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이럴거면 왜 그러셨어요...?(1)
"계란 몇 개 먹을 거에요?"
"2개"
"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후라이를 만드는 수진이의 옆에서 국을 끓인다.
냉장고에 무가 남아있어서 소고기뭇국을 끓이기로 했다.
이게 군대에서 먹으면 역겨운데 밖에서 아침에 끓여 먹으면 또 괜찮단 말이지.
수진이를 힐끔 바라봤다.
어제 그 난리가 나고 나서 수진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수진이의 원래 성격이 어떻든 수진이는 수진이다.
수진이를 바라보고 있자 수진이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내 쪽을 쳐다본다.
"왜요?"
"아니야. 그냥 오늘도 예쁘구나 싶어서."
"후훗"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계란후라이를 만든다.
수진이는 약간 반숙으로 먹는 걸 좋아하고 나는 완숙으로 익히는 걸 좋아한다.
수진이는 알아서 척척 계란후라이를 만들어 접시에 담는다.
"이제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어차피 밑반찬만 꺼내면 되니까 앉아있어."
"넹~"
그렇게 말하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는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는다.
"선생님, 저한테 시집오세요."
"뭐여 그게?"
"제가 돈 벌 테니까 선생님이 집안일 하시라고요. 앞치마 잘 어울려요 히힛."
그렇게 말하고는 내 등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용서해 주실까?"
"어? 남자가 돈을 벌어야지 같은 소리 안 하시네요?"
"가부장적인 게 시대착오적이라며. 잘 버는 사람이 벌어야지."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가 나에게서 떨어지더니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토닥인다.
"말 잘 듣는 사람은 좋아해요."
"누가 연상인지 모르겠네."
"그거야 당연히 선생님이죠. 연하가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이전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이것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싶다.
그래. 우리는 그냥 나이 차가 조금 날 뿐이다.
연애경험도 별로 없는 내가 굳이 무게를 잡고 어른 행세를 할 필요도 없고 수진이도 굳이 나에게 맞춰주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 것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니 더 쓰다듬어줘."
"오구 오구"
수진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왠지 아주 오래전에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했을 때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역시 우리 준수야!` 라고 하시던 그때가 떠오른다.
수진이 마망...
왜 시대가 마망 히로인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힘들고 피곤한 사회에서 가장 최고의 여자는 어리광을 받아주는 여자다.
그게 연상이든 연하든 말이다.
"비켜봐, 밥 먹자."
"네~"
수진이가 자리에 앉는다.
평범한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저번과 다른 점이라면 서로의 앞에 K-헤밍웨이와 나는월억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컵이 놓여있다는 점이지.
수진이가 밥을 먹기 전에 그 컵에 든 물을 조금 마시고는 싱긋 미소를 짓는다.
컵을 매우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본다.
"이거 그냥 집에 가져가고 싶어요."
"그래? 그럼 가져가던지."
"그래도 여기서 써야지 뭔가 커플이 생활하는 느낌이 나서 또 아쉬워요."
"그럼 여기 그냥 두던지."
"으으으!"
수진이가 나를 노려본다.
"제가 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뭐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거잖아요."
이게 여자의 언어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
역시 조금 기특한 수진이가 그립기도 하구나.
나는 머리가 조금 아파서 손으로 누르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한집에서 살 건데 그걸 또 만들어?"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가 조용해진다.
"겨,결혼..."
고개를 숙이고는 있는데 뭔가 입꼬리가 살짝씩 움찔거리는 게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래, 결혼."
"그, 그렇네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을 먹는다.
나는 한동안 수진이를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밥을 먹었다.
***
"뭐하죠?"
"글쎄?"
수진이와 식사를 마치고 양치를 한 다음 자리에 앉으니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진이는 문제집도 가져오지 않았고 나도 목향을 도중에 하차해서 읽을 책이 없었다.
"아, 인한 강사가 쓴 소설이나 좀 봐야겠다."
