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여름의 마지막(1)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생각에 잠긴다.
수진이가 왜 이렇게 일찍 집에 찾아왔을까?
아니 사실은 일찍이 아니고 점심쯤일까? 너무 당황해서 시계도 못 봤는데 사실은 늦잠을 잔 것일까?
그리고 내 옆 옆집이 이다정 강사의 방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문앞에서 마주쳤나?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술과 잠기운이 물과 함께 씻겨나가며 점점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서둘러서 확인을 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몸의 물을 닦아내고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수진이가 기다리는 식탁으로 향했다.
"지금이 몇 시야?"
"으음... 10시 10분이요."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보여준다.
이른 아침은 아니구나
식탁에 앉으면서 수진이를 바라본다.
수진이는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해보라는 듯 바라보고 있다.
"그... 옆 옆집에 이다정 강사가 산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그거요?"
수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타게 됐거든요. 조금 당황해서 가만히 있으려니 그분이 먼저 엘리베이터 층을 눌렀는데 선생님이 사시는 이 방이랑 같은 층이라서 2층 정도 위에 층을 누르고 내렸어요."
하아... 그랬군.
수진이의 재치에 구해졌다.
여기서 같은 층을 눌러버렸다면 조금 곤란한 상태가 됐을 거다.
수진이는 이다정 강사를 봤지만 이다정 강사는 막 학원에 와서 학생들 얼굴을 다 모르는 게 다행이지.
아마도 아침 일찍 쓰레기라도 버리고 올라오다가 수진이랑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게 아닐까 싶다.
운이 좋았다. 수진이가 먼저 층을 눌렀는데 이다정 강사가 탔으면 상당히 꼬일 뻔했다.
"왜요? 걱정했어요?"
"어"
"겁도 많으시긴"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수진이는 밥을 먹고 온 모양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밥을 먹으면서 물어보자 수진이는 살짝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잠시 바라보고 있으려니 "휴대폰 가져와 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마저 먹고 일어서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휴대폰을 가지러 갔다.
배터리는... 아직 20퍼는 남았다.
휴대폰을 켜서 대기화면을 열어보니 어플이 뜬다.
오늘이 사귄 지 22일째 되는 날이라고 표시된다.
...과연
투투였구나.
처음엔 이런 건 급식들이나 챙기지 쯧쯧 하려다가 수진이가 급식이란 걸 알게 됐다.
갑자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느낌이다.
면목없는 표정을 지으며 수진이에게 간다.
수진이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다.
혼신을 다해서 삐쳤다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미안"
"미안한지는 아나 봐요? 전 여기서 누가 요즘 투투를 챙기냐고 할 줄 알았는데"
"나밖에 없잖아. 투투도 100일도 200일도 1년도"
수진이가 본인 입으로 그랬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라고 그러니 챙길 수 있는 기념일은 다 챙기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하자 수진이는 한숨을 쉬더니 어느 정도 용서할 마음이 생겼는지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기념일인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불편하다.
그저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집에서 평범하게 공부하고 책보고 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좋다고 했는데 과연 기념일에도 그러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
"뭐 하고 싶은 거나 가고 싶은 데나 없어?"
오늘은 투투다.
솔직히 투투가 뭘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녀가 기념하자면 기념일이 되는 것이지.
수진이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좀 많이 고민되기는 할 거다.
거리두기라며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아서 갈만한 곳이 따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투투라고 찾아왔는데 집에서 책이나 읽고 공부나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수진이는 한참을 생각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게 뭐에요?"
"여름?"
여름 하면... 나는 여름을 떠올리면서 수진이를 바라본다.
오늘은 한층 시원해 보인다.
오프숄더형의 하얀색 원피스
청초하면서도 드러난 어깨선이 야릇한 느낌을 주는 패션이다.
몸매가 강조되는 허리라인도 예쁘다.
그걸 보고 있으니 바다를 안갔네
"바다?"
"...변태"
그렇게 말하면서 도끼눈으로 노려봐온다.
아니 바다가 왜 변태야
"불꽃놀이?"
"여기가 일본이에요?"
한국도 불꽃놀이 하긴 하잖아...
불꽃놀이라 불꽃놀이
"꽃이라도 보러 갈래?"
"네?"
"여름 하면 해바라기지. 곧 지기 전에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의 마지막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나름 낭만이 있고 좋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문을 열어서 혹시 이다정 강사와 마주치지 않도록 좌우를 잘 살피고 수진이를 먼저 내보냈다.
수진이를 내보내고 약 3분 정도 기다린 후 내려간다.
이렇게까지 하면 마주치는 일은 없겠지.
수진이를 태운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건다.
"어디로 가실 거에요?"
그렇게 물어보는 수진이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 날씨에 밖에 아무 대비도 없이 나가려면 얼굴이 탈 거 같다.
새하얀 얼굴이 그을리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우선 모자라도 하나 사자."
"모자요?"
그래. 밀짚모자라도 하나 사서 가야지.
나는 수진이를 태우고 운전해서 D마트로 이동해서 밀짚모자를 하나 챙기고 혹시 몰라서 양산도 하나 샀다.
그걸 보더니 수진이도 밀짚모자를 하나 집는다.
"응?"
"선생님도 얼굴 타잖아요."
