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가지마요(1)
이야기가 끝나자 굉장히 어색해졌다.
우리는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녹차를 나는 커피를 마신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 때문에 얼굴을 보기 민망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힐끔 수진이를 쳐다보니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우린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꼭 첫 경험을 치른 커플의 모습 같지 않은가.
뭐, 아내는 경험이 많아서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았지만,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풋풋한 커플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수진이와 이 풋풋한 분위기 속에 잠겨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저녁 8시. 이제 밤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식탁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나를 올려다보는 수진이.
"어,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야지."
빠트린짐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럼 저녁 식사 고마웠고 잘자."
빠트린 짐은 없다. 이제 돌아가서 나가면 된다.
수진이에게 인사도 건넸고 서로 마음도 확인했다. 이제부터 우린 연인이야.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뒤에서 옷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멈춰 섰다.
수진이가 아주 약한 힘으로 옷을 당기고 있었다.
수진이를 향해 돌아섰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수진아?"
"...지 마요."
"어?"
"가지 마요. 외로우니까."
수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매우 애절하여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진 눈이 마주치면 뭔가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그 눈빛에 취해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
쏴아아.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다.
이게 무슨 일일까?
여고생의 집에서 샤워를 빌리는 중이지.
와... 설마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줄 상상도 못 했다.
이제부터 수진이와 그, 그렇고 그런 관계를 하게 되는 걸까.
솔직히 조금 기대도 했기에 콘돔을 사두긴 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수진이는 그런 의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혼자 있으려니 외로워서 날 멈춰 세웠을 수도 있지.
진정하자. 갑자기 혼자 흥분해서 원숭이처럼 달려들면수진이가 기겁할지도 모른다.
수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나보다 먼저 씻었으니 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겠지.
화장실에선 은은하게 샴푸 향과 바디워시 향이 맡아졌다.
평소에 수진이가 이 샴푸와 바디워시로 몸을 씻는다 이 말이지?
이 향기를 맡고 있으려니 수진이를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맡아졌던 향기가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해진다.
골 때리겠네. 섹스를 처음 하는 숫총각이 딱 이런 느낌일 텐데.
얼마 전까지 침대에서 아내랑 물고 빨며 열심히 허리를 흔들었다.
섹스리스로 2년간 서로를 병풍취급 했어도 4년간은 서로 몸을 섞었지.
그럼에도 총각 딱지를 처음 뗀 첫날 밤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진정해야지. 이러다가 수진이가 그냥 혼자 자기 쓸쓸했다며 날 거부하면 어쩌나.
미지근한 물에서 조금 더 온도를 낮춰 차가워진 물로 머리를 식힌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을 듯하다. 가슴이 너무 소란스럽다.
샤워를 끝내고 물기를 닦고 있으려니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수진이가 머리를 다 말린 모양이지.
TV조차 켜져 있지 않으니 이렇게 고요하구나.
나는 수진이가 꺼내준 옷들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옷 사이즈는 괜찮으세요?"
매우 가벼운 옷차림의 수진이가 방에서 걸어 나오며 그리 물어왔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수진이다. 아쉽게 돌핀팬츠는 아니었다.
진정하자고 해놓고서 이미 삿된 마음을 품다니 이게 남자의 숙명일까.
속으로 진정 하자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몸에 잘 맞는 거 같네."
"맞아서 다행이네요. 근데 음..."
수진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지.
"늘 셔츠를 입고 다니셔서 몰랐는데... 몸이 되게 좋으시네요?"
"그래 보여?"
"네."
"흡!"
나는 몸에 힘을 주고 근육을 자랑해봤다. 수진이는 의외로 마초 취향인 걸까.
"뭐해요?"
나를 차갑게 노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버렸다.
괜히 했다.
멋쩍어져서 곧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럼... 나는 어디서 자면 돼?"
수진이는 음~ 소리를 내며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 채 고민에 잠겼다.
"오라비 방이 비었으니 그 방에서 주무시면 될 것 같아요."
몸에서 긴장이나 기력이나 뭐 기타 등등이 쫘악 하고 빠져나갔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는 모습을 본 수진이가 후후거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개변태."
"..."
"개변태 강사네요. 정말로."
그렇지. 내가 좀... 변태 같다. 사귀자마자 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다니.
"농담이에요, 이리 오세요."
수진이는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방으로불러들였다.
수진이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가자 전체적으로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아마 디퓨저를 쓰고 있겠지.
신기하다. 내 방에도 디퓨저가 있건만 왜 수진이의 방은 내 방보다 더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나는 걸까.
난생처음 여자방에 들어온 남자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내 코를 손가락으로 콕하고 찍어왔다.
"너무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부끄러우니까."
그 말에 주변을 바라보던 시선을 수진이에게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9시가 조금 넘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막 사귀게 된 연인과 한방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그래서 의식도 돌릴 겸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소설은 어떻게 되는 거야? 휴재인가?"
"아뇨. 미리 써놓고 예약 걸어뒀어요."
"그래?"
"네."
말이 뚝 하고 끊겨버렸다.
어색하다. 이 상황에선뭐 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하지...
카페에서 만날 땐 별 시답잖은 이야기도 즐겁게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왠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
"..."
어색한 분위기.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먼저 움직였다.
"이불 깔아드릴게요."
이불을 깔아준다며 방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수진이가 방을 나가고 나니 긴장으로 딱딱해졌던 몸이 이완된다.
그래. 같은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라는 거구나.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사귀자마자 몸을 허락해주는 당찬 여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수진이는 연애경험이 없다고 했으니 내가 첫 상대다.
