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1)
그렇게 한동안 수진이를 끌어안고 있으려니 배가 조금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약간 불편한 반응을 보이자 수진이는 내 몸에서 일어났다.
"어디 안 좋아요?"
싱긋 웃으면서 그렇게 물어보는 수진이에게 너님이 처먹인 카레 때문이에요 라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평소보다 조금 과식한 느낌이다.
배를 살짝 쓰다듬고 있으려니 수진이의 시선이 배로 향한다.
"후훗"
못된 장난이 성공한 악동 같은 웃음을 짓는다.
역시 내가 왜 불편해하는지 아는 느낌이다.
방금까지의 달콤한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못된 녀석.
분위기가 휙휙 바뀌어서 곤란하다.
아니 그대로 관계로 넘어가도 힘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많이 먹고 움직이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걸 노렸을지도 모르지.
배를 쓰다듬으며 수진이를 살짝 노려보고 있으려니 딴청을 부리며 내 방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다정 강사가 배탈이 났다고 했을 때 줬던 그 부채표를 가지고 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병을 받아 마셨다.
작게 트림이 올라왔다.
밥을 많이 먹었기 때문인지 잠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치는 하고 주무셔야죠."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닦기 시작했다.
수진이와 나란히 서서 양치한다.
거울속의 수진이가 연신 웃으면서 나를 바라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일까?
나는 장난이 치고 싶어져서 수진이의 엉덩이를 살짝 움켜잡았다.
그러자 깜짝 놀란 수진이가 살짝 튀어 오르고는 슬리퍼를 벗더니 내 발을 밟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빼내고 거품을 토해내더니 소리쳤다.
"변태!"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엉덩이를 계속 조몰락거렸다.
갑자기 만지니 튀어 오르는 모습도 귀여웠고 탄력 있는 감촉도 각별했다.
수진이는 으그그그극 소리를 내더니 내 팔뚝을 꼬집었고 나는 천천히 손을 뗐다.
조금 아쉬웠다.
"머릿속에 이런 거밖에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노려보는 수진이를 바라보다가 나도 거품을 토해내고 입을 열었다.
"너한테만 이러지."
"저한테만 이러는 거 아니었으면 벌써 경찰서였을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수진이가 내 엉덩이를 꽈악 잡아왔다.
과연 이건 흠칫할만하긴 하다.
수진이는 잠시 내 엉덩이를 잡았던 손을 떼더니 "더럽혀졌어..." 하면서 착잡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첫 섹스를 한 지 1달도 되지 않은 여자인가? 가슴이 웅장해지는 구만.
나는 웃으면서 수진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 머리 만지지 마요. 망가지잖아요!"
내 손을 쳐내면서도 막상 툭툭 두드리면 그렇게 썩 나쁜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어차피 나 보여주려고 세팅한 거면 망가져도 상관없잖아.
양치를 하고 나오니 이젠 정말로 잠이 솔솔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수진이도 내 옆에 앉더니 자신이 들고왔던 핸드백을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놨다.
뭐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진이를 바라보자 수진이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뭔가 못된 짓을 저지를 때 짓던 그 표정이라 몸이 살짝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진이는 천천히 핸드백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잠깐 눈 감아보세요."
그렇게 말해오는 수진이
나는 싫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세상 진지한 표정의 수진이를 보니 쉽사리 거부하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들려오기 시작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수진이가 핸드백을 뒤지는 모양이다.
나는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선생님 눈 떠도 돼요."
그 말이 들려오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수진이는 손을 뒤로 돌리고 있었다.
"뭐야?"
그렇게 물어보자 수진이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뭐가요?" 라며 물어왔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수진이의 뒷짐을 가리켰다.
수진이는 씨익 웃으면서 내 손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투투 선물"
그렇게 말하자 나는 몸이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애초에 투투는 아무거나 간단한 걸 선물하는 거 아니었어?
아무말도 없어서 그냥 넘어가는 걸로 생각했는데...
내가 선물을 바라보며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수진이는 이게 아닌데?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 나중에 준비해줄게"
그렇게 말하자 아~ 소리를 내더니 수진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거 100일 선물도 겸해서 주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과연 100일 선물을 챙겨줄 때는 수험이 코앞이라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빨리 열어보라고 눈치를 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열어봐도 돼?"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뜯어보라는 반응이다.
나는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각진 네모상자가 나타났고 열어보니 반지갑이 들어있었다.
"이건?"
"지갑인데요."
그건 봐서 알고 있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봤다.
수진이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지갑 많이 해졌으니까 제가 사준 걸로 쓰라고요. 메이커니까 오래쓸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여자한테 명품가방 사주는 남자이야기는 들었는데 100일 선물로 남친한테 명품지갑 사주는 여자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어색하게 지갑을 어루만졌다.
"그거 1년은 품질 보증해준다고 하니까 그 상자째로 버리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얼른 지갑을 확인해보라고 보챈다.
지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나는 지갑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렇게 안목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품질의 좋고 나쁨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냥 가죽 특유의 냄새와 꼼꼼한 바느질이 특징적이었다.
나는 내 지갑을 꺼내고 내 지갑에 든 돈을 지갑에 넣었다.
