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선생님?(3)
수진이가 가져온 컵을 내려다봤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커누다.
그래. 수진이가 본인이 찾아왔을 때 마시려고 사둔 그 커누가 2잔 있었다.
평소에는 나한테 다방 커피를 타줬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그녀의 언짢음이 드러나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천천히 내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꿀꺽.
목으로 넘어가는 씁쓸함.
카푸치노나 다방 커피만 마시던 입엔 커누가 너무나 씁쓸했다.
내가 커피를 한입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수진이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바람 피면 혼난다고 했죠?"
수진이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띈채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쓰윽 쓸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그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는 한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성큼성큼 들어와서 과일 상자를 내려놓고 가는 여성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난 정말 결백해. 그저 다정 강사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일 뿐인거야.
"아니야. 바람 안 폈어."
"그래요? 진짜로? 아닌 거 같은데?"
수진이의 손가락이 내 허벅지 위에서 그림을 그리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손가락이 야릇하면서도 곧 이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꼬집어 오리라는 생각에 몸이 굳는다.
뭔가 변명이라도 해봐야겠다.
"그냥... 이웃이다 보니까 곤란했을 때 조금 도와주다가 그렇게 된 것뿐이야."
그러자 수진이가 내 몸에서 손을 떼곤 거리를 살짝 벌렸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보세요. 들어보고 판단할 테니."
그래. 들어보면 날 용서해주리라.
수진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처음에 옆 옆집에 이사를 왔다며 떡을 돌렸다는 이야기.
그녀에게 떡을 받고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마트에서 낑낑거리며 짐을 나르는 모습을 발견해서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한다는 생각에 짐을 옮겨줬던 이야기를 했다.
"흐응~? 그래서요?"
수진이가 타준 씁쓸한 커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고보니 이웃에 살게 된 그 여성이 내 후임으로 들어온다는 강사였다는 이야기와 인한 강사와 같이 환영회를 열었다는 이야기.
술을 마시지 않은 다정 강사가 대신 운전을 해줬는데 그때 립스틱이 옷에 묻었고 수진이가 찾아왔다는 이야기.
후에 이다정 강사와 아파트가 같은데 나만 차를 끌고 쌩하고 오기가 좀 그래서 몇 번 권유를 했더니 나를 피한다고 느꼈던 점.
이렇게 낯을 가리면 강의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판단되어 오지랖을 떨었던 이야기.
그녀가 자취경험이 없어서 식사 대부분을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다가 배탈이 난 다정 강사를 보다못해 방으로 들여서 배탈약과 죽을 먹이고 반찬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요리를 시작하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끝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수진이가 보인다.
"선생님이 잘못했네."
수진이가 내 얼굴을 꼬집었다.
"뭐갸?"
수진이는 그런 내 태도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럴 때는 둔감하실까?"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제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봐요. 옆집에 남자가 이사를 왔는데 짐을 나르는 게 힘들어 보여서 태워주고 짐도 같이 옮겨주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카풀 이야기도 꺼내고 밥도 같이 먹고 배탈이 났다고 약도 주고 죽도 끓여주고 반찬도 나눠주고? 요리하다가 불편한 점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고? 이게 정상이에요?"
수진이는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아니,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을까?
나는 진짜 순수한 선의로 도와줬다.
"미안."
어차피 뭐라고 말해봤자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리겠지.
"뭐가 미안한데요?"
가불기. 이럴때 가불기가 들어오네. 머리가 띵하다.
수진이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더니 내 무릎 위에 올라타 나를 끌어안았다.
"수진아?"
수진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몸에 손을 두르고 가만히 있었다.
나도 수진이의 몸을 살짝 끌어 안았다.
수진이의 부드러운 몸과 향기에 취해서 몸이 반응하려고 할 때 수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제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시나 봐요."
수진이가 무언가 진지한 말을 꺼내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진정시켰다.
"저요... 지금까지 선생님이랑 제 아빠였던 사람이랑 비교한 적 없어요."
아빠였던 사람인가...
수진이가 아버지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수진이는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던 게 아니었었나?
"제가 왜 웹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는 말했었나요?"
"아니"
그런 기억은 없다.
수진이는 침을 한번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요. 오라비 아니 오빠가 싫었어요. 멍청하고 멋대론데 엄마 아빠가 이상하게 오빠만 챙겼거든요. 그래서 나도 봐달라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하고 꾸미기도 꾸미고 그래도 이상하게 오빠만 좋아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을 끌어안는 손에 힘을 주는 수진이
"아무래도 손이 가는 애가 더 귀엽나 봐요."
나는 수진이를 좀 더 강하게 안아주었다.
수진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은 몸에 힘을 뺐다.
"처음엔 관심도 없었는데 자꾸 거슬리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하면서 갑자기 소설을 쓰더라고요? 형편없었어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쿡쿡 웃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걸 써놓고는 나도 쓰겠다며 헛짓거리를 하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골려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오빠가 봤던 소설을 몇 개 챙겨보고는 대충 소설을 썼어요. 그리고는 오빠한테 보란 듯이 보여줬죠."
오빠가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물어오는 수진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재밌다고 재능있다고 칭찬해줬겠지."
그렇게 말을 하자 수진이는 잠깐 몸을 흠칫 떨었다.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다.
"맞아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전 멋대로 오빠를 원망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반응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어요. 그런데 계속 써보라고 노래를 불러서 그냥 그렇게 써보기 시작했어요. 그게 중2 봄이었어요."
