 강사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왔다.
"계속 드시지 아쉽지 않아요? 술 좋아하시잖아요."
"이야~ 준수 강사님 연기 많이 좋아지셨네요? 캬! 기사도 정신 멋집니다."
"70만 원짜리 기사돈가요? 끄윽."
윽. 술 냄새가 나는 트림이다.
나는 입을 잠깐 가렸다가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저도 돕고는 싶었는데 이거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요. 아니 근데 같은 아파트였어요?"
"흐흐흐... 듣고 놀라지 마세요. 옆 옆집입니다. 다정 강사님."
"무슨 러브코메디 찍습니까? 아나 뭐 이런 경우가..."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흐흐흐."
나는 그렇게 말하며 택시를 찾아서 손을 흔들었다.
몇 개의 택시가 지나가고 빈 택시가 도착했다.
"그럼 준수 강사님 이번 한주 고생 많으셨고 잘 들어가세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드는 인한 강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정 강사를 택시에 밀어 넣듯 태우고 나도 타고는 아파트 주소를 불러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위태로운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저 35살이랑 같이 돌아갔으면 진짜 어떻게 될지 아는 걸까?
나는 완전히 떡이 되어 뻗어버린 다정 강사를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