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매너리즘(2) (39/301)



〈 39화 〉매너리즘(2)

"선생님, 어제 소설 읽어보셨다고 하셨죠? 어떠셨어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소설은 재밌었다.

전개가 달라지긴 했어도 언젠간 이렇게 돼야 했을 전개였다.

회귀물에서 기연을 얻고 강해지는 건 클리셰니까.

오히려 시원해진 면이 있어서 보는 맛도 있다. 실제로 독자들도  재밌다고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소설에서 이전 같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 나만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다.

"괜찮았어."

"응?"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가 멎는다.

수진이는 조심스러운 눈치로 내게 고개를 돌려왔다.

"별로... 였어요?"

나도 잘 모르겠다.

전개가 시원해졌다.

주인공은 여전히 호감형 성격이었고 그 옆에서 투닥거리는 성녀는 매력적인 히로인이었다.

강한 적과 싸울 때는 먼치킨 소설 특유의 간결함이 아닌 공들인 묘사를 통한 긴장감을 유발했고 답답한 작가가 나오지 않으니 사이다 감성도 많이 나와 속이 시원했다.

내가 그리 회귀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굉장히 재밌는 전개가 이어지고 있다고생각한다.

그런데도 난   소설이 별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수진이는 내가  말에서 미묘한 감정을 읽어냈다.

그러니 이 화제를 계속 이어가는  좀 아니라는 생각에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수능도 코앞이라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일일 연재하는 거 괜찮겠어?"

"확실히 힘들긴 하죠. 그래도 매일 연재해도 연참하라고 소리치는 독자들이 있는데 쉬기 좀 그러네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작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소설 올리셨네요?"

"그렇지. 좀 고민하다가 이제야 틀이 잡힌  같아서 써봤어."

가슴이 시키는 데로 써내려간 소설이라 스토리 전개가 힘들었고 지금에서야 이야기를 이어  수 있었다.

"재밌었어요. 등장인물이 적어서 좀 심심했거든요."

"그래?"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지면 스토리나 시점이 난잡해지지만, 역으로 너무 적으면 단조로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범수 전 여친이라는 캐릭터. 아내분이 모델인 거죠?"

역시 들킬 수밖에 없지.

"그래."

"혹시 진짜 애라도 생겼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죠?"

그래.그럴 리가 없지. 그랬다면 임신했다는 이유로 날 협박하면 그만이니까.

***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제는 별로였던 소설이 오늘은 또 재밌게 느껴진다.

별 내용은 없었다.

요즘 흔히들 쓰이는 용어로 `구원`이라는 클리셰가 있는데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해주면 그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는 그런 전개였다.

주인공에게 들이대는 여자를 보며 성녀가 질투한다.

정말 별것도 없는 흔해빠진 클리셰 투성이의 전개였다.

그저 성녀라는 캐릭터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차라리 그 전에 나왔던 스토리가 더 시원하고재밌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나온 스토리가 더 재밌게 느껴졌다.

왜지?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읽었던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었던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눈치챘다.

"하아..."

이런 병신새끼.

나는 어느새 수진이의 소설을 소설로 보고 있지 않았나 보다.

예전엔 이 소설이순수하게 재밌었다.

시원할  시원하고 무게를 잡을 땐 과감하게 고구마도 집어넣었으며 묘사도 정중해서 요즘 범람하는 양판소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의 나는 이 소설에서 다른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왜 어제까지 읽은 분량은 재미가 없고 오늘 읽은 분량은 재미가 있는가.

그 해답은 수진이의 소설 속에서 나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진이의 소설에 나라는 인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저열한 우월감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길 바라며 소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소설에서 나란 존재가 드러났다.

독자들은 모르겠지. 하지만  안다. 아니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알고 있다.

수진이의 소설이 칭찬을 받을수록  안에 녹아들어 있던 내 삶이 칭찬을 받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달콤하고 멍청했던 착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수진이를 만나며 소설보다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나의 이야기가 등장해도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겨버렸다.

지금의 나에게 더 중요한건 소설 속에 투영된 수진이의 마음이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 난 이 소설을 언젠가부터 순수한 재미로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설에 수진이의 심정이 녹아 들어있지 않으면지루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러니 오늘 분량은 재밌게 느껴졌던 거다.

성녀라는 캐릭터가 새로 등장한 여자에게 질투하는 장면에서 수진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서 재밌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몹쓸 짓이다.

봐라. 댓글 창을.

난리가 났다.

하렘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새로운 여캐를 보며 분양이라는 댓글을 쓰고 있고 스토리 나가기도 바쁜데 왜 쓸데없는 곁다리를 쓰느냐고 욕하는 독자도 생겼다.

그래. 그녀는 프로다. 기성 작가다.

이런 스토리는 쓰면  됐다.

그럼에도 내 반응이 변변찮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해봤으리라.

나라는 존재가 그녀의 작품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건... 잘못됐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나란 존재를 의식하고  소설에서 저열한 우월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틀렸다. 틀린 거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악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

기말고사가 끝나면 수진이와 종종 데이트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자주 놀러 다녀도 되겠어?"

"이번  모의고사 점수 보셨잖아요?"

