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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화 〉이럴거면 왜 그러셨어요...?(2) (99/301)



〈 99화 〉이럴거면 왜 그러셨어요...?(2)

"그럼 잘 들어가고."


"선생님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래."

수진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점심을 먹고 다시 무협지나  읽어봐야겠다.

이번에는 준호가 추천해준 것처럼 좀 젊은 세대가  무협지를 읽어봐야겠다.

웹소설이니 집에서 간단히 결제해서 보면 되니 편한 점도 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올라가니 다정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아...안녕하세요."


응?


뭔가 다정 강사가 평소보다 조금 쌀쌀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집으로 들어갔다.


다정 강사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수진이가 싫다는데도 계속 얽히는 것은 굉장히 미친 짓이니까.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싶다.

35살 그놈이랑은 다르단 말이다.

에어컨을 켜고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준호가 추천해줬던 요즘 무협 웹소설 들을 찾아본다.

종류는 굉장히 많았다.

솔직히 대부분이 책으로 나오는 무협지를 그대로 웹사이트라는 플랫폼으로 옮겨서 연재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다가 공통된 특징을 찾았다.


요즘 웹소설은 `천마`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왔다.


저번에 찾아본 바로는 마교에서 천마신공을 사용하는 녀석이라고 얼핏 봤던 기억이 있는데 요리도 하고 백수도 하고 일하기도 싫어하고 딸내미가 천마도 하고 아버지가 천마도 하는 모양이다.


뭐하는 새끼들인지 모르겠다.

인방하는 천마는 진짜 보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거의 인한 강사의 소설에서 나오던 총배설강을 목격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어그로가 너무 심해서 나도 모르게 눌러버렸다.

내용은 집에서 날백수로 어머니한테 등짝스매싱을 당하는 현대판 천마가 인방으로 돈을 벌어서 다시 한 번 복수를 맹세하는 뭐 그런 플롯인 모양이다.

게임에서 실버랭크에서 골드가 못되어 허덕이는 장면이나 히로인 가슴을 보고 넋이 나가는 모습이나 주식했다가 실패해서 자살할까 망설이는 모습  무협지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모습들이 여럿 나왔다.


내용은 상당히 미친 것 같았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기성 작가가 장난으로 시작한 소설인 모양인데 인방 컨셉의 후기까지 달리니 사람들이 후원도 많이 해줘서 돈도 짭짤하게 벌리는 모양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무협지에서 복잡한 내용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요즘 독자들은 그냥 주인공이 강하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알아볼 수단으로 무협을 선택한 것뿐이다.

주인공의 경지가 어느 정도에 있다고 친절히 나오는 무협지는 굳이 상태창이 없더라도 주인공이 얼마나 강한지 눈으로 읽으며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천마`라는 명칭은 그저 명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초사이어인 같은 느낌의 매우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명사인 모양이다.


순수하게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좀 싫어할 수 있지만 이게 트렌드라면 이걸 흉내를 내 보는 것도 나쁜 건 아닌듯한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정리한 내용을 메모장에 적어넣으며 하루를 보냈다.


***


"솔직히 거기서 처녀혈 제물로 바치는 건 선 넘은 거 아니에요?"

"그래도 쇼킹하긴 했잖아요?"

"뭐 그건 그렇긴 한데..."

"어차피 그쪽 독자들은 히로인 나오면 무조건 떡떡, 야스야스에요. 차라리 어쩔 수 없이 저질러버렸다. 이런 느낌으로 술 먹고 사고 친 다음 친해지는 여친같은 느낌으로 하는 게 괜찮은 느낌이란 말이죠."

"인한 강사님은  생각이 있으시구나?"


"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왠지 결말이 찜찜할 거 같으니까."

강의준비실에서 인한 강사와 웹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전에는 수진이가 쓴 소설이나  팔리는 소설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이젠 인한 강사의 소설도 그 화제에 포함되어있다.

"그... 그래서 말입니다. 준수 강사님."

"네?"

인한 강사는 매우 우물쭈물하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인한 강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기다렸다.

인한 강사는 각오를 다진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준수 강사님이 이런 거 정말 싫어하시는 거 압니다. 아는데 저 돈을 조금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인한 강사가 보인다.

돈을 빌려달라라...


"얼마나요?"


"70만 원 정도만 빌려주세요. 10월 10일쯤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8월 31일이었다. 10월 10일이면 약 1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인한 강사가 매일 용돈을 받고 사는 불쌍한 월급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70만 원은 인한 강사에게 제법 거금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돈을 빌리려고 하는 것일까.


"일단 고개부터 들어요. 어디다가 쓸려는 건데요?"

"일러스트 박아야죠!"

그렇게 고개를 들더니 열심히 주장해온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씹덕일러 하나 박아주면 선작수가 반은 더 오르는 겁니다. 다 계획이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10월에 정산금 나오면 돌려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징그럽게 나의 손을 잡아오는 인한 강사의 손에서 내 손을 뺐다.


이전의 나라면 인한 강사가 이런 말을 꺼내자마자 금전 거래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며 딱 잘라서 거절했을 것이다.


