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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화 〉선생님?(2) (90/301)



〈 90화 〉선생님?(2)

지금 이 상황에서 다정 강사가 이 집안으로 들어와 수진이와 내가 함께 있는 광경을 보고 학원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면...?

불현 듯   아내였던 혜정이가 학원에서 지랄발광을 하겠다던 그때가 떠올랐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느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는지 인터폰 속의 다정 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준수 강사님?'

"무, 무슨 일이시죠?"


 물음에 그녀가 화면 속에서 고개를 숙이더니 뭔가를 품에 안은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과일을 보내주셨는데 너무 많이 보내주셔서  나눠 드리려고요. 신세를  것도 있고 해서.'


다정 강사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아무래도 들고있던 과일을 다시 내려놓은 모양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문을 열어줘야겠다. 과일만 받고 돌려보내자.

"네. 잠시만요."

슬쩍 주방을 바라봤다. 수진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인덕션의 불을 끄고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현관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수진이가 현관에 벗어둔 신발이 보여  신발을 신발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후우~ 더워~"


밖이 많이 더운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손으로 부채질하고 있던 다정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다정 강사와 인사를 주고 받고 밑을 내려다보니 뭔가 과일이 많았다.

포도... 포도는 내가 저번에 5kg 1상자를 사온 게 아직 조금 남았는데 그래도 먹기는 다 먹었으니 받으면 고맙기는 하다.

사과도 있는 모양이다.

여름 사과는 조금 싱거울 텐데 그래도 몸에는 좋으니까 괜찮겠지.

적어도 10kg은 넘어 보이는데 이걸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그녀에게 부린 오지랖에 비해 대가가  많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두 상자를 모두 품에 안고 옮기려고 했으나 다정 강사가 재빨리 품에 상자를 안아버려서 다정 강사를 집으로 들일  밖에 없었다.


문을 열기 전에 수진이의 신발을 치운 것은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과일 2박스를 안으로 옮기고 나니 다정 강사의 몸에 떠오른 땀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근력이 강한 편도 아니니   상자의 과일을 옮기려고 낑낑거렸겠지.

그냥 연락을 줬으면 내가 알아서 가지러 갔을 텐데 괜히 미안해진다.

일단 물이라도 먹여서 땀이라도 식히게 해야겠단 생각에 보리차를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인 다정 강사.

다정 강사를 빨리 내보내야 한다. 다정 강사가 남의 집을 마음대로 뒤지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나와 수진이가 함께 있는 장면을 들키면 곤란하니 말이다.

뭐라고 말하고 다정 강사를 쫓아내야 할까.

물을 마시고 있는 다정 강사를 힐끔 쳐다봤다.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보다 차려입은 모습이다.


흰색으로 된 원피슨데 치마 끝단에 꽃문양 무늬가 새겨진 옷이었다.

평소에 집에서 저렇게 입고 지내지는 않겠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거나 하는 경우에 마주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땐 좀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단순히 과일을 건네주려고 입고 왔다기에는 조금 화려했다.

어딜 나갈 예정이었는데 겸사겸사 물건을 건네주러 온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힐끔힐끔 다정 강사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다정 강사를 쫓아낼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물을  마신 다정 강사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 혹시 카레 만드셨어요?"

다정 강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료가 애매하게 남아서요. 한 번에 다 처리하고 나중에 마트에 다녀오려고요."


그리 말하자 다정 강사가 우물쭈물 뭔가 미안한 기색을 풍기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저한테 반찬 나눠주셔서 그렇게 되신 거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식재료는 유통기한이 있으니 언젠가는 처리해야 했을 것이었고 과일도 이렇게 받았으니 내가 손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오히려  받았으면  받았지  받지는 않았다.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의사를 밝히니 다정 강사는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뇨. 오히려 이렇게 과일도 챙겨주시고 제가 고맙죠."


그리 말하며 다정 강사에게 괜찮다는 뜻을 전하자 표정이 조금 펴졌다.

긴장이 너무 풀어진 것일까 다정 강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읏!"


"...아직 식사  하셨어요?"

그렇게 물어보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정 강사.

황당했다. 그리고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친절한 이웃사촌 김준수가 여기서 뒤통수를 때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했던 행동에서 김준수가 해야 하는 행동은 그녀에게 점심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아주 약간 사양하면서도 자리에 앉고 내가 만든 카레가 맛있다면서 웃으면서 먹는다.

...지금은  된다.

수진이가 집에 있는 상황이다. 여친을 방치하고 다른 사람과 식사? 하물며 그게 여자면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라도 반드시 욕을 먹겠지.

지금까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것은 그냥 내버려두면 병원에 실려 갈 것처럼 어딘가 위험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정 강사는 알아서 자취를 시작했으며 자리도 잡아가고 있다.

그러니 더는 다정 강사를 초대해서 식사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는 상황이지.

하지만 지금까지 평범하게 같이 식사를 하던 인간이 갑자기 매몰차게 쫓아내는 것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내가 지금 속이 별로 안 좋으니 그녀에게 카레를 덜어서 주고 돌려보낼까?

아니. 그것도 이상하다.

카레는 향이 강한 음식인데 속이 안 좋은 사람이 굳이 이 날씨에 카레를 만든다고?


너무 어색한 변명이다.


카레... 카레. 그래, 그 변명이면 되겠다.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다정 강사가 고개를 들었다.


