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준비(2)
두렵다.
결심했으나 어른에게 처음으로 반항하는 행동이다.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 참고는 못 살겠다.
떡정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날 협박하고 상처 입히는 아내랑 떡을 칠 때마다 그녀에 대한 증오심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난다면 난 정말로 이혼을 망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돌아갈 길을 끊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아직 취직 처가 정해지지도 않았음에도 학원을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제 해야 하는 일은 양가 부모님께 내 사정을 설명하는 일이다.
우선 부모님께먼저 말씀드리자.
그래도 부모님은 날 이해해주시겠지.
어머니는 좀슬퍼하실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결혼하라고 하셔서 한 결혼인데 이런 결과물이 나오면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지.
예전의 나였다면 아내의 변화한 태도를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생각해서 이혼하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살았다면 어찌 됐을까? 아마 장인어른처럼 되지 않았을까.
그건 왠지 싫다. 장인어른이 좋은 사람이란 건 알고 있다.
자식이 잘못한 것을 알고 당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고개를 숙인 모습은 호감을 느낄 만 했다.
그래도 싫다. 장인어른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가정에서 소외되어 가족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돈만벌어다 바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망설임을 길지 않았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응, 아들 무슨 일이야?`
"저 이번 주말에 한 번 내려가려고요."
`그래? 혹시 새아기도 같이 오니?`
"아뇨, 저 혼자요."
`그래...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
"그래도 오늘은 흐르기만 하네요."
"그러게."
7월의 넷째 주 금요일.
오늘이 끝나면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불안하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말씀에 거역하거나 거스르는 일을 해온 적이 없어 더 무서웠다.
"다음 주에는 시험이네요."
수진이가 한숨을 내쉰다.
힘들겠지. 내신도 챙기고 수능 준비도 해야 하고 소설도 연재 중이니 내가 아는 학생 중에선 가장 바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시험 기간에도 연재는 안 쉬는 거지?"
"네. 그러려고요."
"공부에 연재까지 하면 잠을 자긴 하는 거야?"
"으음~ 평일엔 6시간 주말엔 7시간 정도 자는 거 같은 데요."
좀 부족해 보이지만 고3 수험생치곤 적당히 자는 거겠지.
내가아는 학생 중엔 5시간 잠을 자고 주말만 7시간을 잔다거나 4시간씩 자는 인간들도 있었다.
가장 지독했던 인간은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자고 주말에 6시간을 잔다고 했던 학생이었나.
수능의 기적을 몸소 보여주던 학생이었지.
3등급이던 수학점수가 100일 만에 1등급으로 올라갔었으니까.
지독한 인간들이다.
"어차피 1편 연재하는데 1시간전후로 걸려서 그렇게까지 부담은 아니에요. 전 뭐, 딱히 취미랄 것도 없고."
4 ~ 5천 자를 1시간 만에 쓴다고? 굉장하다.
"전개가 즉흥적이지 않고 체계가 잡혀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되나?"
"저는 소설 연재하기 전에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플롯을 짜두고 연재하거든요. 사전에 쓸 지명 같은 것도 좀 찾아서 정리해두고."
확실히 그렇게 플롯을 짜두기만 한다면 빨리 쓸 수 있을지도모르겠다.
...난 하라고 해도 못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선생님은 뭐 하세요? 평소처럼 웹소설 보거나 쓰거나 그럴 거예요? 안 바쁘시면 저희 여기서 같이 공부할까요?"
아쉽다.
주말에도 수진이를 볼 수 있다니 솔깃하다. 하지만 이번 주말엔 할 일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친가에 좀 내려갔다 오려고."
"혹시 집안 제사나 뭐 그런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볼일이 있어서. 아내랑 이혼하겠다고 그, 말씀도 드려야 하고."
"그렇구나..."
사각사각.
평소와는 달리 시험을대비해 공부를 하는 수진이.
수진이가 샤프로 글을 쓰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학창시절 생각이 났다.
학창시절... 학창시절이라.
아, 맞다.
"앨범"
"예?"
"앨범 가져올게. 저번에 보고 싶다고 했잖아."
"진짜요?"
