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이런건 무협이 아니야!!!(2)
아무래도 수진이보다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나는 책들을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놓고 실내복으로 갈아입는다.
걸어다닌건 아주 잠시뿐인데도 엄청나게 덥다.
살인적인 더위다.
걸어서 집까지 갔다가 와야 하는 수진이는 돌아오는 순간 땀 범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 수진이의 속옷 정도는 준비해둬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입었던 속옷을 입고 돌아가기도 찝찝할 거고 샤워도 자주 하니까 말이다.
물론 잠옷이나 실내 옷은 조금 나중에 사야지
아직은 수진이의 알몸 와이셔츠 모습을 좀 더 보고 싶다.
체감상 한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진이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으아!!! 더워!!!"
그렇게 소리치며 방으로 들어서는 수진이
수진이는 나와 잠깐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슬쩍 돌린다.
아무래도 너무 더워서 무의식중에 소리가 나왔나 보다.
나는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도 없었기에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서 수진이에게 건네준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물을 들이켠다.
푸하 소리를 내고는 이제야 좀 살겠는지 흐으으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묻는다.
"아 밖에 너무 더워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부채질한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본인은 차있다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억울하면 너도 사던지"
"운전면허 없는데요?"
"운전면허는 생일 지나면 딸 수 있어. 억울하면 사. 돈도 많잖아?"
"...진짜로 그럴까요?"
진짜로 살까? 이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눈치가 제법 진지하다.
생각해보니 본인 돈으로 차도 집도 살 수 있고 명품백이든 옷이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여고생이라니 미쳤네
내가 고딩때는 뭐했더라?
"그래서 뭐 빌려오... 아 비뇌도..."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책을 살펴본다.
책이 제법 낡았다.
과연 출판된 지 오래된 책 답다.
"왜 하필 이거에요?"
수진이는 손으로 비뇌도를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왜냐니 그거야 뻔하지
"친구들이 재밌게 보던 책이 그거라서 생각난 김에 빌려봤어"
그렇게 말하자 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그거 아세요?"
"응?"
수진이는 뭔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거 아직 미완결이에요."
"응, 알아"
"네? 아는 데도 빌려 왔어요?"
"뭐 그냥 궁금했어. 친구들이 뭐가 그리 재밌어서 돌려보고 그랬는지"
그렇게 말하면서 책을 살짝 쓰다듬는다.
수진이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나를 가볍게 끌어안는다.
과연 덥긴 더웠는지 수진이의 몸은 약간 축축했다.
"수진씨 몸에서 땀 냄새 납니다."
"혼나요?"
내 발등에 양발을 올려놓고는 그렇게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날 끌어안은 건진 모르겠다.
그렇게 잠시 있다가 나와 수진이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소파에서 공부하기에는 자세가 불편했으니까
수진이와 나는 마주 본 자세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책을 읽어나간다.
주인공이 부모님을 어떠한 사연으로 잃고 손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걸 지나가던 노인이 발견하고는 네가 이 무덤들을 만들었는지 물어보며 시작한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주인공을 데려가서 제자로 키우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지닌 노사부 밑에서 능력을 키우다가 우연한 계기로 산삼을 발견하고는 달여 마시고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된다.
사부에게서 도망치는 주인공
주인공은 여장해서 히로인이랑 엮이기도 하고 뭔가 아카데미물을 찍는다.
엄청 오래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트렌드와 뭔가 감성이 맞는 느낌이다.
기연으로 강해진 먼치킨 주인공, 아카데미물, 엄청 예쁜 히로인, 라이트노벨처럼 가벼운 문체
나는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분량을 늘리려고 쓴 필요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며 읽어나간다.
소설 1권에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무언가 일상생활에서는 본적 없는 문파나 등장인물들 기술명이 나올 때는 조금씩 주춤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1권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나자 집중력이 끊어졌고 책을 덮고 좌측으로 옮겼다.
그리고 우측에 있는 책을 한 권 집어서 다시 내 앞에 내려놓고 안경을 벗고는 눈을 꾹꾹 누른다.
한 2년 정도 전부터는 소설을 볼 때는 안경을 쓰게 되었다.
노안이란...
그렇게 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안구운동을 하고 있으려니 수진이에게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봤다.
수진이는 헤 소리가 나올 것 같은 느낌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 모르는 거라도 있어?"
"아, 아뇨. 그냥 선생님은 책을 읽으실 때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어서요."
아무래도 인상이라도 쓰고 있었나 보다.
나는 다시 미간을 마사지하고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음 권을 펼쳤다.
그렇게 2권을 읽어나갔다.
아까보다 조금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수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공책에 사각사각 글을 쓰다가도 잠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다시 공부하다가 한 몇 분이 지나면 또다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아무래도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긴 슬슬 정오가 가깝다.
밥먹을 시간이니 집중력이 떨어질 만도 하다.
읽던 것만 다 읽고는 점심준비를 해야지
수진이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나는 빠르게 책을 읽었다.
***
"선생님은 그냥 가정주부 하셔도 되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수진이
점심에는 수진이가 조금 넉넉하게 끓였던 된장찌개를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시 꺼내서 끓은 것이고 밑반찬은 냉장고에서 꺼냈다.
메인요리로 돼지고기 감자조림을 만들었다.
