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매너리즘(1)
"6월은 엄청 덥더니 7월은 비만 내리네요."
두 번째의 데이트가 끝나고 우리의 관계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나의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6월이 끝났다는 게 가장 중요하지.
6월은 바빴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나를 비롯한 학원 강사들은 시험에서 나온 문제들을 분석하고 수능의 난이도를 예상하여 문제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모의고사에 대한 풀이를 해주며 학생들이 많이 틀린 부분에 대한 해석을 곁들인다.
학생들이 많이 틀린 문제를 분석한 문제를 만들어 배포하고 학생들이 충분히 숙지하도록 준비했다.
학생들도 매우 바빴다.
6월 모의고사는 `모의`고사에 불과하다.
모의고사가 끝나면 틀린 부분을 공부하여 본인이 약한 부분을 보강해야 하고 모의고사 후엔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으니 내신성적을 위해 오히려 더 빡세게 공부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이번 해는 전염병으로 인해 개학이 늦어 7월 말에시험을 본다는 듯하다.
하지만 다행이든 뭐든 학생들에겐 죽을 맛이겠지.
수진이는 시험공부로 바쁘고 나는 일 때문에 죽겠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데이트하러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평소처럼 카페에서 만났다.
수진이는 일일연재를 준비하거나 공부를 하고 나는 커피를 시켜놓고 책을읽었다.
처음에는 쓰던 소설의 뒷내용을 곧바로 써 내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불가능했다.
수진이와 나의 관계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기에 나의 망상이 들어가도 괜찮은 전개가 그려지긴 하겠지.
하지만 주인공인 범수를 찾아온 전 여친의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을 잘 못 잡겠다.
굳이 그녀가범수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범수를찾아왔을까? 아니, 고혜정. 너는 도대체 왜 나에게 집착하는 거냐.
I know I`m not the only one~♪
카페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팝송.
이 노래라면 알고 있다. sam smith의 노래다.
나는 카페에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이미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왜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
지금 흘러나오는 이 가사처럼 나를 그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서냐?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됐다. 아내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자.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러네. 아, 그러고 보니 우산 때문이었어."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중이다.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가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제는 약 3개월이나 지난 그 날을 떠올려본다.
우연이었다.
만약 그날 짐을 교탁에 두고 오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은 정상인이어서 학생들이 뒷담화를 까지 않는 인간이었다면.
내가 조금만 더 무신경한 인간이어서 학생들의 뒷담을 무시하고 짐을 챙겨 나갔더라면.
그렇다면 이 일상은 찾아오지 않았겠지.
학생들은 매년 학원을 떠나간다.
내 강의를 듣던 그 학생들은 대학생이 되거나 혹은 직장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겠지.
그렇게 사회로 나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가리라.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학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차라리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겠지.
생기가 흘러넘치는 학생들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직관하며 이렇게 썩어 문드러져 온 거다.
그들을 질투하는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달라지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할 만큼 해서 지쳤고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살고 싶었다. 외로웠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리라 믿고 소설을 끄적였다.
하지만 그 소설은 삼류조차 되지 못하는 쓰레기였다.
그럼에도 내 소설을비웃는 사람들을 보며 내 인생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 짜증이 났다.
우연이다.
하나라도 어긋났더라면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연민하며 살아가고 있었겠지.
"15만원짜리 우산이요?"
후후.
수진이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그 별거 없는 15만원짜리 우산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그런데 뭔가 좀 꺼림칙하다.
우산의 출처가 나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그 우산. 사실은 선생님 꺼 아니죠?"
"응?"
나는 갑자기 치고 들어 온 말에 몸이 굳어버렸다.
"아내분 거죠?"
숨이 턱 막혀서 뭐라 말을 못 하겠다.
"역시."
갑자기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어?"
"오늘 들고오신 우산. 그냥 싸구려 장우산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처음엔 외견에 많이 신경 쓰는구나 싶었어요."
수진이가 빨대로 커피잔을 휘젓고 있는지 얼음이 커피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번에 선생님 집에 갔을 때 식기류나 주방기구들. 별로 메이커 같은 건 아니더라고요."