인한 강사가 잘나가는 것도 짜증이 났을 것이며 그런 것에 짜증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어쩔  없죠. 계좌 불러요."


"으어어어어엉! 준수 강사님. 아니 준수 형님!!!"

36살이나 처먹고 끈적거리는 인한 강사가 귀찮아서 머리를 밀어냈다.

인한 강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끌어안아 온다.

그러다가 문이 열렸고 다정 강사가 들어오며 눈이 마주쳤다.


나와 인한 강사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딱 굳어버렸다.

고개를 팍 숙이고 자리로 걸어온다.


인한 강사도 그걸 눈치챘는지 내 몸에서 떨어져서는 머리를 긁적인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인한 강사를 나무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휴대폰으로 뭔가를 치기 시작했다.

카톡이 오고 인한 강사의 계좌번호가 찍혔다.


나는 인한 강사의 계좌번호를 확인하고 돈을 부쳐주었다.

바로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 인한 강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준수 강사님! 커피 한잔 뽑아다 드리겠습니다!" 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강의 준비를 시작했다.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네."

아무래도 아까 봤던 광경이 조금 충격적인 모양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다정 강사가 기운이 없는 느낌이다.


나는 어차피 오해니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똑똑


"원장님 접니다."

나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아 준수 강사님,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아니요. 무슨 일이시죠?"

"다정 강사님은 별일 없나요?"


아, 그걸 물어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굉장히 머리가 좋으신 분입니다. 외우는 것도 빠르시고요. 조금 문제라면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아직 다른 분들을 불편해하는 느낌이고요."


"그래요? 그러면 이번에 친해질 겸 다른 강사님들이랑 환영회나 한번 할까요? 준수 강사님 송별회도 겸해서."


"..."

원장님도 참 정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런데 거리두기 중이라서  제한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네요. 그러면 9월 중순쯤은 좀 정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때쯤이면 정리가 되겠지.


"그럼 9월 둘째 주 금요일로 잡겠습니다. 다른 강사님들한테도 말  전해줄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원장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원장실에서 퇴실했다.


다정 강사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감이다.

머리는 좋고 목소리도 좋아서 자신감만 가지고 당당하게 강의를 한다면 나보다 더 좋은 강사가 될 것이다.

미인이니까 오히려 포인트가 될지도 모르지.

내 어리광에 휘말린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


"이제 정말로 끝이네."

"그래."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이혼은 너무나 싱거웠다.


정말로 그 변호사의 말대로 굳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돈을 써야 할까 싶을 정도로 쉬웠다.

그저 1개월의 자숙 시간을 가지고 법원에 출석해서 이혼 의사를 밝히면 끝이었다.


우리는 서로 계단에 서서 바라보았다.


혜정이는 바뀐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날 집을 나오면서 마주쳤던 그때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혜정이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엇나가버린 6년이란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

내가 주변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존재.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인간이다.

하지만 수진이와 봤던 그 영상에서의 너도 나처럼 초라한 인간이었다.


30 후반의 나이에 달아오르는 몸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그렇지 않은 시간은 멍하니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던 녀석.


나는 지금 혜정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혜정이는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가. 다시는  보겠네. 준수 씨는 능력도 좋네. 그렇게 어린애랑 잘되는 모양이야?"


"그래. 내가 한 능력 하지."


"뭐래."


어이가 없는지 조금 피식거리고 웃는 소리를 내는 혜정이.

혜정이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정말로 준수  조금 좋아하긴 했어."


"나도 알아."

"..."

"야."


"응?"


"잘 살아. 너 존나 미인이니까 어떤 새끼든 기특하게만 행동하면 좋다고 데려갈 거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혜정이를 등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같은 똥차 만나서 고생 많았다. 잘살아."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걸음을 내디뎠다.

혜정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으려니 전화가 걸려왔다.


주소록에 등록되진 않았는데 조금 익숙한 번호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준수 씨...`


아무래도 혜정이인 모양이다. 근데 왜 주소록에 혜정이 번호가 없지?


"어."

`준수...씨도 잘살아. 그냥, 응...`



전화가 끊어진다.

나는 전화기를 잠깐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대로 걸어나갔다.


이젠 수진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행동도 하지 않아야지.

나는 걸어나가며 천천히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수진아."

`선생님?`

"어 나야."


`무슨 일이세요? 오늘은 좀 빨리 주무시려고요?`

"아니, 수진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히힛`


수진이가 웃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수진아. 선생님 이혼했어."


`아...`

"이젠 정말로 바람둥이 아니야. 알겠지?"

`후후후후후후`

수진이가 전화기 너머로 웃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계속 쌓아뒀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겠지.

나는 수진이의 웃음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선생님 사랑해요.`

"나도."


`이제 선생님 제꺼죠?`

"그래. 4개월만 참으면 니꺼 해줄게."

`4개월...`

수진이는 살짝 숨을 삼키고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왜?"


`아뇨. 이제 진짜 결혼하는구나 싶어서요.`

"너희 어머님부터 설득해야 하는데?"

`어차피 성인이면 부모 허락 필요 없는데 안된다고 하면 그냥 집 나가버리죠. 뭐`


당돌한 녀석

나는 수진이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집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더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먼치킨 김준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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