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성가신 이웃사촌(3)
"시,실례합니다..."
다정 강사는 매우 소심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러운 동작이다.
당연하겠지. 내가 지금까지 호의를 보였다고 해도 만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남자의 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그녀는 여중, 여고, 여대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여성이다.
남자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집을 둘러본다.
그래봤자 뭐가 나오지도 않고 특별한 게 있지도 않다.
수진이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기에 방은 깨끗이 치워둔 상태다.
"들어와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천천히 들어온다.
나는 비상용으로 구비해둔 약 상자를 꺼내 들었다.
배가 아프다면 부채표다.
나는 그녀에게 약을 건네주었다.
"마셔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가 건넨 약을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따고 마신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다 마시고 이걸 어쩌지? 라는 표정으로 들고 있는 병을 받았다. 병을 재활용 쓰레기로 버렸다.
엉거주춤 서 있는 다정 강사가 보인다.
남의 집에 맡겨진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움찔거리는 모습. 아무래도 상당히 겁을 먹은 모양이다.
"식탁에 앉아서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자 "네,네..." 라는 소리를 내며 식탁에 앉는다.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려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기는 했다.
다정 강사는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려나?
"식사는 하실 수 있겠어요?"
그렇게 물어보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좀 힘들 것 같아요."
"죽은 괜찮겠어요?"
"죽...이요?"
"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혹시 폐를 끼친다거나 뭐 그런 생각하지 말고 먹을 수 있으면 먹겠다 배가 아파서 도저히 못 먹겠다 싶으면 못 먹겠다. 그렇게 말하세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아무래도 식욕은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수진이가 자주 찾아올까 봐 생각보다 많은 식재료를 사뒀다.
...수진이가 자주 찾아올 수 없게 됐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속이 조금 더부룩하다고 했으니 야채죽으로 해야겠지.
밥은 있는데 불린 쌀은 없으니 그냥 밥을 이용해서 만들어야지.
야채를 다지고 참기름에 살짝 볶아서 밥을 넣고 물을 넣어서 끓였다.
적지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다정 강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좀 어색하겠지.
준비가 끝나고 다정 강사의 앞에 죽을 떠서 내려놓는다.
"드세요."
그녀가 언제부터 소화불량을 겪었는지 모르겠으나 먹지 않으면 탈수 증상이나 빈혈이 올지도 모른다.
일단 배가 편안한 음식이라도 넣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본인도 먹고 싶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수저를 들은 다정 강사
후후 불면서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눈이 살짝 커지고 천천히 다시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가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 맛있어요."
"네. 천천히 드세요."
내가 보고 있어도 어색하겠지.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소파로 향했다.
"준수 강사님?"
"보고 있으면 먹기 거북하잖아요. 다 먹으면 불러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앉아서 빌려 왔던 책을 읽는다.
오늘 중으로 비뇌도는 다 읽어야지.
다정 강사가 부를 때까지 한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수 강사님?"
응?
"준수 강사님. 저 다 먹었는데요..."
아무래도 다 먹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네.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낯을 살펴보니 확실히 처음 봤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느낌이다.
이제는 적당히 식은 냄비를 식탁 위에 통째로 올렸다.
"이거 가져가서 저녁으로 드세요. 상할지도 모르니까 냉장고에 집어넣고"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냈다.
메추리알 소고기 장조림, 멸치볶음, 콩자반, 진미채볶음, 김치를 꺼낸다.
"김치도 잘 드시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김치는 아니니까 알아서 잘 먹겠지.
반찬들을 나누어서 담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이 나왔다.
아무래도 혼자서 들고 나르기에는 좀 많아 보인다.
"혼자서 나르기에는 좀 많아 보이는데 잠깐 집에 실례해도 될까요?"
그렇게 물어보자 흠칫 몸을 떠는 그녀
나에게서 시선을 피한다.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아무래도 방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끓여준 죽이 담긴 냄비만 들고 방을 나갔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린다.
아무래도 다정 강사인 모양이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사우나라도 다녀온 듯 이마에 땀이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열심히 움직인 모양이다.
괜히 환자를 무리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평소에 치우고 살았어야지.
나는 방에서 반찬 통을 들고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냥 방 청소를 시키지 말고 방 앞에서 건네주고 올 걸 그랬나?
쓸데없는 일을 시켜버렸다.
약간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녀의 등을 쫓아간다.
그녀가 천천히 방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인다.
뭐 대단한 건 없었다.
애초에 같은 아파트니까 말이다.
가구가 조금 다른 정도밖에 차이가 없다.
나는 그녀의 식탁에 반찬 통을 내려놨다.
"이제 밥해서 반찬이랑 같이 먹어요. 나중에 다 먹으면 먹었다고 말하고"
그렇게 말해준다.
생각해보니 요 근처에는 반찬가게가 없나?
