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준비(3)
내 방은 근 20년이 지났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좀 작게 느껴지는 방.
하지만 내가 독립을 한 다음에도 이 방은 예전과 똑같았다.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과 침대도 그대로 있다.
다만 이불이랑 매트는 잘 말렸는지 기분 나쁜 곰팡내는 나지 않았다.
아니, 매트는 새로 샀나?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매트를 제외하면 옛날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서 딴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다행히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무사히 붙었고 그렇게 자취가 시작되어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땐 지금처럼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인프라가 정비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자취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지.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들렸더니 조금 그립다는 생각조차 든다.
책장을 들여다본다.
어린이 학습용 만화책부터 위인전까지 두서없는 책들.
영어사전이나 국어사전,수학의 정석마저 꽂혀있다.
나는 사전이 꽂혀있는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좀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수학의 정석이랑 영어사전, 국어사전처럼 사놓고 잘 살펴보지 않는 무거운 책들 뒤에는 책방이나 도서실에서 몰래 빌려왔던 판타지 소설들을 숨겨놓곤 했지.
이 방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시간이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나는 내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종이상자에서 앨범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와 관련된 물건들은 이곳에 정리되어 있겠지.
찾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앨범.
수진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가져온 가방에 앨범들을 챙겨 넣었다.
***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왜? 더 있다 가지."
"이 사람아. 일 때문에 바쁜데 뭘, 붙잡고 그래."
"아쉬우니까 그렇죠. 다음 명절엔 내려올 거지?"
"예, 그럴게요."
"마스크 꼭 쓰고 다니고. 위험하다니까."
"예, 어머니도 그러세요. 그럼 갈게요. 아버지 저 갑니다."
"그래, 몸조심해라."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왔다.
왜지? 예전엔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지금은 그리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평소처럼 맞이해줬다.
"어서 와, 밥은?"
"아직."
"어서 씻고 와. 밥 다 됐어."
정말 참하고 좋은 아내다.
만약에 네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말이지.
이렇게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나쁜 놈 같지 않은가?
네가 평소에도 나에게 이런 모습만을 보여줬다면 내가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오히려 좋은 아내를 만났다고 생각하며 나름 만족하며살아갔겠지.
"아버님이랑 어머님은?"
"건강하셔. 무소식이희소식이지."
"다행이네."
평범한 부부처럼 잡담을 나누고 식사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평범한 부부의 모습을 서로 연기하고 있다.
네가 그랬지.
시간이 지나면 내가 결국은 이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너는 생각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럴 뻔했으니까.
나는 겁쟁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임에도 부모님을 무서워하는꼬맹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이만 먹은 `어른이`다.
수진이에게서 카톡이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날 수진이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수진이의 말을 무시하고준범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뭐... 뻔하지.
수진이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겠지.
그러다 보면 내 바로 옆에 있는 아내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수진이는 그때처럼 나를 붙잡으려고 했을까?
나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그래. 할 수 있지.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다는 사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그 죄책감에 짓눌려 수진이에게서 도망쳤으리라.
그 다음은... 없다.
수진이를 잃어버린 나에게 미래는 없다.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기계, 칼퇴근으로 불리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겠지.
달라진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내의 불륜을 걱정하겠지.
아내가 언제 또 불륜을 저지를까 노심초사하며 살 거다.
난 변했다. 수진이를 만났기 때문에 변한 거다.
예전과 달리 나에게 집착하는 아내.
만약 그 이유가 나에게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면 그건 수진이 때문이다.
38살이나 먹을 동안 달라지지 않았던 내가 달라진 건 다 수진이의 관심을 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서 수진이를 빼버린다면 더는 노력할 이유도 사라진다.
나는 또다시 몸에서 시체 썩은 내를 풀풀 풍기던 그때의나로 돌아가겠지.
점점 매력을 잃어가는 나에게 네가 지금처럼 집착해줄까?
아니겠지.
그러니까 혜정아.
우린 결코 다시 이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거다.
***
"와, 이게 선생님이에요? 지금이랑 별반 차이가 없는 거 같은데."
그때 내 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뜻인가? 아니, 아니겠지...
"그때도 단정하게 보이도록 노력은 했으니까."
수진이는 내가 가져온 앨범을 음~ 소리를 내며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선생님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아, 이분이신가?"
수진이는 어차피 마스크를 쓰면 알아보지도 못한다며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앨범을 보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기분은 좋은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 그 예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수진이가 앨범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수진이의 손가락이 올라가 있는 부분엔 준범이가 있었다.
"아, 걔가 준범이야. 고향 친구들은 딴따라니 베짱이니 그렇게 부르고."
"와! 딴따라라고 말하니까 엄청 늙어 보이네요. 선생님춘추가?"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놀려오는 수진이.
마스크에 가려져 있어도 입가에 어떤 미소가 걸려있을지 눈에 훤하다.
"준범이란 분 말고 다른 친구분은 누구예요? 저번에 돌잔치 때 만나셨다고 하셨죠?"
다른 친구들이라.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으려나.
"여기 이놈은 준석이고 중소기업 사장님 될 예정이야. 결혼을 잘해서 뭐, 데릴사위 같은 건데 덕분에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아주 잘사는 놈이지. 아마 준범이 없었으면 이놈이 딴따라일걸?"
"이분은요?"