수진이가 샤프를 내려놓고 나를 휙 하고 돌아봤다.
어차피 등지고 앉아있는 상태라 내 뒤통수밖에 안 보일 텐데.
그만큼 내 말이 의외였다는 뜻이겠지.
"어. 고등학교 앨범이면 되나?"
"될 수 있으면 어렸을 때 것도 보고 싶은데요."
"그건 좀."
"안돼...요?"
"안될 것도 없지."
수진이가 보고 싶다는데 가져와야지.
"너무 쉬운 거 아니에요?"
"남자가 어려워서 어디다 써먹어."
"후후."
작게 웃던 수진이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지금 전염병이다 뭐다 해서 거리 두기하고 그러잖아요. 이러다가 카페도 문을 닫고 거리 두기 하라고 하면 어쩌지 싶어서요."
듣고 보니 그러네.
갑자기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학원에서도 볼 수야 있지만, 학원에서의우린 평범한 수강생과 강사의 관계다.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
카페가 문을 닫으면 어디로 가야 하나.
"카페가 아니라도 만나면 되잖아?"
"어디서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시험공부나 하세요. 수진이 학생."
"할거거든요."
사각사각.
수진이가 공부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수진이의 염려가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카페마저 닫아버린다면... 우리가 만날 곳은 정말로 사라지고 말 테니까.
***
"여보, 어디 나가?"
이제 이 여자의 행동이 연기인지 진심인지도 헷갈린다.
그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웠다.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곧 끝난다. 조금만 더 참자.
"잠깐 집에 좀 다녀오려고."
"그래? 늦어? 아니면 내일 오나?"
"오랜만에 가는 거니까 아마 자고 올 거 같아."
"그래? 다녀와~"
아내가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내밀어 왔다.
그 입에 입술을 맞추고 다녀올게라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어느새 이 행동이 익숙하다.
놀랬다. 그래. 익숙해져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도록 싫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익숙해졌단 말인가.
역시 더 미루지 않고 행동하길 잘했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었다면 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그녀와 새 출발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마음을 다잡은 채로 차에 올라탔다.
액셀을 밟아 고향 집으로 차를 몰았다.
멀다면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한동안 찾아가지않았다.
도착하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봤다.
일단 어머니가 반겨주시겠지.
푹 쉬다가 가라 하실 거다.
내가 오랜만에 찾아왔으니 몸 든든히 먹고 가라며 갈비나 불고기 등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고기 요리를 잔뜩 해주시겠지.
아버지는...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
집에서 아버지랑 잘 대화를 하지 않아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잘 모르겠다.
왔냐? 라고 물어보시고 요즘 일은 어떠냐고 물어보시고 그대로 대화가 끝나겠지.
아버지랑은 무슨 말을 하고 살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 딱 그 정도로 끝날 것 같다.
그다음이 문젠데 언제 이혼 이야기를꺼내야 하나...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집에도착했다.
벨을 한 번 눌러서 내가 왔음을 알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어머니가 웃으면서 반겨주셨다.
"밥은?"
"아직 안 먹었어요."
"그래? 잘됐네! 와서 같이 먹자. 여보~ 아들 왔어."
나는 어머니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냄새. 갈비찜 냄새다.
역시 아들이 온다고 하니 부랴부랴 준비하신 모양이다.
"왔냐."
"네, 다녀왔습니다."
"그래."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 이게 대화라고 부를 만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들 밥은 얼마나 먹어?"
"먹던 대로 주세요."
"그래~"
식탁에 수저와 젓가락이 3세트 준비되어있다.
어머니도 내가 이쯤에 도착하리라고 예상하셨나 보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고."
나는 평소처럼 밥을먹었다. 언제나처럼 허겁지겁.
"얘는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왜 그리 먹어. 좀 천천히 먹으렴.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어머니의 시선이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나처럼 밥을 빨리 드셨던 것 같다.
군대에서 빠르게 먹던 버릇이 사회에 나와서도 그대로였다고 했던 것을 어머니랑 대화하다가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나와 어머니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관심도 없으신지 TV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아버지.
"그래, 요즘 힘든 일은 없고?"