"지갑이 빈 지갑이네?"
아무래도 지갑을 선물할 때 돈을 넣어서 주는 법은 모르나 보다.
뭐 막상 들었어도 뭔가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여고생한테 명품지갑을 선물 받는 상황도 묘한데 안에 돈까지 들었다?
갑자기 준범이가 말했던 기둥서방 이야기가 떠오른다.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자 수진이가 손가락을 흔들면서 쯧쯧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내가 방금 돈을 집어넣은 새 지갑을 빼앗아 들더니 1만 원을 빼 들었다.
"전 이미 줬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아무래도 내가 수진이한테 받고 쓰지 않고 있던 돈을 말하는 모양이다.
수진이가 다시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2달러가 들어있는 공간에 1만원을 집어넣었다.
"처음엔 시계로 하려고 했는데 지갑이 낡아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갑을 쓰다듬는다.
"지갑이니 시계니 비싼데 왜 그런 선물이야..."
나는 약간 어색해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
수진이가 돈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가 다른 또래에 비해서 어른스럽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19살짜리 여자에게 지갑을 받고 있는 품새가 좋지는 못해서 좀 볼멘소리가 나왔다.
수진이는 그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갑이나 시계는 항상 가지고 다니잖아요."
하긴 그렇긴 그렇지.
수진이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 지갑을 쓰다듬고 있다가 내 손에 다시 지갑을 올려둔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제가 생각날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굳이 이런 선물을 받지 않아도 언제나 수진이 생각뿐인데 말이다.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고마워" 라고 인사를 했다.
"아, 이제야 말하시네."
내가 언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지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내 허벅지를 쿡쿡 찔러온다.
뭘 받았든 받자마자 해야 하는데 실수하긴 했다.
하지만 금방 즐거운 표정이 된 수진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어때요? 제가 다정 강사님보다 훨씬 낫죠?"
"아니 왜 여기서 다정 강사가 나와?"
아무래도 아직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살짝 안아줬다.
"고마워. 근데 난 수진이가 주는 거면 사탕이라도 고마울 것 같은데."
"진짜 사탕 주면 곤란해 할 거면서."
"아니야."
이 나이가 되어서 누군가한테 선물을 받거나 축하를 받는 건 생각보다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진짜로 수진이가 사탕을 주면서도 그 사탕에 진심을 담았다면 좋아할 자신이 있다.
애초에 수진이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게 맞을지도 모르고
"사탕은 안돼요. 케이크도 빵도 음식은 다 안돼."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을 살짝 끌어안고는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선생님 짐을 늘려야 하니까."
아무래도 전셋집에서 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수진이의 등을 토닥였다.
수진이는 내가 가볍게 등을 토닥일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저번 주에 같이 해바라기도 보고 오고 바다도 가서 추억을 만들었을 때도 좋았지만 역시 우리에게는 남들보단 느릿하게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게 어울린다.
굳이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할 필요없이 서로를 느끼는 이 시간이 소중했다.
"선생님이 내가 준 선물이 너무 무거워서 못 도망가려면 몇 년이나 걸리려나?"
그렇게 말하면서 흥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도망갈 생각도 없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수진이를 토닥이며 그렇게 잠깐 생각에 빠졌다.
내 토닥이는 동작이 기분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밥을 먹어서 배가 불렀던 것일까 수진이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든 모습이다.
점심을 먹고 연인 집에서 낮잠이라...
이전에는 그렇게 긴장하더니 이제는 거의 제집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는 수진이를 조심스럽게 몸에서 떼어내고 수진이의 머리를 내 허벅지에 올려뒀다.
세상모르고 자고있는 모습이 귀엽다.
가슴도 크고 골반도 큰데 얼굴은 또 귀엽기도 하고 섹시하기도 하고 복잡한 녀석.
나는 수진이의 앞머리를 몇 번 만지고 있다가 쏟아지는 졸음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매미의 울음소리, 도시의 소음이 좋은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수진이가 몇 시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든지 시간이 아깝다든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진이와 함께 있는 그 시간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리운 꿈을 꾼 느낌이다.
친구들이랑 술래잡기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웃으면서 떠들던 어린 시절의 꿈이다.
눈을 가리고 30까지 숫자를 세고 숨은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어린 모습의 내가 보인다.
나는 멍하니 서서 친구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눈이 떠졌다.
하지만 세상은 깜깜했다.
뭐지 지금 한밤중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몸이 이상했다.
"응?"
그런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왠지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이 뒤로 돌아가서 꼼작도 하지 않는 느낌.
내가 자기 전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리고 도대체 왜 이리 어두워? 진짜 한밤중?
수진이는 집에 돌아갔나?
잠들기 전까지 내 머리를 베고 있던 수진이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진아~?"
내가 그렇게 부르자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아, 선생님 깨셨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수진이
척척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다.
수진이가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멍하던 의식이 또렷해진다.
깜깜한데 수진이가 잘 걷는 게 아니고 나만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러고보니 눈가에 뭔가 씌워진 감각이 느껴진다.
손도 뒤로 묶여있다.
뭐지?
"수, 수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