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둥지 짓는 김준수(5)
혜정이는 생각보다 빈번하게 집으로 남자를 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정확히는 내가 수진이를 만나면서 조금씩 퇴근이 늦어질수록 남자의 출입빈도가 늘어갔다.
영상에서는 최초에서야 소파를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침실로 데려가는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혜정이가 남자를 내보내고 멍하니 소파에 누워서 TV만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장면이 왠지 굉장히 우울해 보였다.
이후에도 그녀는 몇 차례나 더 남자를 들였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항상 소파에 누워 멍하니 TV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다가 내가 등장을 하면 나를 힐끔 쳐다보고 다시 TV를 바라본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우울해보였다.
가끔씩 그녀는 혼자서 자위도 했다.
왜 방이 아니라 소파에서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영상은 거기서 끊어졌고 나는 추가로 SD칩을 가져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해야 했다.
나는 수진이를 바라봤다.
수진이는 그냥 여기서 끝?이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뿐이었다.
"뒷내용이 더 있긴 한데 볼래?"
수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참에 모아뒀던 모든 SD칩을 가져왔다.
512GB짜리 SD칩이 총 5개
두번째 칩이 들어가고 영상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어 약속?'
'어 좀 늦게 들어올 수도 있어'
'그래'
아무래도 내가 수진이와 데이트를 했던 날의 장면이 찍힌듯하다.
혜정이는 나를 내보내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매우 신경질적인 느낌이다.
그렇게 TV를 켜다가 다시 휴대폰을 손에 든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부장님 저에요. 시간 되세요?'
전화로는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아무래도 그 건운가 뭔가 하는 놈을 부르나 보다.
'아 어린이날이요? 아,아~ 그렇구나. 네 알겠어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끊어지는 전화
혜정이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소파에 내려치고는 멍하니 엎드려서 TV만을 바라본다.
손톱을 다시 잘근잘근 씹기 시작하는 혜정이
혜정이는 당분간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시 방에 들어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는 다시 TV 앞으로 온다.
모든 일정을 소파에서만 보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다가 아마 그 장면이다.
'왔어? 윽 술냄새'
관계가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그 넓은 집의 고요한 분위기가 싫었던 걸까?
나는 집에 있어도 시간 대부분을 방에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혜정이는 대부분을 소파에서 보냈다.
내가 수진이를 만나러 나간 날 평소와는 다른 향수를 뿌리고 나간걸 눈치챈 게 맞나 보다.
그러니 신경질적인 느낌을 풍기며 다른 남자를 부르려고 했지.
그러다가 어린이날이라고 남자가 거부했나 보다.
결국엔 혼자서 시간을 보내다가 보기 싫은 인간이라도 일단 집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나은 것일까 나를 반긴 거겠지.
증오만이 남았지만 외로운 게 더 싫었던 것일까
나는 여기서 혜정이를 덮쳤다.
'김준수! 미쳤어!'
'왜, 우리 안 한 지 좀 됐잖아?'
'적... 적어도 침대에서 해. 침대에서'
그렇게 말하고 소리가 사라진다.
아주 작게 신음이 들리는 듯도 하다.
으득!
수진이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조금 무섭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혜정이가 등장하는가 싶었는데 손에 장미를 들고 있었다.
내가 수진이를 주려고 했던 그 장미를 배치한다.
이후부터 생각보다 혜정이가 소파 앞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날을 기점으로 요리를 만들고 기다리든가 하면서 뭔가 분주하게 보내느라 소파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 같다.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내던 혜정이는 TV 앞에 앉더니 내가 설치해둔 탁상시계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그 옆을 바라본다.
내가 돌아올 시간이라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시계가 아닌 그 옆을 바라보는 건 장미를 바라보는듯하다.
내가 준 장미 때문에 나에 대한 의심이 풀린건가
조금 지나서 뭔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혜정이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나를 반긴다.
영상에서는 그런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내가 혜정이랑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부부가 되어갈수록 혜정이가 TV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줄어들어서 다른 남자가 등장하지도 않았다.
남자가 혜정이를 버린 게 아니고 혜정이가 남자를 버린거였나
수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영상이 끊어지면 다음 SD칩을 집어넣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자 혜정이는 내가 씻으러 들어가면 소파에 앉아서 자꾸 어딘가를 힐끗힐끗한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자자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나보다.
그 동작이 상당히 애처로워 보였다.
수진이는 아까부터 계속 엄지손톱을 물고 있다.
솔직히 굉장히 의외의 장면만이 찍혀 나왔다.
내가 기대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처음엔 혜정이가 나와 진심으로 관계의 개선을 생각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불륜이 들키고 혜정이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그날 나에게 보여준 광기, 부모님 앞에서 나의 부정을 고하고 보여주던 그 비웃음
나는 사실은 혜정이가 뒤에서는 계속 남자를 만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버려지고 나서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걸 보자고 했던 솔직한 이유는 수진이를 집으로 초대할 명분이었던 것이 가장 크다.
그리고 다음은 혜정이의 불륜 장면을 혼자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수진이에게 내가 왜 혜정이와 그런 상황이 되어야만 했는지 보여줌으로써 마음에 남았을 응어리를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썼던 그 메모장에는 상황이 꼬여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기술했기에 이 영상이 변명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혜정이가 뭔가 쿠당탕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집을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래도 집에서 나간 날인 것 같다.