수진이는 그렇게 천천히 추억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빠가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나가고 집은 엉망이 되었죠. 하지만 이상하게 집안 분위기가 나빠지진 않았어요. 그래서 알았어요. 오빠가 집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수진이의 집은 아무래도 수진이의 오빠가 분위기 메이커인 모양이다.
그러니 이상할 정도로 부모님이 오빠에게 신경을 썼던 모양이지.
"아빠가 바람을 피우고 우리도 버리고 가버려서 저축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넉넉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썼던 소설을 한번 인터넷에 올려보라는 오빠 말에 따라서 올렸었죠. 그랬더니 팔리더라고요. 아주 많이"
과연... 그렇게 시작된 것인가.
"신기했어요. 그냥 생각나는 데로 써내려간 소설이 재밌다고 빨리 뒷내용을 올리라고 재촉하는 독자들과 멋대로 떡밥을 굴리며 토론회를 개최하는 독자들... 응원하는 댓글을 보니까 이상하게 기운이 나더라고요."
후훗하고는 그리운 듯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집에 여유도 생겼어요. 엄마도 처음엔 공부나 하지 왜 이런 걸 하냐고 하다가 결국엔 우리 딸은 뭘 하든 다 잘한다며 인정해주셨고요."
수진이는 역시 돈이 최고죠? 그렇게 말하면서 짧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전화가 오더라고요. 국세청인데 계좌로 너무 많은 돈이 입금되고 있다고 혹시 대포통장으로 유출된 게 아니냐고 확인차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생인데 웹소설 작가를 하고 있다고 하며 돈이 들어오는 출처 확인해보시면 알 거라고 했더니 전화가 끊어졌어요.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아무래도 이 부분부터가 중요한 부분인 모양이다.
"고1 때 갑자기 아빠가 전화를 해오더라고요. 잠깐 만날 수 있느냐고"
왠지 뒷내용을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만나러 갔더니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대뜸 같이 살자고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버리고 간 건 본인인데 뻔뻔하죠? 저는 싫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아빠 한 번만 살려주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몸을 부르르 떠는 수진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수진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나 왠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세청에서 부모님한테도 교차검증을 한 모양이에요. 아빠가 알아버린 거죠. 돈도 없이 쫓겨나듯 나가버려서 그 여자한테도 버림받은 모양이에요. 이제서야 잘못했다고 기어들어왔는데 좋게 보일 리가 있나요? 꺼지라고 했어요. 그런 인간이랑 선생님을 어떻게 비교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내 몸에서 떨어지더니 내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요... 처음에 선생님이랑 다정 강사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을 땐 내가 포기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생각해보니까 29살이랑 38살, 19살이랑 38살... 누가 더 잘 어울리는지는 뻔하잖아요."
"아니 그건..."
"괜찮아요. 그렇게 쉽게 포기 못 하니까. 저요... 선생님이 아닌 다른 남자랑은 결혼 안 할 거에요. 그럴 바에야 그냥 혼자 살다가 죽을 거에요."
수진이가 애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쪽.
수진이가 가볍게 내 입에 입을 맞춰왔다.
수진이가 내 얼굴을 쓰다 듬는다.
"선생님 생각보다 여고생들은 훨씬 더럽고 질척이는거 알아요? 관심도 없는데 자기들이 좋아하던 남자가 저한테 고백했다고 뒤에서 호박씨나 까는 인간들이에요. 저 학교 갈 땐 도수도 없는 엄청 큰 안경에 머리도 촌스럽게 하고 다녀요. 귀걸이도 화려하지만 않으면 묵인하는데 그년들 눈에 띌까 봐 안 하고 다니는 거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내 입에 입을 맞춘다.
"남고생들이 얼마나 발정 난 원숭인지 알아요? 얼굴도 모르는데 사귀자고 하고는 제 다리나 엉덩이 가슴만 힐끗거리는 데 질색이에요. 그딴 새끼들이 뭐가 좋다고 날 질투하는지도 모르겠고 지들 앞가림도 못하는 것들이 나대는 것도 짜증 나요."
수진이가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르잖아요?"
싱긋
미소를 짓는 수진이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선생님은 지금은 변태에 강간마지만 처음엔 아니었잖아요. 그런 지저분한 시선도 없었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해주는 사람이었고요. 저 담배 피우는 사람들 싫어요. 선생님도 그래서 처음엔 좀 그랬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운동도 하고 담배도 끊고..."
다시 한번 내 입에 입을 맞춰주는 수진이
"멋있잖아요? 나를 위해서 그렇게 멋진 러브레터도 써주고 끊기 힘들다는 담배도 끊고 수업도 즐겁고 같이 있으면 재밌고... 힘들게 하지도 않고요."
"..."
"저요... 오빠가 부러웠어요. 저도 저만 바라보고 저만 생각하고 저만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노력했는데 아무 의미도 없었잖아요."
수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 눈물이 너무나 애처롭고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선생님이 나타난 거에요.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날 위해서 다 버릴 수 있다고 해주는 사람. 안 반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나는 수진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수진이는 싱긋 웃더니 내 코를 손으로 콕 찍었다.
"장담하는데 선생님이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클 거에요."
나는 마음 한편에 항상 가지고 있던 짐을 하나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수진이가 나를 아버지의 대용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건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수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고 또 한편으론 더 여린 아이였다.
나는 수진이를 끌어안고 그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그래.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나는 너만 바라보고 너만 생각하고 너만 사랑하니까."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몸에 힘을 풀고는 나를 살짝 안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