"에~ 여친 있는데 혼자만 그러고 놀아요?"
"너도 보면 되잖아?"
"저 민짜라서 못 봐요."
"민짜라고 하지 마. 왠지 내가 좀 찔리니까."
"민짜 따먹으니까 좋아요? 강간범 씨?"
"에휴. 말을 말아야지."
내가 머리를 흔들면서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가 내 목을 졸라온다.
"같이 놀아줘요~"
"뭐하고?"
"드라이브나 갈까요?"
"이거만 다 보고~"
"칫."
나는 수진이가 내 몸에 올라타서 내 목을 끌어안고 칭얼거리는 수진이를 토닥이며 인한 강사의 소설을 켰다.
인한 강사의 말대로 히로인이 추가되었는데 이건 좀 쇼킹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 예전에 메이파라는 히로인이 간살 당해 죽은 걸로 떠들썩했던 홍정혼 작가의 더 루그라는 소설에서 첫 번째로 등장했던 히로인 같은 인물과의 마주침과 닮았다.
주인공이 지식의 신의 힘으로 보물을 찾으러 왔는데 마침 그 보물의 정통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히로인과 싸움을 하게 되고 던전의 천장이 무너져서 갇혀버리는 전개가 나왔다.
히로인은 물속성의 서브속성으로 얼음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마법사인 모양이다.
머리카락이 청발에 가슴이 큰 미인이라고 묘사되어 있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순간 히로인이 빙벽을 쌓아 어떻게든 살아남긴 했는데 산소도 부족한 상황이고 히로인의 화력으론 무너진 던전에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
주인공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게 없는지 물어본다.
신은 주인공이 바치는 제물로 단기적으로 쓸 힘을 빌려준다고 하였다.
자연스럽게 바지를 내리는 주인공과 기겁하는 히로인.
강간마라고 소리 지르며 주인공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공간도 좁아서 금방 제압당한다.
그러다가 머리가 번뜩인 주인공이 신에게 물어본다.
내 정자만으로 이 위기를 탈출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가치가 있는 물건을 제물로 바치면 더 큰 힘을 줄 수 있느냐고.
신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주인공은 깔린 히로인에게 이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히로인에게 처녀냐고 물어본다.
히로인은 넋이 나가서 무슨 미친 소리냐고 소리를 지른다.
히로인의 그 태도와 행동에서 처녀임을 간파한 주인공은 가보를 제물로 바치는 걸 보고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으라며 그야말로 강간범같은 멘트를 날리며 히로인을 덮친다.
정신이 아득해진 신이 바라보는 앞에서 거사를 치르는 주인공과 히로인.
주인공은 슴가빵빵한 미녀 마법사의 처녀혈은 일생에서 단 1번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매우 가치가 클 것 같다며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놀랍게도 희소성의 문제로 제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신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주인공과 히로인.
히로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가문의 가르침 상 첫 경험의 상대는 무조건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주인공을 따라나선다.
주인공은 처녀와 보물을 미끼로 히로인을 살살 꼬시며 개새끼에서 나쁜 놈, 조금은 좋은 놈으로 천천히 친해지는 모습을 그렸다.
"으엑... 끼리끼리 논다더니 인한 강사님도 강간범 판타지가 있었네."
"얌마."
"농담이에요."
인한 강사의 소설은 히로인이 나오고부터 더욱 인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100편도 나오지 않은 소설인데 벌써 선작이 4,000명을 찍고 있었다.
옛날의 나였다면 이 소설을 보자마자 인한 강사를 굉장히 증오했을 것 같다.
그의 재능을 질투하고 원망해서 착실한 사회인을 연기하던 가면마저 벗겨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의 재능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오히려 그에게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에 학원을 가게 된다면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짜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좀 배워야겠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학원 강사라는 공통된 특징이 있으니 무언가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진짜 드라이브밖에 못 하겠는데? 거리두기 상태가 흉흉하네."
