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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준비(1) (40/301)



〈 40화 〉준비(1)

"아니, 올해로 학원을 그만둘지도 모른다고요?"

아침의 흡연실.

나는 학원에서 그나마 가장 친하던 인한 강사에게 학원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뜻을 밝혔다.

아니, 거의 확실히 그만둬야 한다.

아내가  약점을 잡고 있는 이상 이곳은 떠나야 할 장소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가정사정인가요? 이사라던가 뭐 그런?"

"아뇨.  그건 아니고..."

나는 인한 강사에게 나의 비밀에 대해서 말할까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인한 강사 정도다. 매일같이 변변찮은 이야기라도 내게 말을 걸어준 사람은.

나는 내심 그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너무 대충대충 살던 그가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뒤틀린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에겐 신세를 졌다. 내가 학원에서 고립되지 않은 것은 인한 강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내 학원 생활은 좀 더 끔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인한 강사에겐 내 사정을 들려주자.

인한 강사는 좋은 사람이다.

인한 강사라면 함부로 어디서 떠벌리고 다니지 않으리라. 그러니 말해주자.

"그럼, 오늘 시간 좀 되십니까?"

"네."

"원래 좀 말하기 껄끄럽다 싶을 땐 이거죠 이거."

인한 강사가 손짓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한다.

"좋죠. 오늘은 제가쏘겠습니다."

"이야~ 역시 준수 강사님입니다. 솔직히 이번 달 용돈이 쪼들려서 걱정이었거든요. 아! 오랜만에 공짜 술이라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하하하!

공짜 술이 그리도 좋은가?

인한 강사에게 뜻을 전한 다음엔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님에게 올해를 마지막으로 강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잠시 심호흡을 한다. 각오를 다지고 뜻을 전해야지.

똑똑.

ㅡ 예.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아, 준수 강사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으세요."

제법 후덕한 인상의 원장님.

이 학원은 내가 두 번째로 일하는 학원이다.

아내와 결혼하고집에서 가까운 학원을 찾았고 그곳이 여기였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벌써 6년이다.

6년 동안 엄청 잘해주시거나 그렇진 않았다.

그래도 딱히 월급을 챙겨주지 않거나 트집을 잡는 분도 아니셨다.

나이가 좀 있으신데도 현직 수학강사로서 강의실에도 서시는 분이고 말이다.

원장님은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를 하나 꺼내서 내 앞에 놓으셨다.

"자, 말해보세요. 무슨 일이시죠?"

"저, 그게...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 학원을 그만둘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임으로 들어올 사람을 먼저 알아봐 달라고 말씀드리려고요."

"네?"

갑자기 뭔가 못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시는 원장님.

"혹시, 요즘 월급에 불만 있어요? 강의 평가도 오르고 있던데 혹시 더 좋은 학원에서 오라고 하던가요? 얼마나 부르던가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깍지끼는 원장님.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개인 사정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어쩔  없기는 한데 요즘 학원 그만두면 재취업도 어려울 텐데..."

원장님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셨다.

"올해로 5년 차였나요 6년 차였나요?"

"6년 차입니다, 원장님."

"준수 강사님은 계속 다닐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네요."

나도 계속 다닐 줄 알았다.

"그래도 표정도 나쁘지 않은 거 보니 나쁜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알겠습~니다."

원장님은 소파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내미셨다.

나는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그래도 미리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6년 동안 하루 빼고 지각한 적도 없으시고. 언제나 성실해서 보기 좋았어요."

"저,그,어 죄송합니다."

"하하, 눈치 주는  아니에요. 어차피 준수 강사님은 어디서 뭘 하든 잘하실 겁니다. 좋은 대학 나오셨으니 뭘 하든 잘하시겠지. 퇴직금은  준비해두겠습니다. 아,그리고 그만둘지도 모르는 거지 그만두는  아니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 취업사정까지 고려해주시며격려까지 해주시다니 굉장히 좋은 분이시네.

이런 분이란  알았다면  더 친하게 지내보는 것도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원장님.

***

"다들 모의고사 보고 힘이  빠진 모양인데 솔직히 수능은 아무도 모르는 거에요."

오늘도 강의의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갖고 잡담을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많은 학생이 호응을 해줘서이 시간이 기다려진다.

"수능 100일의 기적이라고  하잖아요? 특히 올해는 학생들이 등교수업을 못 해서 말이 많은데 학원에서 파김치가 때까지 공부하는 여러분이 나쁜 결과를 얻겠습니까?"

강의실에 한숨 소리가 울려 퍼진다.

100일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들으니 곧 시험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나 보다.

"수능이12월로 연기가 됐으니 공부할 시간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힘내 봅시다. 뭐, 망치면ㅡ"

나는 웃으면서 학생들을 둘러봤다.

"내년에 오전 반으로 강의 들으러 오시면 됩니다."

내 말에 강의실은 한숨 대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문 재수학원은 아니라서 진짜로 공부를 하고 싶으면 재수학원으로 가야 해요. 검정고시 준비반이니까."

학생들이 조금씩 기운을 차린다.

"자, 그럼 진도 나가겠습니다."

웃으면서 농담을 했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내 강의를 듣는 이 학생들과 오전의 검정고시준비반 학생들이 내가 가르치는 마지막 수강생일 수도 있겠다.

올해의 나는 당신들과 함께 이 학원을 졸업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느새 이곳에서 강의하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부러웠지. 생기가 넘쳐흐르는 수강생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희망과 꿈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그들을 멀리했고 나보다 부족한 존재라며 업신여겼다.

