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1)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화요일
짧은 휴가가 끝나고 학원에 왔다.
수진이는 이번 주가 끝날 때까지 방학을 보내겠지.
갑자기 매우 우울한 기분이 든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말은 필요 없으니 학원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이제는 주말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며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우습다.
수진이랑 보냈던 그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주말이 벌써 이렇게 그리워지다니
"아 준수 강사님 그거 보셨어요? 작가소환"
"네 봤죠. 재밌었어요."
"그죠?"
최신화까지 전개된 수진이가 쓴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의 선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전에는 마왕과의 싸움을 위해 수명을 대가로 바쳤었던 주인공
하지만 이번 회차는 그런 제약이 없었기에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지 못했던 마을을 지킨다.
주인공에게 개 털린 용사는 현실부정을 하면서도 결국 살아야 하기에 일행과 여행을 계속한다.
구르고 또 굴렀지만 능숙하게 흘러가진 않는 모험
그 끝에 사냥도 실패해서 오늘도 굶겠구나 싶었던 일행은 운 좋게도 마을을 발견한다.
하지만 용사 일행은 거지꼴에 돈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망설이는데 마을의 촌장과 마을주민이 용사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용사님 덕분에~ 용사님 덕분에~
마을주민의 입에서 오르고 내리는 용사의 칭호
용사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도 마을주민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노숙을 하기에는 너무나 굶주렸고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용사 일행들을 위해서 축제를 열겠다는 마을의 촌장
용사 일행들은 기쁜 마음으로 마을주민과 어울리지만, 용사는 배가 채워지자 의심을 한다.
마족과 마왕이 있고 중세시대의 경제기반을 갖춘 세계에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푼다? 무언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축제를 조용히 즐기고 있던 용사는 마을주민과 용사 일행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마을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들이 있었고 다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고작 동화 1장으로 구해준 일행의 이야기
그놈들이다.
용사는 이를 빠득하고 갈았다.
그들은 용사의 동료라고 본인들을 소개하고는 후에 용사가 나타나면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용사는 갑자기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났고 그렇게 그 장소에서 도망쳤다.
용사는 마을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는 화톳불을 등지고 서서히 어둠만이 가득한 숲으로 향했다.
분했다.
역시 그 새끼는 빙의자가 맞는 모양이다.
눈이 뜨겁다고 느껴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너무나 눈부신 별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고인 눈물에 흐릇해진 별빛들
용사는 머리에 손을 뻗었다.
손에 쥐어지는 화관. 촌장의 딸이 마을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만들어준 화관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화관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온다.
나는 병신새끼였다.
나는 은연중에 이 세계는 책 속의 이야기고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의 NPC처럼 생각했다.
그렇기에 성녀가 엑스트라 놈에게 붙어가는 것을 보고 히로인을 NTR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현실이었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맡아지고 입으로 먹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진다.
고작 도적 떼를 죽이고 덜덜덜 떨던 한심한 모습을 떠올려본다.
사람을 죽인 것에 두려워했다.
현실과 따로 놀던 사고가 천천히 현실을 따라잡는다.
이 마을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마을은 원래의 용사 일행이 최초로 들렀을 때는 이미 마족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후의 마을이다.
용사 일행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1줄로 비참하게 찢어발겨진 주민을 묘사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현실이다.
이름도 모르던 촌장과 그가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아들, 사랑스럽게 미소 짓던 딸이 떠오른다.
화관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주인공의 수명과 답답한 전개에 분노한 독자들에게 엿 먹으라는 기분으로 주인공과 마왕을 함께 산화시켜버리며 이야기를 끝맺어버렸다.
그 벌인 것일까?
처음에는 빙의물 클리셰처럼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그들은 살아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또 연인들과 웃고 떠드는 마을주민을 떠올려본다.
난생 처음 보면서 용사라고 도와줘서 고맙다며 웃으면서 먹을 것을 나눠주던 주민들이 떠오른다.
...옷이 낡고 해졌으며 몸도 얄상하다.
본인들도 넉넉하지는 않을 것인데도 누군가와 나누는 사람들
나는 그런 존재들을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이유로 수만, 수십만 아니 수백만을 죽게 만드는 이야기를 쓴 사람이다.
그것도 고작 1줄로 그들의 삶을 유린했다.
곧 그들의 죽음이 다가온다.
도적 떼를 죽이지 못해 벌벌 떨던 나의 손은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미래를 만든 손이다.
용사님의 가호를 내려달라며 아이를 데려온 가족을 떠올린다.
나의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꽈악 잡았던 그 감촉이 떠올라온다.
따뜻했다. 묵직했다. 살아있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나는 작가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웹소설은... 누구나 좋아하는 해피엔딩이 국룰이다.
독자따위에게 질 수는 없지.
손에 들고 있던 화관을 다시 머리에 쓰고 천천히 화톳불이 빛나는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용사
무언가를 털어낸 용사는 매우 홀가분한 표정이었고 별빛은 환한 빛으로 걸어가는 용사를 차분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숲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감정과잉 이야기가 좀 나오기는 했죠."
"네, 그리고 그게... 설마 인류애가 되진 않겠죠?"
"설마요."
"그죠?"
시발 설마 그러겠나?
근데 빌런으로 나오던 용사가 현실을 깨닫고 진정한 용사가 되는 모습이긴 한데 왠지 그분들이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다.