"준수 강사님?"

“친구를 불렀거든요. 여름이라 빨리 상하기도 하고 양도 많아서 한번에 처리하려고요.”


“아, 그러셨구나...”

다정 강사는 조금 아쉽다는 눈치를 보였지만 그건 아주 순간적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다정 강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레 냄새를 맡으니 저도 배고파졌네요. 저도 점심 식사나 해야겠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다정 강사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다가 나를 돌아보곤 살짝 웃었다.

“후훗, 준수 강사님도 친구분이랑 만나고 그러시는 군요?”
“저도 아싸는 아닙니다.”

“아하하하!”


다정 강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다가 도어락을 열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네, 다정 강사님도요.”

다정 강사를 배웅하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이 끝났다.


나는 조심스레 거실로 돌아왔다.


이제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었을 수진이와 대면해야할 시간이다.

 찝찝하다.

난 진짜 하늘에 맹세코 떳떳하다.


눈앞에서 배가 아파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낑낑거리는 사람이 있어 잠깐 도움을 줬을 뿐이고 그게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입장에선 그래도 수진이의 입장에선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저번에 수진이가 질투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침부터 찾아와선 나와 다정 강사가 사이좋게 지내는 게 상당히 짜증난다는 듯한 태도였지.


지금 내 행동이 수진이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어쩌면 수진이의 눈엔 바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친절한 이웃사촌 김준수냐.

역시 안하던 짓은 하면  됐던 게 아닐까.

그걸  상황이 되어서야 깨닫다니 나도 나다.

"수, 수진아?"


천천히 수진이의 이름을 불러보자 닫혀있던 내 침실의 문이 열리고 수진이가 걸어나왔다.

수진이의 표정은 일견 괜찮아 보였다.


다행이다. 수진이도 이걸로 트집잡지는 않을 모양이다.

전에 전셋집을 갔을 때의 광경이 다시 재현되는  알았다.

수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솥으로 걸어간 다음 밥을 퍼서 자리에 앉았다.

2인분의 카레...가 아니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자리에 카레를 얹은 밥을 내려놓았는데 그게 좀 그랬다.


아무리 봐도 내가 평소에 먹던 분량의 2배는 되는 분량이다.


그래. 2명이 앉았는데 3인분의 카레가 식탁에 올라와있는 상태다.


"뭐해요? 식어요."


수진이는 싱긋 웃으면서 얼른 앉으라고 보채왔지만 나는  웃음을 보고 안심할  없었다.

오히려 화를 내는  더 맘이 편할  같다.


그래도 일단 밥을 먹긴 먹어야지. 자리에 앉고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드니 수진이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해왔다.

"자, 잘 먹겠습니다."

괜찮은 건가? 아닌 건가?

나도 어색하게나마 수저를 들고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음~ 역시 선생님은 카레도 잘하시네요. 요리도 잘하시고 집안일도 잘하시고."

흠칫.


나는 입에 넣으려던 수저를 들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마무리가 아니었나? 카레 2인분으로 용서해준 거 아니었어?

나는 영 불편한 기색을 느끼며 천천히 카레를 씹었다.


이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먹고는 있는데 정말로 먹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선생님? 오늘은  이렇게 천천히 드세요? 평소대로 드세요."


입은 웃고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어? 어, 그래야지."


내가 평소와 같은 속도로 밥을 먹기 시작하니 수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이혼이시라고요? 잘 됐네요. 드디어 그년이랑도 안녕이네요."

수진이가 그년이라는 말을 내뱉으니  무섭다.


하지만 그 이상의 추궁을 해오지는 않으니 괜찮은 건가...?


"그렇지."

수진이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카레를 먹으려고 했더니 입가에 미소를 띤 수진이가 손을 내밀어왔다.


"응?"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수진이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휴대폰."


"..."

"주세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서 수진이에게 건네줬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를까봐 주기적으로 휴대폰도 검색 이력 같은  지우고 있다.

봐서 문제될 건 아무 것도 없다.

수진이가 한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나에게 돌려줬다.

수진이가  휴대폰으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심각한 짓을 하진 않았겠지.


나중에 수진이가 돌아가면 확인해봐야겠다.

그 다음부턴 서로 조금 답답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를 다 끝내고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고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수진이가 내 손에서 고무장갑을 빼앗아 갔다.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 자리에 앉아서 쉬고 계세요."

내가 하겠다고 말을 꺼내려다가 뭔가 노려보는 듯한 수진이의 눈빛이 무서워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약점이 잡힌 느낌이다.

아니, 근데 솔직히 내가 그리 잘못했나?

잘못을 하긴 했지. 여친이 있는데 다른 여자랑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거 같긴 해.

그래도 상식적으로  38살 먹은 아저씨다.

이제 한창인 사회초년생의 나 같은 아저씨를 좋아할리 없다고.


수진이, 너야 조금 상황이 특수해서 나한테 반한거지.


조금 억울했다.  그저 이웃에게 조금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 그저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이렇게 된 것 뿐인데...

다정 강사가 찾아왔을 때 여친이 집에 있으니 돌아가 달라고 했어야 했나?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잖아.

일단 학원에서는 유부남으로 통하고 있고 내 이혼을 아는 것은 기껏해야 인한 강사 정돈데.

억울함 반, 미안함 반으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으려니 싱크대에서 흐르던 물소리가  하고 끊겼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수진이가 양손에 컵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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