한국식 니쿠자가다.
감자를 냉장고에 계속 넣어두면 물러질 거고 당근도 써야 해서 간편하게 만들어봤다.
"그래?"
나는 수진이를 한번 바라보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수진이가 돈을 버니 내가 가정주부를 하는 미래도... 나쁘진 않겠지?
솔직히 요즘은 남녀 맞벌이 시대고 하니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남자가 집에서 집안일을 한다고 하니 꺼려진다.
아직도 꼰대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한 모양이다.
내가 부모라도 19살 딸내미가 2배나 차이 나는 이혼남을 데려왔는데 직업도 없고 전업주부 하겠다고 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다.
나는 밥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수진이를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있잖아, 그 뭐냐"
"네?"
"공부에 집중이 안돼?"
이건 제법 심각한 문제다.
여름과 겨울은 생각보다 공부하기 힘든 환경이다.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최대한 배려해줘야지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는 잠시 내 눈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살짝 돌린다.
입에 젓가락을 물고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느낌이다.
"그 있잖아요... 듣고 웃지 말아요?"
"응? 어, 응"
수진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책을 읽으실 때 집중해서 읽는 모습이 그... 왠지 멋있어서"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수진이가 뭔가 우스워서 얼굴이 멋대로 풀어졌다.
씰룩이는 내 입꼬리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웃지 말라고 했잖아요."
"안 웃었어"
"아니거든요."
흥!소리가 나고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하는 수진이
귀여웠다.
이런 아재가 인상 쓰고 책보는 모습이 뭐가 보기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뭐 나도 수진이가 연재하려고 노트북을 두드릴 때의 진지한 표정은 좋아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뭔가 좀 멋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내가 수진이 앞에서 최선을 다한 모습을 보여준 건 오늘 책을 읽는 모습을 제외하면 섹스할 때 뿐인 것 같은데?
조금 미묘한 감상이다.
수진이가 묵묵히 식사했기에 나도 그에 맞춰 조용히 식사했다.
수진이와 식사를 마치고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식후 공부는 어차피 당이 올라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어때, 뭔가 진전은 있는 거 같고?"
"으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진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국어를 제외하면 사탐 1과목 영어와 수학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
다행이도 사탐은 암기과목이라 금방 점수가 오른다.
하지만 영어와 수학은 다른 과목처럼 쉽게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
공부를 하는 족족 점수가 오르지 않고 정체되는 구간이 생기는 과목이다.
특히 수학은 응용된 문제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에 귀찮은 과목이지.
수진이가 어떤 대학을 목표로 하는지는 몰라도 흔히들 말하는 스카이를 노린다면 국어 수학 사탐에선 5개 미만으로 틀리는 걸 목표로 해야한다.
국어는 성적이 좋았으니 100점으로 수학에선 3개 사탐도 만점을 받는 것이 베스트일 것으로 생각된다.
힘들 것이다.
이번년도 수능은 수업도 일정대로 나가지 못했고 방학도 짧고 아주 엉망이니까 말이다.
내가 수진이를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영어는 그래도 좀 할 수 있기는 한데 말이다.
수학은 어느 정도 까먹어서 어쩌면 수진이와 비슷한 성적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30살까지 수학공부를 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니 슬슬 까먹기 시작한단 말이지.
"내가 좀 도와줘?"
"국어는 지금까지처럼만 해도 그렇게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요?"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
"진짜요?"
"그럼. 우리 학원 수능 때마다 강사들도 같이 수능 보잖아"
영어도 1등급은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간단한 책은 원문으로 읽는 수준은 된다.
라떼는 말이야? 영어 번역 서적 수준이 정말 환상적이어서 하...
"선생님은 진짜 볼수록 놀랍네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내가 몇 년이나 이 바닥에 앉아 있었는지는 들었잖아?"
"그렇긴 한데..."
수진이는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 뭔가 어깨가 으쓱인다.
엣헴 엣헴 신이나
하지만 수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왠지 선생님이 옆에 있으면 더 안 될 것 같아요."
추욱 어깨가 처진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나는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진이는 공부를 하고 나는 무협지를 읽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수진이는 나를 힐끗거리는 걸 그만두고 열심히 문제집을 풀고 있다.
그래 그래야지
어떤 상황에서든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하는 시기다.
그렇게 책을 넘기는 소리와 샤프가 종이에 사각 이는 소리, 매미의 울음소리와 에어컨의 가동음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5권까지 책을 읽었을 때 수진이가 기지개를 켜면서 소리를 냈다.
"으윽!!! 하아... 힘들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주무른다.
아무래도 할당량이라고 생각한 분량의 공부를 다 끝낸 모양이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물어보자 수진이는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밑으로 내리고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 수진이가 귀엽다.
다시 한번 침대에서 울려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뭔가 입을 열려고 하니 수진이가 먼저 입을 연다.
"아무리 그래도 연속으로 자고 온다고 하면 뭔가 한소리 들을 테니 오늘은 집에 가서 먹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가지고 놀다니 건방진 녀석
나는 조금 실망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그래? 그럼 그래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정리한다.
수진이는 "실망하셨죠? 그죠?" 라면서 살살 약 올려온다.
그렇게 혼나고도 내가 덮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덮쳐달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