"다 똑같죠. 요즘은 전염병이라고 그래서 마스크를 쓴 채로 강의하는 게 조금 힘들긴 하네요. 숨도 차서 피곤하고."
"그래, 그거 엄청 심각한가 보더구나. 뭐 심심하면 사람이 죽었다고 뉴스가 나오는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어."
뉴스에선 연일 사망자가 발표되고 있는데 정말 깜짝 놀랄 수치기는하다.
우리나라야 국민 개개인이 마스크를 철저히 쓰고 다녀서 이 정도지만 다른 나라는 이 정도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아서 더 심하겠지.
"조심해. 걸리면 후유증도 남고 그런다더라."
"네. 그래도 저는 자차니까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조심하고."
"쓰읍. 애도 아니고 이젠 알아서 잘하겠지."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시끄러웠는지 리모컨으로 TV의 볼륨을 높이시는 아버지.
"아니 왜 이렇게 시끄럽게 소리를 키워."
어머니는 그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잔소리를 하셨다.
평소대로의 부모님이다.
괜찮다. 아직까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이제 시기를 잘 살펴서 말을 꺼내봐야지.
언제 이혼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까 간을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요즘 힘들었을 테니 좀 쉬라고 하셨다.
그 말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이야기가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 지금만 기회가 아니지. 저녁 먹고 하자. 나는 도망쳤다.
내 방에서 잠시 쉬다가 거실로 나와 저녁을 먹은 후 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계셨고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아버지."
"응?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음."
아버지는 소파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으신 채로 나를 올려다보셨다.
"준수 엄마! 잠깐 술자리 좀 내와 봐."
아버지는 그대로 일어나셔서 식탁으로 향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가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가 우리의 앞에 소주와 안주를 내려놓으셨다.
"어머니도 앉으세요. 같이들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어머니가 아버지의 옆자리에앉고 우리는 정말로 오랜만에같이 술자리를 가졌다.
술기운이 몸에퍼지기 시작했고 알딸딸한 기분이 되며 용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됐다. 이야기하자.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래, 말해봐."
"저, 이혼하려고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시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아버지.
나는 이 상황에서 아버지가 대뜸 소리부터 지르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이성적이셨다.
"이혼? 왜?"
어머니도 매우 궁금하신가 보다.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혜정이랑 싸웠어요. 평소에 안 맞는 게 좀 많아서 쌓아두고 있었는데 술김에 저질렀어요."
나는 술잔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비어있는 술잔에 술을 따라주시곤 내 다음 말을 기다리셨다.
나는 술잔을 바라보다가 술을 한 번에 들이켜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혜정이한테 사과하려다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사과를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어요. 그러고 좀 시간이 지나니 혜정이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고요."
"뭐 바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새아기가 그랬다고?"
"네."
"허, 허, 이건 뭐, 허! 그래서 사돈은 아시고?"
"장인어른한텐 말씀드렸습니다. 장모님은 모르시는 것 같고요."
"새아기는 지금 어딨는데?"
"잘못했다고 잘하겠다고 집에 들어와서 눌러앉아 있습니다."
"흠..."
아버지는 뭔가 고민하시는 눈치셨다.
처음엔 엄청 화를 내시고 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외로 이성적이셨다.
"새아기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예쁘고 싹싹하게 굴어서 좋은 애인 줄 알았더니."
아버지는 탄식과 함께 술잔을 내려놓으셨다.
술로 얼굴이 붉어지신 상태로 한숨을 쉬시는 아버지.
"이혼해."
"예?"
"이혼해야지. 넌 마음이 떠난 거잖아."
"네..."
의아하다. 아버지가 원래 이런 분이셨나.
"쉬다 가라."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남았는데.
"결국은 이혼하기로 했니?"
"혜정이는 이혼 절대로 안 하겠다고 그러네요."
"그래... 사돈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구나."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니? 아들 잘못도 아닌데."
잘못한 게 있습니다. 어머니.
말하려고했다. 내가 사실은 만나고 있는 여성이 있으며 그 여성이 고3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원래 인간이란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남의 잘못은 부각시키는 법이지.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부류다.
지금 내 편을 들어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차마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이 고3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뺨을 때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