"얘는 자칭 디씨충인데 사실 디씬지 일벤지 잘 모르겠고 아무튼 항상 개소리만 하는 놈이야. 얼마 전에 돌잔치 했던 놈이 이놈이지. 결혼을 참 잘했어. 이런 놈도 결혼한다고 하니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 말이 사실 같아. 아내 앞에서는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거나 의외로 애처가 일지도 모르지."
수진이가 내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을 나불거렸다.
머리는 좋은데 눈치가 없어서 친구들한테 쿠사리를 많이 얻어먹는 현우, 해병대 나와서 머리라도 다쳤는지 이상하게 무게를 잡는 가오충 병진이, 20살에 사고를 쳐 결혼한 민지와 혁진이 등등.
나는 친구들을 소개해주며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추억 보따리를 풀었다.
놀다가 학교 유리창을 깨먹어서 선생님들한테 뒤지게 혼났던 일부터 교사들이 촌지라는 더러운 걸 받아먹는 시대여서 좋은 선생님과 개 같은 교사가 공존하는 카오스의 시대였다니하는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후후후."
수진이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밌는지 입가에 웃음꽃이 핀 상태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뇨, 별건 아닌데."
그리 말하곤 빨대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수진이.
마스크를 낀 채로 빨대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코믹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컵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친구분들을 참 좋아하시나 보네요."
"내가?"
"네."
난 방금까지 친구들 욕이나 한 것 같은데. 이해할 수가없다.
"아, 잘 모르시겠어요? 딱 보면 알겠는데."
수진이는 양손의 검지로 본인의 눈가를 두드렸다.
"눈이 웃고 계시잖아요."
그 모양새가 왠지 동양인을 놀리는 외국인을 보는 듯해서 반사적으로 헛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이런 뻑킹 레이시스트 이수진!
"또 뭔가 이상한 소리 하려는 건 아니죠?"
"응? 아냐."
이번엔 속으로만 했어.
"선생님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친구 이야기라면서말하는 사람들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그래?"
"네. 친구를 소개할 때 친구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칭찬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디스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금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옆에 거느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가 수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네."
요즘 여고생들은 많이 무섭네.
수진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친구가 좋아하게 되면 견제랍시고 먼저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 동조 압력을 유발한다나 뭐라나.
별로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요즘 여고생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섭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남자라서그런가?"
"글쎄, 이게 보통이지 않나?"
"저도 친한 남자애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선생님이 친구분들 이야기 꺼내실 때는 뭔가 이렇게... 아! 오빠가 어렸을 때 엄마한테 재밌게 봤던 영화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던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 보였어?"
"네. 원래 친구 이야기 하다가도 잘 나가는 친구 이야기 할 땐 꼭 이놈은 이게 문제라면서 단점을 부각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선생님은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다 싶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고."
수진이 눈에는 친구들에 대해 나불거리는 내가 굉장히 즐거워 보였나 보다.
"그런데... 이거 제가 좀 빌려 가도 돼요?"
"빌려 가서 뭐하게?"
"뭔가 그냥 좀 아쉬운데."
수진이가 앨범을 쓰다듬으며 좀 아쉽다는 표정을 보였다.
수진이가 원해서 가져왔는데 그 정돈 가능하지.
"다는 그렇고 한 권만 집어봐."
"그래도 돼요?"
"그래."
수진이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제 수중으로 가져가더니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써서 입 모양은 잘 모르겠지만, 눈가가 웃고 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
수진이의 손에 들려있는 앨범을 바라봤다.
내가 친구 이야기를 할 때 그렇게 즐거워 보였나?
나도 잘 모르겠다.
"시험은 어때? 반응은 있는 거같아?"
"아직 첫날이긴 한데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그건 다행이네."
"솔직히 말해봐요, 선생님."
"뭘."
"선생님도 기대되시죠? 데이트."
"그래"
기대되지. 너와 하는 모든 일이 다 기대된다.
"아, 뭔가 익숙하단 느낌이라 별론데."
수진이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볼멘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어리숙한모습만을 보여주진 않는다. 나도 성장이란 걸 하는 인간이니까.
"이번 데이트는 토요일에 하고... 저녁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실래요?"
"응?"
"어머니가 약속이 있으시다고 집을 비운다고 하셨거든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이건 기회다. 아무래도 기회가 온 듯하다.
이번 데이트에 고백하고 연인이 되자.
여러 가지 준비는 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못한다.
때마침 아내가 학원에서 지랄하지 못하도록 할 약점도 잡았다.
좋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솔직히 두렵기는 하다.
나는 수진이를 이리도 사랑하고 있는데 수진이는 아직 나를 남자로 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이면 나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학원도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끝낸 마당에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지금이라면 아마 돌이킬 수 있다.
부모님께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다시 잘살아 보겠다고 하면 알아서 하라며 내 선택을 존중해주시겠지.
아내도 당분간은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줄 거다.
아내를 선택하면 이전과 다름없는 삶이 기다린다.
아침에 학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해서는 아내와 식사를 하고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되겠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마음은 편한 길이다.
반면 수진이를 선택하면 그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다.
수진이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고 확신도 없다.
남자로 안 보이고 아빠로 보인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수진이에게 차이면 나에게 뒤란 없다.
예전이면 이 상황에서 현상유지를 선택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난 수진이와 연인이 되고싶다.
장인어른도 그러시지 않았나? 10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고.
...다른 여자를 꼬시는데 당신을 떠올려서 죄송합니다. 장인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