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여름의 마지막(2)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는다.
"김천은 진짜 어디에나 있네"
"그러게요."
배가 고파서 뭘 먹어야 고민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와서 찾아온 김천
내가 최초로 수진이와 데이트를 했을 때 식사했던 곳이다.
"그때 생각나네요."
"그러게"
요망했던 수진이가 떠오른다.
내 처음을 가져갔다고 했던 수진이
수진이를 보고 있으려니 지갑 속의 1만원이 자꾸 머리에 아른거린다.
"지갑 좀 줘보세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민다.
"지갑은 왜?"
"그냥요."
달라면 주긴 줘야지
나는 수진이에게 지갑을 건네줬다.
지갑을 받은 수진이는 지갑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안을 열어보고 뭐가 들었는지 살펴본다.
"2달러는 뭐에요?"
"그거 그 곧 중소기업 사장된다고 했던 준석이가 해외로 가족여행 갔다가 2달러 선물이라고 동창들한테 돌린 거야."
"흐응~"
그렇게 말하면서 지갑을 몇 번 더 둘러보더니 나에게 건네준다.
"지갑은 왜 살펴본 거야?"
"그냥요."
또 그냥인가
나는 지갑을 테이블에 올려뒀다.
볼것도 없다. 카드를 자주 써서 현금도 얼마 안 들어 있었는데 방금 다 써버렸고 말이다.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는 없으니 아무거나 구색은 하는 물건을 사서 들고 다니던 것이다.
수진이가 나를 싱긋 웃으면서 바라본다.
"왜?"
"제 1만원은 2달러랑 같은 위치에 넣어두셨네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물을 마셨다.
"후후후후 귀여워~"
38살이나 먹은 아저씨가 뭐가 귀여운진 모르겠으나 그녀에겐 귀여운 일인 모양이다.
방긋방긋 웃으면서 꽃받침을 하고 바라본다.
누가 귀여운지 모르겠다.
"밥 먹고 어디 갈까?"
"음~ 글쎄요?"
대중교통이면 3~4시간 걸리는 거리를 자차를 사용하니 1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산책로를 온종일 걷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버렸다.
우리는 서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밥을 먹었다.
"역시 어디든 다 비슷하네 김천은"
"그래서 좋은 거죠."
"그런가?"
밥을 먹으면서도 우리들의 고민은 이어졌다.
이 시국엔 생각보다 갈 곳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나도 수진이도 적극적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더 뚜렷하게 느껴진다.
진짜로 해수욕장이나 보러 가볼까?
"수진아"
"네?"
"그냥 드라이브하는 느낌으로 해수욕장 가볼래?"
"...그렇게 수영복이 보고 싶어요?"
"아니, 그냥 넓은 바다 보러 가자고"
솔직히 말하면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어차피 지금은 거리두기니 뭐니 말이 많아서 무리일 듯싶으니 내년을 기약해야지.
"그래요."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도 정해졌으니 얼른 식사를 마치고 이동해야지.
***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약 2시간의 운전
이렇게 장시간 운전을 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수진이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괜찮아요?"
"괜찮아"
솔직히 별로 괜찮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넓은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좀 풀렸다.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거리두기니 뭐니 했는데 이런 곳에서는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바다에 안 들어가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지?"
괜히 소설 속에서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게 아니다.
생명의 상징인 바다와 죽음의 상징인 겨울의 만남
넓은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평소보다 조금 자유로운 기분이 된다.
그렇게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나를 올려보고 있는 게 보인다.
"왜?"
"선생님, 아직 괜찮으세요?"
"응?"
"저, 오늘 늦게 들어가도 되는데...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히히하면서 웃는다.
야한건가?
이런 35살 그놈이 징그럽다고 뒷담화를 깐 게 어젠데 이러면 안 되지.
우리는 그렇게 잠시 바닷소리를 듣고 해변을 걷고 저녁이 아닌 군것질로 식사를 때웠다.
적당히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닷가가 보인다.
경치가 참 예쁘다.
여름은 해가 길다.
수진이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진작에 돌아갔을 시간
수진이를 돌아본다.
수진이는 웃으면서 뒷짐을 지고 있다.
뭘까?
"짠!"
수진이가 웃으면서 뭔가를 내밀어 온다.
"불꽃놀이?"
"네"
"일본 아니라면서"
"한국도 불꽃놀이 하잖아요."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만.
나는 그걸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 생각해보니 지포라이터는 방에 장식품으로 두고 있는 상황이다.
"혹시 라이터도 사왔니?"
"그럼요."
다행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포라이터를 방에 장식품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봤던 모양이다.
역시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
우리는 적당히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닷가를 걸어 다니다가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불꽃놀이라니 솔직히 해본 적이 없다.