용사가 주인공을 증오하긴 하니 그런 장면이 나오진 않겠는데...시발 불안해!
수진이에게 물어봐야겠다.
"크흠"
헛기침소리
나와 인한 강사는 잡담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낸 소리인 모양이다.
양수호 35세 독신
깔끔한 외견에 안경을 껴서 지적인 느낌이 나는 영어강사
그는 우리를 힐끔 봤다가 다시 고개를 내린다.
영어신문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나와 인한 강사는 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렇게 대화를 끝냈다.
양수호 강사 확실히 인서울에 상당히 좋은 대학교를 나왔다고 들었다.
외국에서 몇 년 살고 왔다고 들었던가 안 들었던가 가물가물하다...
솔직히 인한 강사 이외엔 웃으면서 떠드는 사람이 없었기에 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요즘 눈에 밟히는 인간이다.
이름이 준수와 수호라 뭔가를 지킨다는 느낌으로 비슷한 느낌이었고 상대에게 깔끔한 인상을 주기 위해 외견에 신경을 쓰는 모습 또한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나와 이 인간의 궁극적인 차이라면 바로 저런 것이겠지.
보란듯이 영어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이 참 재밌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
아마 끼고 있는 안경도 차고 있는 시계도 입고 있는 양복도 메이커일거다.
내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한 모습
은연 중에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나와 인한 강사가 웃고 떠들던 웹소설이라는 저급한 문화를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나는 이 인간이 싫다.
꼭 수진이를 만나기 전의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
자기혐오와 닮은 감정을 느낀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지만, 체면을 차렸고 그는 주변에 관심이 아주 많다는 것이지.
학원의 독신 강사들이나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는 접수원 등에게 묘하게 어필하는 분위기가 있다.
역겨운 새끼
나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
***
"그래서 어떤 플랜으로 하실 생각이시죠?"
전화로는 후임이 온다고 들었지만, 학원의 일정은 알아야 한다.
후임이 온다고 해서 내가 바로 학원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험이란 어렵고 수험생이란 민감하다.
아침에 미역국만 먹어도 1문제 더 맞을 일을 1문제 더 틀리는 수가 생기는 것
그것이 수험생이다.
이번년도 수능이 끝날 때까지는 내가 일을 맡아서 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 지인의 딸이 학원강사는 처음이라서요."
"예? 처음이라고요?"
"네. 아무래도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다가 잘 안 풀려서 학원강사를 한다는 듯해요."
"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본다.
지금 고3 수험생을 가르치는 대타를 뽑는데 강의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뽑겠다는 말인가?
혈연, 지연, 학연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아 그래서 이 시기인가요?"
"네, 준수 강사님이 그 노하우? 뭐 그렇고 그런 거죠 예..."
본인도 조금 민망하기는 한가보다.
아무래도 약점이 잡혔든지 아니면 그 지인이 상당히 친한 분이어서 거절을 못 한 모양이다.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좀 전수해주라는 모양인 느낌이다.
솔직히 내가 13년 강사 일을 해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예. 어차피 제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생긴 일이니 유종의 미는 거둬야죠. 언제 나오기로 했습니까?"
보이지는 않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느낌으로 우물쭈물하던 원장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이번주 금요일에 인사를 하러 온다고 했습니다. 잘 좀 부탁해요."
아무래도 이사는 해야겠지. 그래도 금요일이라니 상당히 빠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잡담을 나눈 이후에 원장실에서 나왔다.
일단 금요일에 온다고 했으니 오늘 이사를 와서 이틀 동안 청소를 하고 금요일에 인사를 하러 오는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럴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인수인계용 자료라도 조금 준비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수진이에게는 너무나 아쉽지만 그런 내용의 카톡을 보냈다.
수진이는 알겠다고 카톡을 보냈고 자기 전에 전화하라는 내용을 보냈다.
오늘 수진이랑은 강의실에서 잠깐 본 것밖에 못 봤다.
수진이를 만나는 시간이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야.
...뭐 실제로 수명이 줄어들어 가고 있기는 하다만
날씨가 너무 더웠기에 끌고 나왔던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저번에 빌렸던 책 10권을 반납하고 다시 빌려 와야지.
인수인계용 자료를 만들면서 남는 시간에 책을 좀 읽으면 되겠지.
운동도 해야 하고 수진이 소설도 봐야 하고 전화도 걸어서 잘 자라고 인사도 해야 하고 말이다.
마치 수험생이 된 거 마냥 바쁜 일상이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인생에 충실함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도서관에 도착하니 평소와 같은 사서가 책을 정리 중이었고 나는 책을 반납함과 동시에 또 10권을 가져와서 빌린다.
사서는 평소와 같은 대사를 하며 책을 빌려준다.
그렇게 책들을 챙기고 집으로 향하니 뭔가 사다리차가 있다.
누군가 이사라도 오는 모양이다.
솔직히 관심은 없다.
그런데 왠지 사다리차가 사다리를 댄 위치가 내 집 위치랑 비슷한 거 같은데?
나는 그냥 슬쩍 바라만 보다가 건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는 다시 주말이 찾아올 때까지 조금은 바쁘게 보내야 할듯한 기분이다.
얼른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
주말이 오면 수진이의 그것도 끝이 날것이다.
진짜 죽었다. 이수진
아... 물론 섹스하고 싶다고 보자는 건 아니고 뭐 겸사겸사 그렇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