"진짜 왜 하필 제가 수험생일 때 이럴까요?"
"몰라."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 밥도 못 사 먹겠는데. 진짜 답답하긴 하다."
"그죠? 힝. 밥은 그냥 집에서 먹어야겠다. 오전에 데이트하고 전 집 앞에서 내려주세요."
"그래."
옷을 갈아입고 수진이와 집에서 나왔다.
그냥 마주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둘이서 손을 잡고 나왔다.
"선,선생님?"
"손가락질 당하겠다고 했잖아. 그냥 어떻게 되겠지."
"..."
수진이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는 손을 놓으려다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손을 놓고는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수진이의 말캉이는 가슴이 팔에 눌려서 기분이 좋다.
***
수진이를 태우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밖은 너무나 맑았고 차는 막혔다.
"으 신호 너무 자주 걸리는 거 아니에요?"
"서울이 다 이렇지 뭐."
"제가 생각한 드라이브는 이런 게 아닌데요."
투덜거리는 수진이를 바라본다.
수진이는 휴대폰을 꺼내서 차와 연결하고 노래를 틀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나는 다시 정면을 쳐다보며 액셀을 밟았다.
"약간 외각으로 빠져서 경치 구경이나 하러 가자."
"넹~"
차를 몰고 외각으로 빠져나가자 그제야 조금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 되었다.
"창문 열면 안 돼요?"
"후회할걸?"
나는 살짝 창문을 내려줬다.
"으엑~!"
수진이의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창문을 닫았다.
"그지?"
이제 정말로 8월이 끝났는데도 날씨가 살인적이었다.
요 몇 년은 추석이 오기 전까지 날씨가 여름 날씨란 말이지.
추석이 오면 거짓말같이 추워지고 곧장 겨울 날씨가 되어버린다.
실질적으로 가을옷을 꺼내서 입는 게 1개월도 안 되는 느낌이다.
수진이가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왜?"
"아뇨. 그냥 경치가 좋다~ 싶어서요. 아! 선생님 캠프 같은 거 해봤어요?"
"캠프?"
캠프... 캠프라.
군대도 캠프라면 캠프지 시발.
텐트를 오지게 열심히 쳤던 경험은 난다.
초병을 설 때 강원도의 추운 날씨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은하수를 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시인들과 작가들의 심정을 그때 이해했었지.
"군대도 캠프라면 캠프지."
"으이구. 남자들은 뭐만 하면 군대야. 군대가 그렇게 좋아요?"
"싫어하는 사람 뒷담을 깐다고 그 사람이 좋은 건 아니잖아?"
"아, 과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 소리를 내고 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럼 캠프나 그런 거 가본 적 없는 거죠?"
"그지."
"차가 SUV인데요?"
"..."
그래. SUV다. 혹시 가족끼리 캠프를 가게 되면 쓸까 봐 산 물건이다.
나는 조금 말문이 막혀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말을 골랐다.
하지만 내 그 미묘한 침묵에서 바로 눈치를 챘는지 수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오히려 좋은 데요? 그럼 캠프는 제가 처음 아니에요? 히힛."
캠프 가고 싶다~ 라며 몸을 들썩인다.
확실히 좋아하는 사람과 가는 캠프는 뭔가 매력적일 것 같기도 하다.
잔잔한 풀벌레 우는 소리와 텐트, 모닥불을 켜고 앉아서 서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어깨를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수진이와 함께라면 밤하늘의 별들을 증오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가고 싶어졌는데."
"진짜요? 그럼 우리 가면 안 돼요?"
"수험생은 공부해야지 으딜. 수험 끝나면 어디든 다 데려다줄게."
"진짜요?"
"그래."
약속했어요? 라며 손가락을 내밀어 온다.
나는 운전 중이니 나중에 해줄게라며 수진이를 밀어냈다.
어딜 가고 싶어서 저렇게 기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진이가 기분이 좋다면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