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이런건 무협이 아니야!!!(3)
"그럼 잘 들어가고"
"네, 선생님도 편히 쉬세요. 내일 또 놀러 올게요~"
"그래그래"
"자기 전에 잘 자라고 전화해주셔야 해요?"
"늘 하잖아"
"아무튼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는 손을 흔들면서 나갔다.
수진이가 나가고 나니 갑자기 몹시 고요해졌다.
애초에 조금 전까지 수진이는 공부를 했고 나는 책을 보느라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게 큰 차이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이 방이 넓고 조용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도 쉬는 날이고 수진이가 찾아오는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힘이 나는 느낌이다.
수진이를 보내고 다시 2권을 더 읽고 밥을 해먹고는 또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벼워서 금방 읽어지는 내용이다.
예전에는 이런 양판소가 지겹니 뭐니 했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사라졌다.
확실히 먼치킨은 시원시원한 맛이 있고 주인공이 개고생하는 소설은 뽕이 차오르는 순간이 있다.
장르소설은 어차피 시간을 효율적으로 낭비하게 해주는 취미다.
굳이 작품성이니 예술성이니 그런 걸 생각하는 새끼가 병신인 거지.
앉은 자리에서 7권까지 책을 읽고 샤워를 했다.
약간 차가운 물이 방금전까지 집중해서 읽느라 혹사했던 눈과 머리를 식혀주는 기분이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나머지 3권도 마저 읽어서 거의 10시간 동안 책만 주야장천 읽었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비뇌도
주인공이 하렘을 차리지도 않고 호쾌한 면이 있어서 여자애들도 좋아할 만한 것 같기는 하다.
40권 정도까지 나왔는데 이후에는 어떤 무협지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때는 단톡방이다.
30후반 아재놈들이라 무협지를 보고 자란 세대다.
아직도 무협지를 보는 놈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나 비뇌도 읽고 있는데 이거 다 보고 읽을 거 추천 좀'
나는 잠깐 기다렸다.
어차피 이놈들은 이 단톡방을 무음 처리해놔서 반응이 느릴 거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른 반응이 돌아온다.
'뭐여, 준수아재 무협지 읽기로 했음?'
'ㅇㅇ'
오늘은 세태와 야합한 남자, 딸내미를 혼자서 키우는 남자 준호가 먼저 반응을 해줬다.
'내가 작업한 소설 무협진데 좀 읽어보쉴?'
그렇게 말하면서 본인이 일러를 담당한 소설을 추천해준다.
나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깐 카톡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몇 명이 내용을 확인했는지 숫자가 줄어든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준석이가 반응했다.
'비뇌도? 이 새끼가! 갈!'
이렇게 내용이 올라오자마자 5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핑!'이라는 카톡이 올라왔다.
D씨인 민석이다.
'이런건 무협이 아니야!!!'
화를 내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이미지를 올린다.
그걸 본 민석이는 'ㅋㅋㅋㅋ 무틀딱 또 지랄 났네'라는 카톡을 올렸다.
'어이 무틀딱 서명하시오. 비뇌도, 비천흑마, 시한부 천재는 전통무협이다.'
'갈!!!'
지들끼리 뭔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따라가지 못하겠다.
그러고 있자니 해병대를 나와 가오만 잡는 병진이가 카톡을 하나 올린다.
'모든 소설은 목향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근본인 목향을 읽도록'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는 카톡을 보내지 않는다.
목향... 목향 그러고 보니 유행하던 소설이긴 하다.
저걸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목향충 어서오고'
또 이런 이상한 카톡이 올라오기 시작했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이젠 수진이에게 전화하고 잠이나 자야지.
'전화 가능해?'
그렇게 카톡을 보내자 1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수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어, 그래 수진아"
'오늘은 조금 빠르시네요?'
"어, 피곤해서 좀 일찍 자려고"
'역시 무리하신 거죠? 후훗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흐아아아앙! 선,생님!!!"
'아이씨! 자꾸 꼴 받게 할래요?!'
수진이가 소리를 지르듯이 화를 낸다.
그러다가 지금이 밤이고 어머니가 집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금 소리를 낮춘다.
'자꾸 그러지 마요.'
"알았어 알았어."
'자꾸 그러면 다음엔 안 해줄 거에요.'
"미안"
아 여기서 그런 걸로 협박하는 건 좀 비겁하지
솔직히 본인도 즐길 만큼 즐겼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오?
내 짧고 빠른 대답이 웃겼는지 후훗하고 웃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뇌도 어땠어요? 재밌었어요?'
"어, 읽을만하더라"
'어디까지 읽으셨는데요?'
"다 읽었는데?'
'와... 진짜 빨리 보시네요. 10권인데 그걸 다 읽었어요?'
예전부터 좀 빨리 읽기는 했다.
무협지에 생소한 단어가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굳이 기술명을 열심히 읽을 필요도 없고 작가가 지문낭비를 하려고 늘여 쓴 부분도 많아서 생략도 해서 빨리 읽었지
"어, 그래서 내일도 도서관에 가서 반납하고 빌려 오려고"
'그러면 내일은 점심쯤에 갈까요?'