전셋집에 살 때는 종종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왔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이 초롱초롱한 느낌이 들었다.
감동이라도 먹었나? 솔직히 이 정도면 나라도 감동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을 흔들고는 방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
갑자기 큰소리를 내는 그녀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네?"
"차, 차라도 드시고 가세요..."
처음에는 무시하고 나오려고 하다가 그녀의 표정이 뭔가 힘겨워 보여서 거절하기가 조금 그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았다.
"네, 그럼 한 잔 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네!" 하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아까까진 불편해 보였는데 속도 많이 편해진 모양이다.
뭐 대단한 걸 준비해준 건 아니었다.
인스턴트 커피
내가 가장 빈번히 먹는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그 스틱으로 된 커피였다.
아무래도 며칠간 같이 다니다 보니 내가 이런 달달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챘겠지.
"잘 먹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았다.
아이스 커피였는데 간이 싱거운 것도 아니고 커피가 안 녹아서 떡이 지지도 않았다.
요리는 못 해도 커피 정도는 타는 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그녀는 무언가 입을 달싹이다가 살짝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그렇게 물어보며 살짝 눈을 내리깐다.
왜 친절하게 대해주느냐고?
친절한 것에도 이유가 필요한 것일까?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한지는 몰랐다.
아 혹시 요즘 웹소설의 주인공들이 선행을 할 때 고구마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심정이라서 그런 걸까?
남을 돕는데 이유를 필요로 하는 세대라니 참 세상 삭막해졌다.
라떼는 집에 부모님이 없어서 혼자 있을 때면 옆집의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놀라고 집으로 초대해줘서 그 집에서 이유 없이 놀다가 저녁도 얻어먹고 그랬었는데 말이다.
그녀와 나의 나이 차이는 9살인데 약 10년 동안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일까?
"돕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원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생각해보니 여자 집에 오래 머무는 것도 조금 그렇고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를 원샷해버리니 그녀가 조금 당황하는 게 보인다.
나는 커피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 점심을 안 먹어서요. 커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정 강사는 "저... 그게, 오늘 감사했습니다." 라며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배웅해줬다.
"별거 아닙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이사 떡을 돌리는 것도 그렇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도 그렇고 뭘 받으면 항상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그렇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그러니 이 정도 오지랖은 부려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아프다는 사람을 예 수고하십쇼 하고 지나치는 것도 뭔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집으로 들어갔다.
점심은 그냥 밑반찬에 국이나 대충 준비해서 먹어야겠다.
메인 메뉴를 만드는 게 귀찮았다.
***
일요일 오전
빌려왔던 책들을 다 읽어버렸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고 도서관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점심을 준비하며 읽어본 무협지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솔직히 무협지라고는 했지만 요즘 웹소설이랑 차이는 잘 모르겠다.
읽다가 뭔가 이게 뭐지? 싶은 단어가 나오면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린 것들도 많다.
후에 무협 용어를 정리한 내용을 살펴보니 과연 정신이 아득해졌다.
중국에서 온 장르답게 한자가 굉장히 많았고 그 내용도 방대했다.
처음 보는 순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 소설의 고유설정을 읽던 사람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수진이는 내가 무협지를 잘 쓸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맞는 말일까?
어쩌면 사전처럼 정리해놓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
무협지를 계속해서 읽다 보면 거부감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외워지는 단어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읽더라도 자주 나오는 용어들을 정리하며 분석을 한다는 생각을 해봐야겠다.
그렇게 요리를 준비하고 있으려니 초인종이 울렸다.
불을 낮추고 확인해보니 다정 강사였다.
문을 열어줬다.
"어쩐 일이세요?"
그렇게 물어보자 냄비가 내밀어 져왔다.
"죄송해요. 반찬 통은 사서 옮겨 담고 돌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해온다.
나는 서서 받기도 뭐해서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아직..."
밥을 먹으려던 찰나에 찾아오면 과연 그냥 쫓아내기도 뭐했다.
"같이 드실래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희미하게 풍겨오는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될까요?"
빈말이었는 먹는다면 줘야지 뭐...
"네. 앉으세요."
나는 그녀를 식탁에 앉혔다.
"밥은 얼마나 드세요?"
"반 공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앞에 밥그릇 놓아주었다.
메인 메뉴는 시판으로 파는 불고기 소스로 만들 불고기고 나머지는 그녀에게 나눠준 반찬이 끝이다.
쇠고기 미역국을 그릇에 나눠 담아서 나와 그녀 앞에 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자, 잘 먹겠습니다!"
이미 신세를 졌다.
사양하는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 모양이지.
잘 먹겠다고 인사하며 밥을 먹는 그녀를 잠깐 바라보고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자취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귀찮은 일이 될지는 몰랐다.
얼른 요리를 배워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