긴장과 두려움에 쉽게허락해주지 않겠지.
나는 진득이 수진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어차피 수진이는 고3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몇 개월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 기다리자.
그리 생각하니 몸에 긴장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불 끌게요?"
"그래."
수진이가 가져온 이불에 누웠다.
누웠어도 잠은 오지 않는다.
난 평소에 자정쯤에 잠을 자는 편이니 말이다.
지금이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도 잠이 오진 않겠지.
바로 옆에 방금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 있는데 태평하게 잠이 온다면 상당히 무신경한 인간이겠지.
어색하다. 솔직히 지금 불을 끄고 누운 상황이 좀 이상하긴 하다.
수진이는 나보다 좀 늦게 자는 거로 알고 있는데 지금 불을 끈 걸 보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그랬겠지.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한다.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해냈다. 나는 수진이에게 고백했고 연인이 되었다.
수진이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진이와 만나면서 나도 조금은 `어른이`에서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38살이나 먹었건만 드디어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눈을 감고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들려왔다.
"선생님, 자요?"
"아니."
"음... 선생님... 변탠데 뭔가 안 하시네요?"
"해줬으면 하는 거야?"
방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린다.
팟.
갑자기 환해지는 방안.
수진이가 침대 스탠드를 켰다.
"그렇다면 어쩔거에요?"
"..."
나는 이불 위에 똑바로 앉았다.
내가 움직이자 수진이가 몸을 떨었다.
무섭겠지.
남자랑 여자는 몸을 허락하는 것에서 오는 부담감이 다르다.
여자의 첫 경험은 아프다고들 하는데 얼마나 아픈지는 여자가 아닌 이상 모르겠지.
책으로 읽어봐야 그 아픔을 공감할 순 없다.
애초에 난 여자 경험이 아내밖에 없다.
첫 경험을 맞이하는 여자가 얼마나 아파할지 또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도 잘 모른다.
몸을 떨고 있는 수진이가 보인다.
불안해서 떨고 있는 걸까.
내가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 외로워서 붙잡았는데 막상 해주지 않고 튕기려고하니 나에게 미움받을까 봐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려는 걸까.
아직 몸을 허락할 각오가 되지도 않았을 테지.
손을 뻗어 수진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서 떨림이 전해져온다. 괜찮다. 진정해라.
"수진아."
"네,네!"
"무서우면 오늘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아직 무서운 거잖아."
"..."
"우리한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기다려줄게."
수진이의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수진이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여고생이랑 결혼하자고 하면서 신사인 척 하는 거예요?"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데.
"어차피 선생님이 여고생이랑 떡 치고 싶어하는 개변탠 거 다 알거든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손에 뭔가를 툭 하고 올려놓았다.
음. 혹시 몰라서 사뒀던 콘돔이었다.
"개변태."
"..."
"개변태에 짐승이면서 신사인 척하시네요? 저도 다 알 건 알거든요?"
"아니 이건..."
"괜찮아요, 남자들이 다 그런다는 건 아니까. 저도 갤질하니까 알 만큼은 알아요."
수진이가 나를 내려다본다.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어차피 선생님이니까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그렇게 평생 못하게 될 걸요?
"그건 아닐 거 같은데."
"괜찮아요. 선생님."
수진이가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오늘이 제가 살아온 날 중에서 가장 특별한 날이에요. 그러니까 특별하게 마무리해요."
여자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하지 않는 건 고자 새끼다.
수진이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방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체온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선생님, 불은 꺼주세요."
"그래."
나는 침대 스탠드의 불을껐다.
창밖에서 비치는 은은한 빛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선생님?"
수진이는 그 잠깐의 침묵이 두려웠는지 나를 불안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 소리에 이끌려 수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수진이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 힘을 뺐다.
몸을 숙여 수진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수진이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좀 더 과감하게 수진이의 입술을 쪼아먹듯 입술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감질난다. 수진이의 입술을 더 맛보고 싶다.
입술을 딱 붙인 상태로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혀로 수진이의 앙 다 물린 입술을 살짝 핥아봤다.
"읍!"
깜짝 놀라서 몸을 떠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지금 놀라면 앞으로는 더 놀라게 될 텐데.
수진이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혀를 집어넣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수진이의 앙 다물린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진이의 입으로 천천히 혀를 밀어 넣었다.
수진이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몸뿐만이 아니었다.
수진이의 혀조차 그 긴장이 옮았는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니까.
이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다.
한 손으로 수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그 딱딱하게 굳어있는 혀를 살짝 핥아봤다.
수진이가 몸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최대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혀를 놀리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아주 천천히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 혀를 섞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갑자기 수진이가 나를 밀쳐냈기때문이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이라도 참고 있었나 보다.
"코로 숨 쉬어도 돼."
"하아 하아... 부, 부끄럽잖아요. 하아... 코에, 닿으면."
코에 숨이 닿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작게 내쉬면 되지."
"..."
수진이는 약간 울상이 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너무 익숙하신 거 아니에요?"
익숙하기야 하겠지. 나도 일단은 유부남이니까.
"..."
여기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순간 어깨에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윽! 수, 수진아?"
수진이가 내 어깨를 물었다.
꽤 턱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잘근잘근 깨물고있다.
"짜증 나."
수진이가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가 능숙하면 좋다던데 전 별로예요. 짜증 나."
그리 말한 수진이는 다시 내 어깨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승부욕도 강하고 독점욕도 강한 아이구나.
나는 수진이의 앙탈에 어울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