"편한 대로 해. 어차피 비번도 아는데 뭐"
'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거에요?'
그건 아닌데
"아니, 수험생이니 너 편한대로 해야지"
그렇게 말하니 수진이는 알겠다고 하며 잘자라고 인사를 한다.
"그래 잘 자고"
'네~ 제 꿈꾸시고요.'
"야한 꿈으로 꿔야지"
'아 진짜 변태 같아'
그렇게 말하고 후훗하고 웃고는 진짜로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수진이와의 대화를 마치면 정말로 하루가 끝난 기분이 든다.
하아. 조금 피곤하긴 하다.
얼른 자야지
***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집에 도착하니 수진이는 이미 집에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다.
뭔가 진짜로 아내가 맞이해주는 기분이다.
"다녀왔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나머지 10권을 빌려 왔다.
수진이도 오늘은 공부할 생각으로 왔는지 이미 식탁에 문제집과 공책, 필기구가 올려진 상태였다.
"뭔가 마지막 휴일인데 아쉽지 않아?"
그렇게 물어본다.
수진이는 으음~ 소리를 내며 샤프로 본인의 입술을 누르고 있다.
그러다가 싱긋 웃고는 나를 바라본다.
"이것도 장소만 바뀌면 도서관 데이트 비슷한 거 아니에요?"
생각하기 나름이기는 한데 뭐 비슷하기는 할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솔직히 데이트라고 유별난 거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거 하는 것도 좋긴 한데..."
그렇게 말하면서 장난칠 때 싱긋거리는 그 특유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역시 서큐버스가 맞나 보다. 뒤에 꼬리가 보이는 듯하다.
"상대가 누군가가 더 중요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하긴, 나도 그냥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도 제법 즐겁긴 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 데이트도 훌륭한 데이트긴 하지."
"저 사실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보내는 게 더 좋아요."
사실이고 나발이고 그래 보였다.
친구도 없는데 밖에 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진이에게 공감을 표할 뿐이다.
"나도 이런 거 좋아해"
수진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씨익 웃으면서 "그래요?"하면서 물어온다.
뭔가 싶었더니 발로 내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니 수진학생. 공부 안 해?"
"이것도 공부는 공부에요. 체육"
수진이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니 혈액이 하반신으로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느낌으로 움직이려고 하니 수진이가 허벅지에서 발을 뗐다.
"한동안은 못해요."
"엉?"
"그날이에요."
"..."
씨익
수진이가 장난이 성공했을 때의 그 못된 표정을 지어온다.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생리라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진짜 사람 빡치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다.
너는 진짜 끝나면 죽었다.
그런 심정은 숨기고 시원한 물로 열기를 다스렸다.
"화났어요?"
"어"
"삐쳤어요?"
"어"
"용서해 주세요"
"아니, 두고 봅시다."
"후훗. 두고 보라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 없는데"
언젠가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는 수진이
그래도 나는 좀 다를걸?
어차피 이 나이가 돼서는 자위도 잘 안 한다.
수진이랑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굳이 정액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수진이랑 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정력이 좀 보존되겠지.
그날 느꼈던 그 감각을 밤새도록 보여줄 작정이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래서 비뇌도가 그렇게 재밌어요?"
"뭐, 그럭저럭"
솔직히 요즘 양판소랑 그리 다르지는 않은데 시원한 맛은 있다.
"재미없으면 이렇게까지 안 읽지"
"그것도 그렇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수진이
나도 책을 읽기로 했다.
수진이가 그랬듯이 같이 있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지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위이잉
전화가 왔다.
"누구예요?"
"어? 원장님이네. 잠깐만"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준숩니다."
'아 준수 강사님. 접니다. 그 이전에 얘기했던 것 때문인데요.'
"네, 말씀하세요."
'그만두는 거 맞으시죠?'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요번에 지인이 본인 딸이 아직 취직을 못 했다고 그래서 그 애를 어떻게 안되냐고 부탁을 해와서요.'
"네"
'그러면 준수 강사님 후임으로 받겠다고 연락해도 되겠죠?'
"네, 그러세요."
'네, 준수 강사님. 쉬는 날에 죄송했습니다.'
"아뇨아뇨. 저야말로 죄송하죠. 들어가세요."
'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새 강사님 오시는 거에요?"
"어, 아무래도 요즘 전염병이니 뭐니 해서 취직이 안 되잖아? 그러니 이런 애매한 시기에 취직이 잡히나 보네"
역시 세상은 학연, 지연, 혈연이지
솔직히 이렇게 빨리 후임이 들어올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다.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식탁에 올린다.
이제 정말로 내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 이 상태로도 만족스러우니까
진짜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이전에 다녔던 학원에 가서 원장님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해야지.
나를 처음으로 뽑아줬던 같은 대학 선배인 원장님
일회용 라이터를 왜 쓰냐면서 지포라이터를 선물해준 분이다.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돌아갈 길은 충분하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렇게 자기완결을 내고는 다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조금 긴 휴가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