그래. 봤지.

수진이는 공부도 잘했다.

국어는 가볍게 1등급이었고 수학 나형이랑 외국어는 몇 문제만 더 맞혔으면 1등급이었다. 한국사도 1등급이었고 사회 탐구 쪽이 2등급 1개, 1등급 1개가 나왔지만, 충분히 좋은 성적이었다.

꾸준히 계속 공부를 한다면 좋은 결과물을얻을성적이다.

"대학교는 알아봤고?"

"잘 모르겠어요. 그냥 좋은 성적 받으면 가장 좋은 대학교로 넣어보려고요."

무난하다. 모든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선생님은 K대학 나오셨죠?"

"응? 내가 그런 말을 했나?"

"강사정보란에 프로필 적혀있잖아요."

"아, 그러네."

나름대로 공부는 잘했었다.

"그러고 보니 생일이 3월이셨죠? 놓쳤네요."

"뭐 그건 어쩔  없지."

그땐 모르는 사이였으니까.

"내년 생일엔 생일 선물 챙겨드릴게요."

"어, 진짜?"

"네, 저도 생일선물 받았으니까요."

수진이의 답례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나에겐  특별하게 들렸다.

내년 3월.

수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학원을 떠난다.

그럼에도  생일선물을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내년에도 곁에 있어 준다는 뜻이니까.

내년에도 수진이를 만날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뭐 받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지금은 딱히?"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네가 내년에도  옆에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선물이다.

***

이번에는 수진이의 소설을 묵혀두지 않고 매일 연재될 때마다 읽었다.

읽을 때마다 소설에서 기복이 느껴진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수진이는 고3이고 곧 있으면 수능을 치러야 한다.

앞으로 약 4개월이 남았다.

수진이의 성적은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고 해야 하지.

영어와수학은 컨디션이 좋으면 1등급을 노려볼 위치에 있고 암기과목인 사회탐구영역은 조그만 시간을 투자하면 금방 1등급으로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작가다. 제법 많은 시간을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쓰고 있다.

거기에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불안감도 있겠지.

그녀의 가정은 편모가정이다. 그 사유조차 아버지의 불륜이지.

그런 상황에서 만나고 있는 남자가 나이 차가 2배나 나는 아저씨에 유부남이다.

이혼한다고 해도 돌싱남인데 불안하겠지.

내가 정말 이혼을 할 것인가. 이건 불장난인가 아니면 진짜 사랑인가.

만약에 정말 사귀게 된다 해도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섬세한 시기에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방해만 되고 있다.

수진이는 당차 보이지만 섬세한 아이다.

이제...선택해야 하는 시간이다.

사실 가장 좋은방법은 수진이를 포기하고 예전의 관계로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수진이의 부담도 줄어들겠지.

하지만 안 된다. 난 이제 그녀가 없으면 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준범이가 그랬잖은가. 때려치우라고.

 말 그대로다. 이제 다 필요 없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그녀가  소중하다.

지금까지 참 많은 변명을 하며 자신을 속여왔다.

어리석었다.

사랑이란 감정에 꼭 성욕이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어쩌면 연인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저 변명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은 두려웠다.

수진이와 일선을 넘는 것으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일상을 버린다는 것이 무서웠다.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이상 시간을 끌면 수진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내가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수진이에게 더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내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손해를 입고 상처 받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진이는 나의 행동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달라지고 싶다.

 이제 그녀가 없으면 된다.

지금과 같은 담백한관계로 남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도 되고 싶지 않다.

수진이와 함께했던 일들을 떠오른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소설을 썼고 잡담을 나누었으며 소설에 대한 감상회도 가졌다.

데이트하며 서로를 알아가기도 했다.

연인처럼 서로의집에 초대해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그야말로 연인 사이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수진이에게 고백하자.

결혼을 전제로 한 연인이 되어달라고 고백하자.

넘어야 할 고비가 산더미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우리 사이가  해결됐으리라 생각하고 계시겠지.

나는 두 분에게 혜정이와 이혼하겠다는 뜻을 전해야 한다.

아마도 쉽지는 않으리라.

 사람 좋던 장인어른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오른다. 두렵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설득하면 이젠 부모님이 기다리신다.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전혀 간섭을 안 하고 계시는 부모님.

나는 부모님에게도 이혼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마  충격을 받으실 것 같고 아버지는 호통을 치시겠지.

솔직히 좀 무섭다.

우습지. 이제 마흔인 아저씨가 아직도 부모님을 두려워한다.

그래도 믿어보자.  부모님이다.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는데 편을 들어주시겠지.

그리고 혜정이.

나를 사랑한다고 가지 말라고 붙잡던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너도 떠나보내야 한다.

37살.

생각보다 많은 나이이긴 하다.

하지만 요즘은 결혼하는 나이가 점점 늦어지는 추세니 네 외모면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나겠지.

 말대로 나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젊은 놈은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나랑 결혼한 거니 네 안목을 탓해야지.

마지막으로 수진이의 어머님.

솔직히 내가 부모라고 해도 19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자를 데려와서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고 하면 주먹이 먼저 나가리라.

"하아."

한숨만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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