그리고 혜정이가 다시 찾아온 날의 영상이 나온다.
시끄러운 장모님이 멋대로 들어와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어른 특유의 잔소리를 내뱉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혜정이가 나에게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애잖아? 마트에서 봤던애. 내가 오빠 학원에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치면 어떻게 될거같아?'
'씨발 그걸 말이라고해!'
수진이가 손톱을 물어뜯던 손을 입에서 떼고 화면에 삼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중한 것이 보인다.
'나 이제 잘할게. 나도 이제 내 처지를 잘 알아.'
'나 오빠 많이 사랑하는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오빠도 나한테 잘해. 어차피 나도 딴남자 만났으니까 오빠도 그년 만나는거 그냥 눈감아줄게. 어차피 그년도 오빠 진심으로 사랑해서 만나는거 아닐테니까.'
그런 장면이 조금 나오고 혜정이가 나를 애무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카메라를 의식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은 더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내가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초조하게 다리를 떨면서 소파에서 계속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흘끗거리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범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장면이 몇 번 더 나오다가 영상이 끝이 났다.
수진이는 턱에 손을 가져가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어?"
"분명히 잘못은 저년이 했는데 왠지 제가 나쁜 짓 하고 있는것 같아요."
"뭐, 좋은 짓은 아니지."
"선생님은 누구 편이에요?"
수진이가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프다.
"뭔가 좀 기분이 그렇긴 하네"
"왜요?"
"저렇게 지낼 줄 몰랐어."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좀 더 자유분방하게 살 줄 알았거든. 뭔가 굉장히 초라해 보이네."
회사를 다녀와서 씻고 소파에 누워서 멍하니 TV만을 바라보는 혜정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료한 삶의 자극, 그녀에게는 성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설로 무료한 삶에서 벗어나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
뭔가 영상이 끝나니 찝찝한 기분만이 남았다.
그럴싸한 분위기도 잡지 못하고 서로 뭐라고 말해야 하는 지도 몰라서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그랬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뭔가 화제를 돌릴만한 걸 찾아보기로 했다.
노트북을 방에 돌려놓고 수진이에게 돌아가려다 보니 책장에 꽂혀있는 앨범이 눈에 들어온다.
아 그러고 보니 수진이에게 빌려줬던 앨범을 아직 받지 못한 것 같다.
"수진아"
"네?"
"앨범 아직도 필요해?"
"아, 그러고보니 안 돌려 드렸네요. 다음에 돌려 드릴게요."
"근데 그게 뭐 그렇게 볼 게 있었어?"
"재밌는 게 있어서요."
"재밌는 거?"
고등학교 앨범에 뭐 재밌는게 있기는 한가?
"선생님이랑 친구분들이 단체로 옷에 물감 칠하고 웃으면서 사진 찍은 거요."
그게 뭐지?
아 그건가?
"아 그 손도장 아트?"
"네 그 공작새요. 엄청 예쁘던데"
확실히 앨범 중에 그 사진이 있기는 했던 것 같다.
별건 아니다.
학교에서 글쓰기 대회를 했던 것처럼 그림 그리기 대회 같은걸 했었는데 왜인지 학생 전원이 참가하라고 했었다.
교장지시였던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그림에 기역자도 모르는 놈들은 싫다고 했고 그럼 공동제작도 인정해주는 대신 규모가 큰 작품을 만들라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 그림을 잘 그리던 지금은 이혼남이 되어버린 준호한테 뼈대를 맞기기로 했고 한명도 빠짐없이 참가할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게 손도장 아트였다.
공작새의 꼬리를 친구놈들 손바닥으로 찍어버리고 가장 공이 들어가는 부분인 공작새만 준호가 그리는 작업
20명의 손도장이 찍혀야 했기에 제법 큰 규모의 작품이 되었고 준호가 그림으로 먹고산다고 했던 놈이기에 공작새도 그럴싸하게 그려져서 입상했고 그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뭔가 좋네요 그런거. 요즘은 내신이니 수능이니 바빠서 그런건 안하는 추세잖아요. 그래서 그 준호라는 분은 지금 뭐하세요?"
"세태와 야합했어."
"네?"
"미술로 먹고살겠다고 지랄하다가 마누라 바람나서 집 나가고 야한일러 그리고 먹고살아. 심심하면 세태와 야합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돈 된다고 웹소설 일러도 자주 그리고"
"..."
"환쟁이가 원래 다 그런 거지"
"그,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학생때는 소설 쓰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수진이는 뭔가 어색했는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글을 쓰기는 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조금 끄적거린게 끝이다.
"쓰기는 했었지. 입상도 했었고"
"진짜요? 보여주실 수 있어요?"
"이것도 보여주고 뭔가 아니라고 하면 진짜 울 거 같은데"
"안 그래요. 보여주세요."
방긋방긋하면서 보여달라고 손을 내미는 수진이가 얄밉다.
그래도 뭔가 분위기도 망쳐버렸으니 화제를 돌리기엔 적당해 보였다.
나는 책장에 꽂혀있던 고등학교 문집을 꺼내왔다.
솔직히 어느 정도 자신은 있는 작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