굳이 메이커를쓸 필요는 없지. 주방기구들은 생각보다 수명이 짧으니까.
"쓰시는 노트북 메이커도 가성비가 좋은 거지 비싼 모델은 아니고요."
놀랐다. 수진이는 언제나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건가.
나는 심호흡을 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괜찮다. 수진이의 말에서 날 탓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진 않았다.
진정하자.
"전 아내한테 줬었어. 우산이 망가졌다고 하길래 싸구려로 주긴 뭐해서 좀 비싼 걸로."
"전 아내..."
거짓말이다.
전 아내가 아니고 현재도 아내다.
하지만 언젠간 전 아내가 될 테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뭔가... 맛있게 먹던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온 기분이에요."
그것참 찝찝한 비유네.
수진이가 상당히 속이 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 나를 향한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읽어냈기에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하늘이 원수네."
오늘 비만 오지 않았다면 이런 약간 껄끄러운 시간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그날 비가 안 왔으면 이러고 있진 않을 걸요?"
그렇게 생각하니 또 고맙네.
"선생님이 소설에서 그러셨잖아요?"
소설? 아, 그걸 말하는 건가.
""비가 내리는 것도 가끔 씩은 나쁘지 않아.""
나와 수진이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갑자기 웃음이 나와 웃었더니 그 목소리마저 겹쳐졌다.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고 입을 열었다.
"가끔씩이 아니라서 문제지만."
"아, 진짜!"
아, 또 저질러버린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계속 비가 오니까 축축하고 눅눅해서 조금 찝찝한 건 사실이잖아.
***
"요즘 그 쓰던 소설은 왜 안 쓰냐?"
7월의 둘째 주 일요일.
집에서 평소와 같은시간을 보내려고 했더니 갑자기 휴대폰이 울려서 준범이를 만나러 나왔다.
비가 오니 파전이나 먹자던 준범이의 권유는 굉장히 반가웠다.
핑계가 없으면 집으로 나가기 좀 껄끄러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아저씨다.
아내의 앞에서 평범한 남편을 연기하는 건 어려웠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증오와 분노를 어떻게든 다스리며 오늘 하루는 어떻게 버티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 고마웠다.
"고민 중이야."
준범이에게 이후 전개를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아는 유일한 인간이다.
아마 조언이 가능한 사람이 이 녀석이 유일하겠지.
"그러니까 그 딴따라 새끼 전 여친을 잘 모르겠다 이거지?"
"그래."
강범수는 40살 아재다.
부모를 잘 만나서 부모 도움으로 카페를 차리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베짱이에 불과하지.
외견은 깔끔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지만, 굳이 이 남자에게 전 여친이 집착할 이유가 없다.
40살쯤 되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남자는 발에 치이도록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습작 때리고 리메이크해서 아예 딴따라가 사실은 유부남이고 별거 중인 아내로 설정하던지."
"그렇게 하면 왠지 너무 현실기반인 거 같아서 좀 그래."
쓰다 보면 내 감정이 그대로 녹아들어 갈 것만 같다.
혜정이와 수진이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소설에 투영된다.
눈치가 빠른 수진이가 그걸 눈치챌까 봐 두렵다.
"뭔가 딴 건 없냐?"
파전을 먹으며 우물거리던 준범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차라리 집착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던가. 딴따라 아이를 임신 했다던 지 어때?"
"임신했었는데 딴 남자랑 자고 40인 주인공을 찾아오는 것도 에바지. 그러면 애도 10년 넘게 키웠다는 거 아냐?"
"그럼 그 불륜남 애인 줄 알고 결혼해서 키웠고 애 키우고 잘 살다 보니 애가 사실은 그 새끼 애새끼가 아니었다~ 이러면 어때. 그래서 불륜남이 이혼하자고 하고 갈라서서 먹고 살기 막막한거야."
오~ 나름 그럴싸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나는 준범이에게 계속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새끼가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혼할만한 이유가 되고 귀책사유가 아내한테 있으니 위자료도 엄청 토해내서 돈도 없을 겨. 애를 키웠어야하니 경력도 없겠지."