그럴수록 나 자신이 초라해지고 이곳이 싫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곳에서 사회로 나갈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다.

학교의 담임 선생님처럼 은사 취급도 필요 없다.

수능을 볼 때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이 내 도움으로 문제를 한 문제 더 맞혔다고 생각해준다면.

 정도만으로도 만족할 것 같다.

우습다.

월억킥 작가가 되면 언제든지 때려치우겠다고 이를 갈던 이 장소가 이젠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리다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

"짠 합시다. 짠!"

짠.

나와 인한 강사는 근처의 주점으로 왔다.

나는 술이 약해 맥주를 홀짝였고 인한 강사는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맥주로 목을 축이고 어렵사리 입을 열 각오를 다졌다.

인한 강사는 좋은 사람이다. 믿어보자.

"아내랑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허.. 결국엔 이혼인가요?"

인한 강사는 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볼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라도 이런 말을 갑자기 해온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혼해서뭐 친가 쪽으로 내려가신다든가 그런 이유로 그만두시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서울에서 벗어나진 않을 거예요."

서울에 있어야만 수진이를 만날 수 있다.

"그럼 뭐 때문에? 아, 혹시 요즘 강의평가 좋다고 다른 곳에서 더 페이를 높게 불렀어요? 그럼 어쩔  없지."

원장님도 그렇고 인한 강사도 그렇고 나를 고평가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봐주니까 고맙습니다. 뭐,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 그만두시는데 이참에 시원하게 질러요!"

그리 말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리는 인한 강사.

나는 그 잔에 건배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술자리의 가벼운 분위기에 취해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저, 곧 사고 칠 겁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사고요? 아니 왜 갑자기 이혼에서 사고 이야기가 나오지."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서요. 이혼하려고 증거를 모으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혼하려고 다짐해놓곤 그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어요."

"...네?"

눈만 끔뻑끔뻑 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한 강사.

약간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말이 술술 나왔다.

"그러다가 저도 뭐, 그겁니다 맞바람..."

"맞바람!"

인한 강사는 본인의 성량에 깜짝 놀라 목을 쓰다듬곤 주위의 눈치를 살핀 다음 조금 작은 목소리로 내가 한 말이 진짜인지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한 강사가 탄식을 내뱉었다.

"와... 세상에! 살다 살다 허, 이건 아~ 뭐라고 해야하지..."

인한 강사는 내 말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지 뭔가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올해 최고의 서프라이즈네요. 설마 준수 강사님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뭔가 많이 실망하셨습니까?"

"실망이고 자시고 애초에 그런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

갑자기 손을 튕기는 인한 강사.

"설마 그 금연이나 운동이나 강의가 달라진 게?"

"예, 그런 거죠."

"사랑에 힘이네요. 네 압니다! 잔 들어요!"

인한 강사와 다시 한 번 건배를 했다.

"새 사랑에 건배하는 겁니다. 솔직히 내가 먼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꿀릴 게 뭐가 있어요. 확 지르고 보는 거지. 근데 그게 왜 사고에요?"

그걸 이제 물어보는 겁니까? 많이 취하셨네.

"아내가 죽어도이혼하기 싫다고 이혼하면 학원에서 깽판 친다네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건 사고를 당하는 거지 치는 게 아닌데요?"

말... 해야겠지.

솔직히 누군가에게  시원히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상대가 미성년자예요. 우리 학원 수강생."

"푸웁!"

인한 강사가 술자리에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얼굴로 술이 날아왔을 테니까.

"콜록 콜록 콜록!"

연신 기침을 하며 테이블에 있던 티슈를 얼굴로 가져가는 인한 강사

"레알?"

"네."

"와, 이건 뭐, 올해 최고를 계속 갱신하시네요. 이건 진짜 뭐라고 해야 하지. 축하? 아니 이건 뭔가 아닌 거 같고."

"욕은 안 하시네요. 이 미친놈이 완전 로리콘이니 경찰서니 하면서 화내시는 것도 각오는 했는데."

인한 강사는 얼굴을 닦던 티슈를 내려놓고 나를 쳐다본다.

"솔직히 말해서 좀 놀라긴 했습니다. 올해로 준수 강사님이 음 38살이었나? 검정고시반이랑 수능반이시니 19살 일테고... 2배 차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당황은 했는데, 뭐 제 일도 아니기도 하고요. 강남이나 서초구나 거기는 요즘 15살 차이도 많다잖아요?그리고... 준수 강사님이니까요."

"저요?"

"뭐든지 준수한다! 그런 느낌이죠? 체면을 신경 쓰시는 분이 이러신거 보니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죠. 그리고 뭐 어떱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곤 술을 마시는 인한 강사.

"이렇게 민감한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건 나름 절 믿고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준수 강사님도 고민 많이 하셨을 텐데.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렵니다."

인한 강사는 다시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쳐왔다.

"그래도 좋네요. 내가 40이어도 아직 21살 내가 50이어도 아직 31살. 완전 남자의로망 아닙니까? 아하하하!"

우리는 한동안 술을 마셨다.

그동안 내가 만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화제로 올라오지 않았다.

궁금하리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가 만나는 여성이 여고생이라니 그게 얼마나 궁금한 화제냐.

하지만 인한 강사는 나와 수진이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으며 내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줬다.

그 작은 배려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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