남자들이랑 이런 걸 하는 놈들이 몇 명이나 되겠나
그냥 TV에서 즐기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수진이는 신이 나서는 여러 가지 꺼내보며 불을 붙여본다.
치이익 퐁!
큰소리와 함께 퐁 하고 날아가지만, 그냥 탁타다다닥 소리가 나며 싱겁게 꺼진다.
"어라?"
본인도 생각보다 허무했는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
"뭘 기대한 거야?"
"적어도 펑! 소리는 날 줄 알았는데..."
"원래 다 이런 거지."
그 이후로도 약간 허무한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솔직히 진짜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초라했다고 봐야지.
하지만 단둘만의 여름을 마무리 짓는 행사로는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남들이 하는 연애라면 이렇게 약간 조용하지만, 비밀스러운 불꽃놀이는 딱 우리의 연애와 맞지 않을까?
쏘아올리는 불꽃놀이가 끝나고 손에 들고 노는 불꽃놀이만이 남았다.
나와 수진이는 서로의 불꽃놀이에 불을 붙여주고는 손을 잡고 서로의 옆에 붙었다.
초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름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로맨틱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화려한 연애만이 답은 아니다.
태양이 바다에 녹아 사라지고 별빛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 시간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서로를 비추는 불빛도 굉장히 아름답지 않은가?
수진이도 같은 생각인지 나의 손을 잡는 힘이 조금 강해졌다.
우리는 초라하지만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분명히 피곤해야 할 텐데 알 수 없는 근질거림이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수진이를 안고 싶다.
수진이는 어떤 생각일까?
"선생님"
"응?"
"저, 사실은 오늘 외박한다고 말하고 나왔어요."
"응?"
"어차피 엄마는 제가 사고 친 적이 없어서 알아서 잘하라고 간섭을 잘 안 하세요."
수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신호등에 걸려서 차가 멈추자 수진이가 나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선생님, 저 사랑해요?"
그 소박했던 불꽃놀이처럼 희미한 불빛만이 감도는 차 안에서 수진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본다.
왜 여자들은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확인하려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며 약간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사랑해"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차 시트에 몸을 맡긴다.
공기가 굉장히 어색해졌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 남녀가 정사에 들어가기 전의 그 어색한 침묵
지금 이 차를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딱 그 분위기였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댔다.
옆집의 이다정 강사를 피하고자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수진이를 방으로 데려왔다.
"후우~ 뭔가 첩보물 찍는 듯한 느낌이네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고는 자연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씻으세요."
"어"
이제는 서로가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투투데이
솔직히 조금 귀찮다고 생각은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념한다는 행동이 어색하고 귀찮아진다.
30이 되어서는 생일을 굳이 챙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게 연애라는 것이겠지.
혜정이와의 만남은 연애가 아니었다.
38살이 되어서야 풋풋한 연애를 하다니 나도 참 늦었다.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수진이가 자연스럽게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솔직히 같이 씻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참았다.
아직은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자.
기회는 언제든지 오는 법이니까.
수진이의 씻는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말리고 스킨로션을 바르면서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사소했다.
그저 같이 해바라기를 보러 다녀오고 바다를 봤을 뿐이다.
끝에 수진이가 장난처럼 꺼내 든 불꽃놀이로 잠깐 시간을 보냈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다가 돌아왔을 뿐이다.
너무나 소박한 투투
하지만 화려한걸 즐기지 않는 나와 수진이 다운 하루였다.
어차피 수진이는 머리가 길어서 샤워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
나는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메모장에 적어넣기 시작했다.
지금 느낀 이 감정을 소설 속에서 녹여낼 일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소설은 상상보다는 체험에서 오는 부분이 더 크다고 느꼈으니까
메모장의 반짝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열심히 글을 써넣고 있으려니 화장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물소리가 그쳤다.
"선생님?"
수진이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나를 바라본다.
상기된 얼굴과 희미하게 올라오는 김
오늘도 아름다운 와이셔츠 차림이다.
"뭐하세요?"
"어 그냥"
수진이는 내가 그렇게 조금 뜸을 들이자 아하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봐도 되나요?"
"보지 마"
"보여주세요~"
"나중에 쓸게"
"진짜요?"
"어, 그러니까 머리나 말려"
수진이는 진짜로 나중에 볼 거에요? 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머리를 말리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나는 수진이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수진이가 없던 1주일은 굉장히 길었다.
즐겁다고 생각했던 학원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했고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일에 치여서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하루가 1주일보다 길고 알찬 느낌이 들었다.
이 감정을 최대한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메모장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 적고 노트북을 끄니 수진이가 머리를 말리던 소리가 끊긴다.
나이스 타이밍
수진이는 헤어드라이어를 내려놓고는 나에게 다가와서 내 등에 포옹을 한다.
나는 잠시 수진이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누가 먼저 신호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