확실히 그렇게 하면 집착하는 이유는 되겠다.
범수의 전 여친은 카페 알바를 한 경험이 있어 겸사겸사 자격증을 딴 상태였다.
그래서 자격증을 활용해 취직처를 찾았는데 마침 알바생을 뽑고 있던 범수의 카페에 취직이 된 거지.
매니저에게 알아서 뽑으라고 맡겨놨더니 전 여친을 뽑아버린 거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범수.
전 여친이 출근하고 서로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전 여친에겐 아이가 있었다.
앞길이 막막한데 범수가 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대생에게 잘 보이려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예전보다 좀 멋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
준범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준범이는 손을 휘저으며 말을 돌려버렸다.
"그나저나 너 주식은 계속 확인 안 했지?"
"어."
처음엔 신경이 쓰여 계속 노려보고 있었는데 거래도 별로 안 되고 움직임도없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정신병에 걸릴 듯한 기분이라 그냥 방치했다.
"담력 개쩌는 새끼네. 아무튼, 진단 키트 관련주는 좀 오른 거 같고 내가 계속 확인하고 있으니 고점이다 싶으면 연락하마."
"그래."
술이 들어간 준범이는 달변가가 되어 경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증시가 10년째 박스권이 라느니 미국 주식에 눈독을 들였으면 10년간 10배를 먹었었는데 그걸 놓쳤다느니 하며 하소연을 하는데 솔직히 돈도 많은 녀석이 그리 말하니 공감은 잘 안 됐다.
내가 시큰둥한 걸 눈치챘는지 이후에는 군대 이야기를 시작했고 본인이 군대에 있을 때 동반입대로 들어온 에이스 & 관심병사 조합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들었던 이야기야 인마.
그래도 주식 이야기보단 나은듯하여 그냥 대충 호응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
준범이의 도움으로 이야기가 진전되기 시작했다.
범수의 카페엔 범수, 매니저 그리고 알바생이 한 명 있는 카페다.
제법 널찍한 공간을 가졌지만 그렇게 붐비지 않아서 적은 인원으로도 돌아가는 그런 카페.
어느 날 알바생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가 알바생을 뽑는다.
범수는 카페의 운영에 관심이 없어 실질적으로 사람을 뽑는 건 매니저가 알아서 하는 그런 운영방식이다.
매니저는 경력직을 뽑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자격증과 카페 알바 경력이 있는 강범수의 전 여친을 뽑는다.
매니저는 알바생을 뽑았다는 사실을 범수에게 알리나 범수는 시큰둥했고 그러다가 첫 출근을 한 전 여친을 만나게 된다.
범수는 보자마자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을 했고 전 여친은 달라진 범수의 분위기에 범수가 그 범수인지 눈치채지 못한다.
예전에는 항상 뺀질거리며 놀기 좋아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던 그.
매너가 좋아 사귀기 시작했으나 금방 싫증이 나서 다른 남자를 만났었다.
그래서 범수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중에야 그가 그 범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의 도움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의 아빠는 아마도 범수겠지.
그 시기에 범수 이외의 남자와 관계를 한 건 전 남편뿐이다.
그러니 범수와 재결합을 하여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음~ 이런 느낌으로 쓰면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만족감.
벌써 밤이 늦었다.
여기서 더 써보려고 해봐야 새벽 감성의 글이 나올 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오랜만에 밀린 수진이의 소설이나 읽어보자.
수진이가 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주인공은 전 회차의 기억을 토대로 여러 기연을 얻고 동료들을 영입한다.
회귀물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클리셰다.
보통의 작가가 묘사한 부분이면 지루했을지 모르겠으나 수진이가 쓴 소설은 조금 다르다.
그래서 재밌게 느껴야만 하는데... 나는 재밌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예전보다 소설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전투씬은 공들인 묘사가 나와 박력이 있었고 성녀도 매력적이어서 캐빨물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지금까지 작가의 갱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답답한 감이 있었는데 전개가 시원해져서 대부분의 독자가 호평이었다.
하지만 난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갑자기 왜 이런 거지?