"별로 상관없는데?"
"그냥 쓴 모습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고 보니 커플룩을 입은 커플이 보인다.
과연 커플룩인가?
"커플룩이네?"
그렇게 물어보자 수진이는 잠깐 흠칫하더니 모르는 척 내 말을 무시했다.
귀여운 녀석
차를 몰아서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해바라기밭으로 운전을 했다.
차안은 수진이가 틀어놓은 노래와 수진이의 흥얼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이전에는 본인의 휴대폰 스피커로 틀던 노래를 이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자동차의 스피커와 연결해서 틀어놓았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수진이와의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몰았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자 "졸음운전은 안 돼요?" 라면서 옆에서 쫑알거리며 입속에 젤리니 사탕을 넣어주는 수진이와 함께 여름의 마지막을 확인하러 간다.
그녀에게는 고3 여름방학의 마지막이고 또 우리의 투투
매우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
차를 세우고 천천히 길을 걷는다.
과연 더웠다.
밀짚모자로는 혹시 부족할 것 같아서 양산도 하나 사길 잘했다.
수진이에게 밀짚모자를 씌워주고 양산을 들려준다.
하얀색 원피스와 챙이 넓은 밀짚모자, 양산까지 쓰니 그야말로 로판 여주같구나
귀엽고 아름답다.
청순하고 섹시하다는 모순적인 존재
수진이는 그런 존재였다.
"어때요?"
웃으면서 양산을 양손으로 잡고 돌아보는 순간 작게 펄럭이는 치마 밑단과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매우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울려. 그 로판에 나오는 악녀물 주인공 같아"
"제가 악녀라는 거에요?"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
악녀물 주인공들은 다 예쁘다고 말하고 싶었다.
수진이는 한 손으로는 양산을 잡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제법 더울 텐데도 나와 있을 때는 손이나 팔을 잡아온다.
우리는 그렇게 느긋하게 산책로를 걸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하자 해바라기밭이 보여왔다.
"와아!"
수진이는 신이 난다는 것처럼 큰소리를 냈다.
일면이 해바라기로 가득하다.
다행이 아직 꽃이 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잘 관리된 산책로를 걷는다.
수진이를 내려다본다.
이런 밀짚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안보이네
수진이는 내 손을 놓더니 조금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해바라기를 등지고는 나를 바라본다.
"와! 진짜 예뻐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수진이
그 순간 가볍게 바람이 불면서 수진이의 머리가 휘날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여서 순간적으로 내가 하꼬망생이 아니고 준호처럼 환쟁이였다면... 하고 생각해 버렸다.
그렇기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선생님?"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오는 수진이
나는 수진이를 향해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사진이라도 찍게"
그렇게 말하자 뭔가 부끄러운 듯이 몸을 이리저리 꼬며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본다.
아무래도 친구가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잘 없겠지.
영 어색해 보인다.
"아까처럼 웃어봐"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더욱 인상을 쓰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아쉽다.
방금전은 정말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는데 말이다.
어떻게하면 수진이의 방금 그 표정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수진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는 수컷이다."
"네?"
"나는 수컷이다. 너를 범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내가 썼던 메모장이 떠올랐는지 피식 피식 웃기 시작한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예쁜 풍경을 내버려두고 그런 말이 하고 싶어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온다.
네가 웃어준다면 그럴 수도 있지
찍은 사진을 내려다본다.
생각해보면 혹시 사진을 찍었다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지금까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이제 그런 배려를 할 필요는 없어졌는데 말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내려다보던 수진이도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나에게 팔짱을 낀다.
"수진아?"
수진이의 팔은 뜨거웠다.
본인도 더위를 탈 텐데 왜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수진이가 방금까지 서 있던 해바라기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렇게 데려가곤 해바라기를 등지고 휴대폰을 꺼내 든다.
"생각해보니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이 1장도 없었네요. 지금 찍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셀카모드
수진이는 재주도 좋게 우리의 사진을 찰칵하고 찍었다.
그 사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히히"
그렇게 웃으면서 팔짱을 풀고 다시 내 손을 잡아온다.
약간 습한 느낌이 드는 손
아직 한여름이라고 생각되는 날씨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땀이라든지 날씨를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고 잠시 산책로를 걸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버리면 뭔가 아쉬운데 말이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으려니 포도를 파는 농가가 보였다.
그래 온 김에 포도라도 사서 갈까?
나는 농가에 가서 포도를 한 상자 사기로 했다.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5kg 상자를 한 상자 샀는데 생각보다 고가였다.
지갑의 현금이 부족해서 수진이에게 1만 원을 빌렸을 정도다.
"지갑에 1만원 있으신데 왜 빌려 달라 했어요?"
수진이는 그렇게 물으며 나를 바라본다.
조금 부끄러운데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만원. 너랑 처음 데이트했을 때 너한테 받았던 돈이거든."
그렇게 말하고 포도 상자를 트렁크에 집어넣고 운전석으로 이동하려고 하니 수진이가 등을 꼬옥 끌어안아 온다.
"자꾸 사람 설레게 하지 말아요."
어디에 설렐 요소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진이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였나 보다.
더울텐데 나를 끌어안는 손에 힘이 가득했다.
우리는 더우니까 차에 타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한동안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